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India(2012,Jan)

10-5 스라바스티 앙굴리마라 집터(Pakki Kuti)

봉들레르 2012. 3. 26. 07:34

앙굴리마라의 유적지에는 앙굴리마라라는 수도승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년 앙굴리마라의 원래 이름은 아힘사(不害)다.

사위성에 있는 한 바라문의 제자였던 그는 스승을 지극히 존경하여 스승의 말이면 거역할 줄 몰랐고, 스승 또한 아힘사를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였다.

하지만 스승의 아내는 아힘사의 사나이다운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스승이 집을 비운 어느 날, 아내는 아힘사를 유혹하였다.

“스승의 아내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런 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우직한 아힘사가 여인의 유혹의 뿌리치자, 여인의 사랑은 증오로 바뀌었다.

그리고 자기의 탈선한 행위가 알려질까 두려워 입고 있던 옷을 스스로 찢고 머리를 산발한 채 돌아온 남편에게 아힘사를 모함했다.

“당신이 가장 신망하고 있는 제자한테 욕을 당했어요.” 노한 스승은 배신한 제자를 파멸시킬 방법을 생각한 다음 아힘사를 불렀다.

“너의 학문은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남은 것은 비밀의 술법뿐이다. 그 술법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일을 더 해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네거리로 나가서 백 사람을 죽이되, 한 사람에게서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내어 그것으로 목걸이를 만드는 일이다.

하루 만에 백 개의 손가락을 모으면 그것으로써 수행은 완성되는 것이다.”

말을 마친 스승은 칼을 건네주었다. 아힘사는 칼을 받아들고 몹시 고뇌하다가, 스승에 대한 존경과 믿음으로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거리로 나갔다.

그리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여 손가락으로 모았다.

사람들은 그 살인귀를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든다’는 뜻에서 앙굴리마라라고 불렀다. 앙굴리는 손가락, 마라는 목걸이라는 뜻이다.

 마침내 거리로 탁발을 나갔던 비구들이 기원정사로 돌아와 부처님께 그 일을 알렸고, 부처님께서는 그를 제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부처님 그 길로 가지 마십시오. 무서운 살인마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제발 그 길로 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부처님은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그 길로 걸어갔다.

한편 앙굴리마라의 어머니는 자식이 미쳐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갔다.

앙굴리마라의 전신은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어머니는 주저 없이 아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제 손가락이 하나만 더 있으면 된다.’ 이미 이성을 상실한 앙굴리마라에게는 어머니가 어머니로 보이지 않았다.

오직 도를 이룰 수 있게 해줄 희생물로 보였다. 그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칼을 번쩍 들었을 때, 부처님께서 앞으로 불쑥 나섰다.

순간 앙굴리마라는 어머니를 젖혀두고 부처님을 치려하였지만 몸이 오그라 붙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앙굴리마라는 소리쳤다.

“거기 섰거라.” 부처님은 발길을 멈추지 않으신 채 앙굴리마라에게 말한다. "나는 언제나 서 있노라.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움직이고 있도다.

" 앙굴리마라는 순간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는 서 있고 저 비구는 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저 비구는 거꾸로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앙굴리마라여 ! 내 마음은 언제나 잔잔한 호수처럼 움직임이 없노라.

왜냐하면 여래에게는 남을 해칠 생각, 미워하는 마음 등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네 마음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죽이려는 생각 뺏으려는 생각으로 그대의 마음은 언제나 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움직이지 않는 그대로 움직인다 하였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 것이니라."

"나는 여기에 가만히 서 있다. 움직이는 것은 네가 아니냐!” 이 말을 듣는 순간 앙굴리마라는 악몽에서 깨어나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칼을 버리고 부처님 앞에 꿇어 엎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저 같은 악한도 불법을 들을 수 있으리까?"

 "아무렴 그렇고 말고 앙굴리마라여! 인간의 불성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느니라" 그는 부처님을 따라 기원정사로 가서 설법을 듣고 곧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튿날 앙굴리마라는 바리때를 들고 거리로 밥을 빌러 나갔다. 그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거리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그가 밥을 빌고자 찾아간 집의 부인은 해산하기 위해 산실에 들었다가 그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란 나머지 해산을 못하고 말았다.

사람들의 무서운 저주를 받으며 기원정사로 돌아온 앙굴리마라는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도와주기를 호소하였다.

“앙굴리마라야, 너는 곧 그 집으로 가서 여인에게 ‘나는 이 세상에 난 뒤로 아직 산목숨을 죽인 일이 없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평안히 해산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여라. “부처님, 저는 아흔아홉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앙굴리마라야, 도에 들어오기 전에는 전생이다. ‘세상에 난 뒤’라는 말은 도를 깨친 뒤를 말한다.”

그는 곧 그 집으로 가서 부처님께서 시킨 대로 하였더니 부인은 편안히 해산을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들은 돌과 몽둥이를 들고 나와 그를 치고 때렸다.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겨우 기원정사로 돌아온 앙굴리마라는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 저는 어리석은 망상에 사로잡혀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칼로 몽둥이도 사용하지 않고 저의 마음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어떠한 일을 당하여도 괴롭고 아픈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제까지 구름에 가려졌던 햇볕이 구름이 없어지자 밝게 빛나듯이 모든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살기를 원치도 않고 죽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때가 오기를 기다려 조용히 열반에 들고자 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제자들 가운데 앙굴리마라와 같이 빨리 깨달은 자는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 감동 깊은 일화는 앙굴리마라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는 것으로 해피엔딩한다. 아라한과를 얻은 앙굴리마라와 부처님의 대화 또한 인상적이다.

존경받는 비구로 성장한 앙굴리마라가 여쭙는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까?

제가 세존의 가르침을 얻어 이해한바에 의하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의 칼날 앞에서 그를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나이다.”

“그렇고 그렇도다. 앙굴리마라여!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도다.

미운 마음도 괴로운 마음도 일으키지 않을뿐더러 그 죽이려는 사람을 향해 네가 바로 부처이다라고 말할수 잇는 것이야말로 보살의 마음이니라.”

 

 

 

 

 

 

 

앙굴리마라 유적지의 맞은편에는 수닷타 장자의 집터로 추정되는 비슷한 유적이 남아 있다.

기원정사에서 버스로 5분 거리에 있는 사위성터 한가운데 수닷타 장자 스투파와 앙굴리말라 스투파가 마주보고 서 있다.

인도의 스투파는 우리나라 불탑과 달리 붉은 벽돌로 쌓아 올려 거대하게 만들어졌다.

수닷타 스투파는 당시 코살라국의 부자로 붓다에게 기원정사를 지어 기증한 수닷타 장자의 집터에 세워졌다.

앙굴리말라는 100명의 손가락뼈로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99명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다.

붓다가 마지막 살인을 하려는 그를 찾아갔다. 그는 붓다를 향해 “걸음을 멈추어라”라고 외쳤다.

 붓다는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멈추었는데, 그대가 멈추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말로 그를 교화시켜 제자로 삼았다.

그가 평생 참회하며 살았던 곳에 세워진 스투파는 지금은 깊은 토굴만 남고 거의 허물어졌다.

 

 

 

 

 

 

이 앙굴리마라의 탑이 세워졌던 앙굴리마라쿠티(쿠니는 오두막을 뜻한다.)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면

밀림에 묻힌 슈라바스티의 유적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맑게 갠 날이면 이곳에서 북쪽으로 히말라야의 연봉들이 보인다고 한다.

앙굴리말라 스투파의 밑 부분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나중에 파낸 수로라는 설도, 앙굴리말라가 거처하던 굴이라는 설도 있다.

만약 후자가 맞다면 그의 뼈저린 죄책감이 서린 곳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