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茶馬古道 (2014 May)

4-1 여강고성(麗江古城, Lijiang Old Town)

봉들레르 2014. 5. 24. 01:48

 

고성안에 있는 숙소

 

한 기와지붕에 뺑 돌아가면서 방 들이 있다.

여강 고성

 

 

1996년 기록적인 대지진 때 콘크리트 건물들은 모두 초토화됐지만 고성 안의 나시족 전통 가옥들은 멀쩡했다.

중국 정부는 지진으로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면서 나시족의 전통가옥 형태로 복구하도록 했고,

유네스코는 재건된 리장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리장고성 내 쇠못을 사용하지 않은 수백 년 된 목조 기와집은 70% 이상 말짱했다.

기둥과 대들보를 사개맞춤식으로 결합한 나시족의 전통 건축양식이 지진의 충격을 잘 흡수했기 때문.

고성 구석구석까지 이어진 골목과 수로는 자연친화적이고 치밀하게 조성된 도시 계획의 완결판이었다.

크고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리장 고성 안에서는 각종 기념품과 먹을거리,푸얼(보이)차와 야크 육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아담한 정원을 갖춘 객잔(1박 약 1만4000원)이 즐비하다.

 

 

 

고성 안에서는 '싼옌징(三眼井)'이라는 세 칸짜리 우물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집 앞 수로에 칸막이를 설치해 물을 가두어 놓고 첫째 칸에 흘러든 물은 음용수,

둘째 칸은 채소나 쌀을 씻는 물,셋째 칸은 몸을 씻는 허드렛물로 사용한다.

 

 

 

인구 30만명 안팎의 나시족은 동파(東巴)문자와 동파문화로 널리 알려진 저력의 민족이다.

1000년 이상 이어져온 동파문자는 아직도 1700여개가 남아 있고,

지금도 쓰이는 세계 유일의 상형문자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고성 안을 걷다 보면 벽화 형태로 남아 있는 동파문자를 쉽게 볼 수 있다. 글자라기보다 그림에 가까워 하나의 예술품처럼 느껴진다

북방에서 남쪽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거쳐 완성된 동파문자는 오늘날 1400여 개 글자가 확인되고 있다.

문자수는 많지 않지만, 동파문자는 단어가 풍부해 인간의 세세한 감정뿐만 아니라 복잡한 사건의 기술, 시와 문학까지 표현할 수 있었다.
동파문자는 메소포타미아설형문자나 중국 은나라 갑골문자보다 더욱 원시적이어서 현대적인 그래픽 부호를 연상케 한다.

대담한 과장과 생략, 요약 등의 기법으로 생동감 있는 표현이 특징이다.

동파문자는 한자 '고'(苦)를 입으로 검은 물체를 밖으로 내뱉고 있는 모습을,

한자 '행복'(幸福)을 남녀가 함께 춤을 추고 기뻐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인간의 희로애락, 선과 악, 온갖 사물에 대한 관점을 원시적인 관념으로 고스란히 기록한 것이다.

 

 

 

공동우물

 

 

 

동양의 베니스 여강

 

 

 

 

 

 

 

 

고성의 중심광장

 

 

 

 

 

느림과 여유가 있는 곳
여강은 다른 관광지에 비해서 시끌벅적한 그런 곳은 아니다. 조용히 걸으면서 이것저것 참견해 보고 싶은 곳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음악을 들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은 그런 곳이다.

그래서 많은 배낭여행객들이 처음 계획한 체류기간보다 더 오래 머무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벗어나 어느 것에도 쫓기지 않는 여유를 느껴보고 싶다면 여강으로 가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800년 전 남송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고성은 1997년에 고성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지정됐다.

여강 고성의 특이한 점이라면 다른 고성들과는 달리 성벽이 없고, 고성 안에는 여전히 나시족들이 살고 있어 아직까지 살아있는 고성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또한 10년 전 여강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주변에는 엄청난 피해가 있었음에도 진흙과 나무로 만들어진 전통가옥들이 늘어서 있는 이 고성만큼은 끄떡없이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거라 한다.

골목 골목마다 흐르는 수로에 헤엄치고 있는 금붕어들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고성 전체를 둘러보는 데만 해도 3일이 넘게 걸릴 정도라 하니 그 크기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골목들이 작은 수로를 따라 미로처럼 이어져 있어 자칫하다가는 길을 잃기도 쉬울 것 같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고성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가면 흑룡담 공원이 나온다.

정문을 들어서면 흑룡담을 따라 길이 나있는데, 이 물이 너무 맑아 옥룡설산과 하늘을 비춰 완전한 대칭을 이룬다. 또한 이곳에는 나시족의 상형문자인 동파문화 연구소가 있어 낯선 나시족들의 전통문화를 만나볼 수 있다.

 

 

   여강고성은 송나라말기 원나라초에 형성되였고 지금으로부터 8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상 운남 서북부의 정치,군사의 중요한 지역이였고 나시족,장족(티벳민족),한족등 각 민족 경제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다.

여강고성은 송나라,원나라이래 형성된 역사 모습이 완정하게 보존되였기에

 1986년 중국정부에서 국가급 역사문화도시(산서성 평요-山西平遥)로 임명하였다.

 

 여강고성의 구조를 보면 물의 줄기와 지세 따라 형성되였고 옥하(玉河)의 물은 서하, 중하, 동하 세 갈래로 나뉘여

고성안으로 흘러들면서 더 많은 지류로 이 거리 저 골목으로 흘러든다.
여강고성의 중심인 사방가(四方街)는 많은 가게들로 둘러싸인 약 400m2에 달하는 작은 광장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목씨 토사가 자기의 도장을 모방하여 역암(砾岩)으로 깔았다고 한다. 권리가 사방을 누르다는 뜻이 내포되여있다.

 그 당시에 사방가의 주위에는 수십개의 상점이 집중되여 있었고 가지각색의 상품은 차마고도를 통하여

사면팔방에서 여기에 모여들었고 또 여기에서 각지로 운송되였다.여강고성은 서북부 차마고도의  상업무역의 요점이였다.

사방가 원래는 말을 방목하는 곳이였다.
 고성의 길 바닥은 전부 붉은색의 역암으로 되여 있어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고 개인 날에는 먼지가 날리지 않으며

돌의 무늬로 인해 거리의 아름다움이 더 돋보인다.민간에서는 역암을 오화석(五花石)이라 한다.
 여강고성에는 물이 있으면 다리가 있다.아치형 돌다리(石拱桥), 석판형 돌다리(石板桥), 상수리 나무다리(栎木桥) 등

형태와 구조가 다양한 각종 다리가 300여개나 되는데 모두 명청시기에 건설되였다.

다리, 강물, 나무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거리와 집 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평안하고 고요한 아름다운 마을 풍경을 구성하고 있어 “동방의 베니스”라고 불리운다.

 

마을의 건물은 한족(汉族), 장족(藏族), 백족(白族)등 여러 민족의 민속을 융합한 나시족의 독특한 양식으로 형성되였다.

나시족 특색을 가진3방일조벽(三房一照壁),사합5천정(四合五井天)의 집들이 형성하였고

나시족의 구조, 한족의 벽돌과 기와, 장족의 회화, 백족의 조각등이 서로 결합되여 나시족 민가를 민가중의 박물관이라 불린다.
20년전만해도 여강은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별로 관광객들이 아주 적었다.

1997년 여강고성은 나시족 동파문자와 함께 유네스코(UNESC)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후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기 시작하였다.

1996년 2월3일 여강은 7급 지진으로 인해 고성을 제외한 많은 집 들이 무녀졌다.

고성은 주로 나무로 되였기에 큰 피해는 보지 않았다고 한다

.새 도시는 지금 복구가 되여 흔적을 찾아 볼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모습으로 전변되였다.
현재 여강고성은 운남에서 첫번째로 되는 꼽히는 관광지로 되였고 가게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800년의 역사를 가진 여강고성은 비교적 높은 종합적 가치와 뮤명한 역사문화도시로 지방 역사 문화와

민족 풍속습관을 집중적으로 구현하고 당시 사회 본질적 특징을 구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