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India(2012,Jan)

10-7 교통체증 카필라성(Kapilvastu)

봉들레르 2012. 3. 26. 09:12

 

 

 

 

 

 

 

 

 

 

 

 

 

 

 

 

 

 

 

 

 

 

 

 

 

 

 

 

 

 

 

 

 

 

 

 

 

 

 

 

 

 

 

 

 

 

 

 

 

 

 

 

 

 

오는 도중에 교통사고를 냈다고 경찰이 막아섰다. 운전기사는 그런적이 없다고 항변을 하고

 

한참을 실랑이 끝에 보내준다. 누가 신고를 했다나. 내가 보아도 그런일이 없었다.

 

조금 가다보니 피해자의 형이란자가 또 버스를 막아섰다. 이래저래 시간만 간다.

기원정사에서 오후 2시40분에 출발하여 오후6시가 다 되어 카필라성에 도착하니 이미 컴컴해졌다.

교통사고 때문에 실랑이를 하느라 늦어져서 카필라성에 도착하니 어둡다.

 

석가모니는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명의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그는 기원전 6세기경 지금의 네팔 남부 타라이 지방의 "카필라바스투" 라는 도시국가의 왕자로 태어났다. 이 카필라바스투는 우리가 생각하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 도시국가 즉 석가족이 모여사는 형태의 작은 국가로서, 주위에는 코살라 국이나 마가다 국과 같은 강대한 국가에 끼여 있었다. 아버지(슛도다나)가 왕이라고는 하나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왕이라기 보다는 귀족회의의 대표정도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강대국 사이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진 도시 성주의 아들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한 나라의 태자로서 모자람이 없는 영화(榮華)를 누리며 자랐다. 이후 이 도시국가는 코살라국에게 망하고 코살라도 마가다에게 망한다. 마가다국은 역사상 마우리아 왕조를 건설한다.

5세기에 중국승인 법현이 방문했을 때는 집도 수십 채 정도만 있는 황폐한 상태였다

두 개의 유적지가 네팔과 인도에 병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굴 등에 의해서 네팔 중남부의 티라우라코트나 북인도의 네팔국경 근처 우타르 프라데시주 바스티주의 피플라와의 두 유적이 카필라바스투로 추정되었다. 네팔에서는 이곳 틸라우라코트의 유적지가 카필라바스투라고 주장하고 있고, 인도 측에서는 네팔 접경 인도의 피프라하와 및 간와리아 유적지야말로 고대 카필라바스투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두 의견이 합일점을 보지 못하고 팽팽히 맞서자 일부 학자들은 고대 카필라바스투는 네팔의 틸라우라코트에 있었으며, 비루다카에 의해 카필라바스투의 고대도시가 파괴되고 난 후 피프라하와 및 간와리아에 새로운 카필라바스투가 세워졌다는 절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절충안을 감안하더라도 붓다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결혼을 하고 살아가다가 출가 한 곳은 틸라우라코트의 카필라바스투일 것이 확실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인도의 카필라성이다.

인도 카필라성. 인도국경 소나울리에서 2시간정도 쉬라바스티에서4:30분거리다.

쉬라바스티에서 카필라성가는길은 성지순레중 제일 길이 안좋다.

 

 

 

 


 

대낮에 찍은 카필라성(퍼온 것)

인도 카필라성

 인도 카필라성

인도 카필라성

 

보다 더 많이 소개되는 곳이 네팔에 룸비니에서 가까이에 있는 카필라성이다.

우린 그곳은 가지 못했다.

네팔 카필라성

룸비니가 붓다가 탄생한 성지라면, 카필라바스투는 싯다르타가 대각을 이루기 이전 세속에서 보냈던 29년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붓다의 제자들에겐 인간 붓다를 느낄 수 있는 가장 푸근하고 인간적인 성지이기도 하다. 붓다의 인생을 8가지로 표현한 팔상성도에서 도솔래의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 등 3가지가 이곳에서 일어난 것이니 카필라바스투야말로 성지중의 성지가 아닐 수 없다.

싯다르타는 29세였던 당시 태자로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우리 존재의 근원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뇌로부터 벗어나고자 결연한 의지로 출가하였다. 그 후 부처님이 도를 이루고 왕사성과 사위성에서 교화를 하자 부처님의 명성은 인도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이 명성을 들은 정반 왕이 듣고 사신을 보내어 고향에 돌아오기를 청했으나 보내는 사신마다 부처님이 설법하는 자리에 있다가 그 자리에서 출가를 해 버렸다. 이어 우다이라는 놀기 좋아하는 대신이 찾아갔으나 그 마저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끝내 정반 왕의 청을 전달하였고 이에 부처님은 카필라 성으로 돌아오게 된다.

지금 카필라성은 남북으로 500m, 동서로 450m쯤 되는 성벽 흔적뿐이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고대 건축물과 주거지의 흔적 및 성벽 4면의 거대한 문, 수문실, 수레바퀴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중앙에는 슛도다나 왕이 머물렀던 왕궁으로 추정되는 큰 건축물터가 눈길을 끈다. 유적들에 대한 분석결과 기원전 8세기 초엽부터 A.D. 2세기 말에 이르는 문화유산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남문은 싯다르타가 병든 사람(病)을 봤다는 문이다. 그곳에는 성문 터조차 찾을 길이 없다. 문터가 있었으리라 추측되는 곳에 흙더미가 쌓여 있고 온갖 잡초가 그 위를 덮고 있다.

서문은 현재 성의 출입문인데 성문 흔적을 간신히 알아보게 하는 성벽 터의 붉은 벽돌이 바닥에 깔려 있다. 싯다르타는 이 서문을 나서며 사람 시체(死)를 처음 보았다. 그 문밖에는 그 시신 대신 관리소 건물과 그 마당이 있다.

북문은 싯다르타가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는 수행자를 만나 출가의 뜻을 굳혔던 문이다. 인간이 나서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苦)'은 왜 있는 것일까, 과연 이를 풀어줄 해답은 있는 것일까. 그렇게 그가 나섰던 북문도 이제는 터만 남아 있다. 성내 현재 발굴된 유적들은 서문과 더불어 중앙건물지역, 몇천년 전의 힌두교사원, 동문이다. 현재는 승원유적지가 2곳만 남아있다. 카필라성과 5분여 거리에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이 있다.

 

네팔 카필라성의 동서남북 사대문 중 유일하게 흔적이 남아 있는 동문 터

동문은 싯다르타 태자가 문밖에서 늙은이(老)의 모습을 봤다는 문이다.

태자는 이 동문으로 나와 늙은 사람의 모습을 처음 보고 충격을 받았다.

창고와 상가터 그리고 아치를 올렸을 것으로 보이는 성문의 기단부가 조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