My travel abroad./India(2012,Jan)

10-6 금강경을 설법한 기원정사(Jetavana)

봉들레르 2012. 3. 26. 08:50

수닷타(Sudatta)라는 장자가 황금으로 동산을 덮어 이 기원정사를 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수닷타 장자는 고독한 사람들에게 많은 보시를 베풀었기 때문에 급고독(給孤獨)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었다.

수닷타는 장사차 마가다의 수도 왕사성에 가서 처남의 집에 들른다. 그때 처남은 분주하게 다니면서 음식 장만하는 일을 몸소 진두 지휘하고 있었다.

처남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다음날 부처님과 스님들을 공양에 초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때 수닷타는 '부처님'이란 말을 처음 듣자,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번쩍 정신이 들었다. 다음날 부처님을 뵙게 된다고 생각하니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밤중에 세 차례나 일어나 날이 밝았는지 살폈다. 더 기다릴 수 없어 거리로 나오니, 그 순간 깜깜한 암흑 속에 갇힌 자신을 돌아보고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때의 장면을 한 경전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허공에서 격려의 말이 들려왔다. "지금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은 온갖 재보(財寶)보다도 존귀하니 앞으로 나가시오."

수닷타의 발길은 시타바나(寒林, 시체를 화장하는 곳)라고 하는 쓸쓸한 묘지에 이른다. 그때 부처님은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조용히 거닐고 있었다.

수닷타가 오는 것을 알아보고, "어서 오너라, 수닷타여!" 라고 말을 걸었다.

수닷타는 부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감격하여 발밑에 엎드려 예배를 드렸다.

 이때 부처님은 수닷타를 위해, 남에게 베푸는 보시와 청정한 생활규범의 공덕을 말하고, 괴로움의 원인과 그 소멸을 위한 길을 가르쳐준다.

수닷타는 즉석에서 가르침의 뜻을 이해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한평생 신자가 될 것을 서약했다.

이때의 일이 인연이 되어 수닷타는 고향 슈라바스티(舍衛城)로 돌아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머물 승원을 세우고자 한다.

그 장소를 물색하던 중 태자의 소유지인 한 동산이 마음에 들어 제타 태자에게 승원을 세우도록 양도해 줄 것을 수차 애원하지만 그때마다 태자는 거절한다.

그러다가 장난말로, "당신이 동산 가득히 황금을 깔아놓고 다닌다면 몰라도 그러기 전에는 절대 양도할 수 없소." 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수닷타는 황금을 여러 대의 수레에 가득 싣고 와서 동산에 깔기 시작한다.

수닷타의 믿음에 감동한 태자는 생각을 돌이키게 된다. "그만두시오. 이 동산을 모두 당신에게 드리겠소.

그러나 입구의 공지만은 내게 돌려주시오. 나도 승단에 선물을 하고 싶소."

이렇게 해서 세워진 승원이 기원정사이다.

바람푸르

그 옛날 이 곳은 슈라바스티(Śravāsti)라고 불렀다. 이미 부처님의 시대 이전부터

라마야아나(Ramayāna)․마하브하라타(Mahabharata) 등 중요한 인도 민족 서사시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계실 때인 기원전 5, 6세기경에는 강성한 코살라(Kosala)의 영향권에 있었던 지역이다.

오늘날의 지명으로는 바람뿌르(Balrampur)라고 한다.

슈라바스티는 부처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절인 기원정사(祇園精舍ㆍ제타와나)가 있었던 곳으로 그의 전법 활동의 중심지였다.

당시 코살라국의 부자였던 수닷타 장자가 기증한 기원정사에서 부처는 24안거를 보냈다고 한다.

기원정사 남문에 들어서니 얕은 구릉에 부처의 상수제자 사리불과 아들 라훌라의 입적 후에 세운

벽돌조 스투파(탑), 비구들이 수행했던 승방 등의 유적이 순례객들을 맞는다.

기타 태자의 동산을 의미하는 기수(祇樹)와, 수달다 장자를 의미하는 급고독을 합해서

이 정사를 기수급고독원(기원정사)이라고도 한다.

 불교교단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왕사성의 죽림정사와 함께 2대정사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후 이곳은 숱한 구도자들과 불교인들이 머물던 불교의 요람이었다.

보리수 뒤편에 급고독장자가 금을 제련하였던 장소에 세원진 두개의 스투파 터가 남아있다.

스투파 터의 경행처 전탑

 

 

 

제자 아난다의 청으로 보드가야에서 보리수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는 '아난다의 보리수'

 

이 나무는 붓다가 출타 중에 참배하러 온 사람들이 붓다 대신 참배하기 위해 아난다가 보드가야에서

나누어 심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자주 스승과 제자가 그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했다는, 바로 그 나무였다.

아난다는 그 보리수 밑으로 가서 "정연한 법의 도리를 보라! 25년 동안 나는 성실하게 붓다의 시중을 들었네.

그림자처럼 그분의 뒤를 따라 다녔네. 그분이 산책하실 때면 나도 따라 산책했네.

(중략) 아, 이제 그분은 가셨네. 이제 그 누가 내게 그렇게 자상한 자비심을 베풀까?" 라고 읊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 서 있는 나무는 그 때의 나무가 아니겠지만 적어도 삼백 년은 넘었음직한 보리수가 의젓하게 잎 새를 드리우고 있다.

 

 

 

 

코삼바쿠티[소정사] -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작은 정사

 

 

 

 

 

 

부처님 우물

 부처님이 드셨다는 전설이 있는 우물터는 아직도 잘 보전되어 있으며 군데군데 석축이 남아 있어 옛날의 영화를 짐작케한다

 

조금 더 가니 중국 현장 스님의 인도 기행문 <대당서역기>에 전단향 불상이 모셔져 있던 것으로 기록된 간다쿠티(香殿) 터가 나온다.

 

간다쿠티의 맨 윗쪽에 있는 곳이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 장소

부처는 이 곳에서 현재 전하는 불경의 3분의 2 가량을 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스님들이 출가 후 불교 교리를 익히는 강원에서 배우는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의 무대가 바로 기원정사다

부처님이 거주하셨던 기원정사 내의 간다쿠티(향실, 香室),

중국의 법현스님과 현장스님의 순례기록에 따르면 원래 7층 목조 건물이었으나,

화재로 인해 이후에 2층 벽돌 건물로 정사(코삼바쿠티, Kosambakuti)를 재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향로탑앞을 지키고 있는 두 스님

가까이 가보니

노트에 적힌 글자를 보고 있었다

 

 

 

 

Monasterica  

 

 

 

 

 

 

 

 

 

많이 떨어져있는 보리수잎을 주워서 비닐포장을 해서 판다.

멀리 어렴풋이 불상과 탑이 눈에 들어온다.

 

 

 

 

 

기원정사의 보시, 스와트 출토, 1~2세기, 높이 20cm,

페샤와르박물관

석가모니가 40여년 동안 사위성과 왕사성 등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머물면서 걸림없는 방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다.

불전문학은 이 기간에 일어난 많은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간다라의 불전 미술에서 이 기간의 사건을 표현한 것만도 30여 가지를 헤아린다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의 부조에는 석가모니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서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에 붓다가 있고, 그 뒤에는 승려 제자가, 앞에는 재가자로 보이는 네 사람이 붓다를 마주하고 있다.

붓다의 앞에 있는 사람은 오른손에 든 단지를 기울여 물을 부으려는 듯하다.

인도의 불전 미술에서 물병이나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부어 주는 모티프는 무엇인가를 보시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 장면은 흔히 '급고독 장자의 기원정사 보시'로 받아들여진다.

이 장면에서 붓다에게 물을 붓고 있는 사람이 수닷타 장자인 것이다.

이 부조에는 가로로 긴 면에 아무 배경 없이 여섯 명의 인물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페르테논 신전의 부조(석고 복제본).

기원전 444~438년경, 높이 1.06m, 바젤 고대박물관

이런 공간 표현법은 간다라의 불전 부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 미술 고전 시대에 유래하여 헬레니즘․로마 미술까지 전형적으로 쓰인 공간 표현법과 동일하다.

크기나 표현에서 붓다와 다른 인물들 사이에 차이가 없고,

두광을 제외하면 붓다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것은 붓다의 신격화가 뚜렷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NAVA JETAVAN MAHA VIHAR SRAVASTI

2시40분에 기원정사 일정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