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야원’이라 불리는 ‘사르나트’는 석가모니가 득도 후 맨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설법한 장소로
불교의 4대 성지인 탄생(룸비니), 성도(보드가야), 설법(사르나트), 입멸(쿠시나가르) 중 하나인 까닭에
순례하는 불교인들이 많이 찾는다.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사르나트 녹야원
바라나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사르나트는 유명한 불교성지로
불교신자들이 많이 찾는 중요한 순례지중에 한 곳이다.
인도 북동부 보드가야에서 대각을 성취한 붓다는 한동안 망설였다.
깨달은 바가 너무나 미묘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진흙 속에 살면서도 진흙탕의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는 연꽃이 떠올랐다.
‘그래, 연꽃과 같이 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 붓다는 법을 전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처음에는 스승으로 모셨던 선인(仙人)들을 만나려 했으나,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 때 함께 수행하다가 자신이 고행을 중단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
사르나트(녹야원)로 떠난 5명의 비구(남자 승려)가 생각났다.
붓다는 무작정 그들을 찾아 나섰다.
보드가야에서 사르나트까지는 북서쪽으로 300㎞나 되는 먼 거리.
붓다는 갠지스강을 건너고 바라나시를 지나 드디어 사르나트에 이르렀다.
붓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비구들은 울화가 치밀었다.
‘저 자가 고행을 포기하더니 여긴 왜 올까’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점점 가까이 올수록 범상치 않았다.
붓다는 깨달음 이후 얼굴에 청정함과 원만함 등 일반인과 구별되는 32개의 상호(相好)를 띠고 있었다.
붓다가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법문을 설한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사람과 동물이 인생의 벗이 되어 살아가고, 주어진 삶의 무게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100년의 도시' 가 사르나트.
바라나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사르나트는 유명한 불교 성지로 불교신자들이 많이 찾는 중요한 순례지 중의 한 곳이다.
승가(僧伽)의 토대가 성립된 곳이라고 알려진 ‘사르나트’ 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불린 것은 지금으로부터 겨우 200여 년 전에 불과하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자신을 따르던 5명의 비구들에게 설법을 한 곳으로 알려진 사르나트는
중요한 불교 聖地중의 하나로 한역 경전에는 鹿野園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석가모니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성지를 불교도들이 순례하는 것은
쿠샨시대 이후 성행한 것으로 알려졌고, 사르나트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4대 성지 가운데 한 곳이 되었다.
사르나트
다르마라지카 스투파(Dharmarajika Stupa),
뒤에 보이는 것은 디메크 스투파
첫 설법지로 유력한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유구와 다메크 스투파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은
아쇼카 시대인 기원전 3세기에 그 기초가 만들어졌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파괴와 복원이 반복되는 역사를 거쳐 현재와 같은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아쇼카왕이 석존께서 처음 설법을 하신 자리를 기념하여 세운 탑이 있던 곳이다.
벽돌을 이용하여 지름이 13.49m에 이르는 규모로 지어졌던 이 탑은
이후 6차례에 의하여 보완되는 동안 점점 더 커져 30m에 이르게 되었으나,
이 탑은 새로 짓는 자신의 건물의 벽돌을 공급하기 위한 바라나시의 통치자에 의해
1794년에 헐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허물리던 당시,탑 안에서는 둥근 돌상자와 그 안의 푸른 대리석으로 된 사리함 과 가르침을 전한다는 뜻의
손 모양 (전법인,傳法印) 을 한 불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후에 이곳을 체계적으로 탐사한 알렉산더 커닝햄의 노력에 의하여 회수되어
지금은 캘커타 박물관에 있다. 그러나 사리 함에서 나온 석존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회는
이미 갠지즈 강물에 버려진 상태였다고 한다.
중요한 석가의 행적지인지는 금박지가 붙어있는 정도를 보고 거지들의 수를 보면 알 수있다.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18세기 말 자가트 싱이 건물을 짓기 위해 벽돌과 석재들을 운반해 감으로써 크게 훼손되었다.
당시 작업하던 한 인부가 우연히 사리장치가 있는 방을 발견했다.
이때 발견된 다른 유물은 모두 사라졌지만 석제 상자는 그대로 남겨졌다가
1835년 알렉산더 커닝엄에 의해 정상에서 약 8m 아래 지점에서 다시 발굴되었다.
외함에 해당하는 녹색의 사리함에서는 인골과 부패한 진주, 금제 잎사귀 등이 나왔다.
현재 사리 외부 상자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녹색 대리석제 사리함과 다른 유물들은 현재 캘커타의 인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존 마샬의 발굴에 의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처음 건립된 이후, 6번의 개축과 증축이 이루어졌다.
이 스투파 둘레에서 그 울타리였던 것으로 보이는 12개의 슝가 시대 석주가 발굴되었다.
한편 스투파 인근에서 마투라에서 만들어 사르나트로 옮겨져
승려 발라가 봉헌한 쿠샨 시대 불상(혹은 보살상)과 굽타 시대의 초전법륜인 불상이 발굴되었다.
또 근본향당이라는 중심 사당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이곳을 석가모니의 첫 설법 위치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현장이 아쇼카의 스투파라고 기록한 것은 이 스투파를 말한 듯하다.
이곳에서 출토되어 사르나트 박물관 소장된 초전법륜상
본래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의 감실에 모셔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용하면서도 따뜻하고 속으로 베인 웃음이 온 몸에 차 있는 듯 했다.
젊은 인도인 성자의 모습인 듯했다. 가장 인도인다운 모습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무늬가 조각된 둥근 광배위에는 두개의 비천상이 있고
가사는 엷어서 입은 듯 만듯 하였다. 당신의 앞에 있는 제자들을 그윽히 바라보시며
조용 조용히 법을 설하시고 있고 법좌 아래 부분에는 법륜을 사이에 두고
다섯 비구 와 한 여성과 아이가 합장하고 있고 그 앞에 사슴 두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세계 불교미술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각 사찰마다 이런 종류의 초전법륜상 벽화는 녹야원에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자리에서 설법하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근본여래향실
중심 사당 지구는 사르나트 유적 일대에서 중심부에 있는 사당 유적으로 그 규모로 보나,
위치로 보나 사르나트에서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생각되며,
현장(玄奘)이 방문했을 당시에도 핵심적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근본향전(根本香殿, mūlagandhakuṭī)이라 불렸던 이 사당은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에서 북쪽으로 18.29m 지점에 있다.
동향한 이 건물은 각 면이 18.29m의 방형 평면인 유구이다. 현재 남아 있는 벽은 육중하고 두텁게 만들어져
원래 매우 높은 건물을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쇼카(Asoka) 석주는 파트나에서 온 궁정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페르시아 석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법현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않았지만 현장과 혜초스님의 기록에는 “높이가 70척이 넘는 돌기둥이며 표면은 윤기가 나서 거울같이 모습을 비춘다.”고 쓰여 있다.
현재 높이 2.03m, 직경 71.1㎝의 밑동만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15.25m 높이였고, 법륜(法輪)이 올려진 사자 주두가 상부에 있었다.
발견 당시 석주와 4사자 주두는 파괴되어 무너져 있었고, 기둥에 새겨진 명문 일부가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사자 주두는 중심 사당의 서쪽 벽 가까이에서 석주 파편과 함께 발굴되어 사르나트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또 석주 기단부 아래에서는 지대석 역할을 하는 포석(鋪石)과 여러 겹의 콘크리트, 칸카르석 층이 차례로 발굴되었다.
기둥은 바라나시에서 35㎞가량 떨어진 추나르에서 가져온 사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겉면에 광택을 내어 돌의 아름다움과 내구성을 살렸다.
현재 기둥 아래 부분에 규칙적이고 정교하게 새긴 세 종류의 명문이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브라흐미 문자로 된 아쇼카 법칙(法勅)으로 승가를 파괴하는 자를 경계하는 내용인데
이처럼 교단의 분열을 경계한 칙령은 코샴비(Kauśāmbī)와 산치(Sāñcī)의 석주에도 새겨져 있다.
석주 표면에 브라흐만 문자로 된 아쇼카왕의 포고문은 다음과 같다
” 돌기둥의 표면에 11줄의 글이 새겨져 있다. 그 글 가운데 현재 해독할 수 있는 것은 8줄이다.
그 내용은 “승가 화합을 깨트린 죄를 범한 비구와 비구니는 속복을 입혀 교단에서 추방하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2줄은 굽다 왕조의 한 왕이 정량부와 독자부 승단에 경의를 표하는 내용이어서 따로 추가 한 듯 하다
현재 인도 정부의 국장으로 쓰이고 있는 아쇼카 석주의
사자머리 부분은 4방향을 향해 있다.
석재 표면을 잘 마연해서 만든 4사자 주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모습으로
원래는 등에 법륜을 지고 있었다. 법륜은 불법을 상징하고,
네 마리의 사자는 ‘석가족의 사자’ 였던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4사자 상이 서 있는 바탕에는 연꽃 위에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법륜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코끼리, 사자, 암소, 말이 새겨져 있다.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표에 도안된 아쇼카석주
네 가지 성스러운 동물이 각각 법륜을 사이에 두고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자세로 묘사되었다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양감 표현과 뛰어난 세부 묘사로 유명한 이 사자 주두는
오늘날 인도의 국가 상징물(national emblem)로 쓰이고 있다.
인도 국기에는 법륜이 있다.
루피안에도 아쇼카 석주
다마라지카 스투파 터
다르마라지카 사원지의 대탑을 둘러싸고 있는 소형 스투파에서 발견되었다.
이 스투파는 축조기법상 기원전으로 그 연대가 올라가기 때문에 이 사리기는 매우 이른 시기의 유물인 셈이다
날씨가 쌀쌀하니 개들도 서로를 의지하며 잠을 잔다.
5비구가 수행하던 자리
다메크(Dhamekh) 스투파
스투파에 금박지같은 어떤 종류도 붙이지 말라는 문구
다메크(Dhamekh) 스투파는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들에게 처음 법을 설할 장소로서,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아쇼카 왕은 이곳에 다르마챠크라 스투파라 불리우기도 하는 이 스투파를 건립하게 된다.
다메크란 말은 사스크리트어가 와전된 것으로 원래는 법안, 즉 -진리를 본다-를 의미하여
이곳은 곧 -진리를 보는 탑- 또는 -진리를 관하는 곳-이라 말할 수 있다.
현재 이곳 스투파는 기단부의 직경 28.5m, 높이 33.53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것으로서,
높이 11.2m에 이르기까지는 통상적인 기단부 대신 큰 돌을 쌓았으며, 그 위에는 벽돌로 쌓여 있다.
원래 아쇼카 왕에 의해 건립된 당시 이곳 스투파는 벽돌로 조성된 작은 규모의 생각되나,
이후 A.D.320~650년에 이르는 굽타 왕조대에 이르러 현재의 모습처럼 증축되었으며,
스투파 외벽에 8개의 감실 및 장식무늬 등 역시 굽타 왕조대에 이르러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1835년 컨닝햄은 이 스투파의 중심부 수직갱도로 파내려가던 중 정상에서 91.4cm정도의 아래부분에서
-제법은 인에서 생긴다...-라 기록된 6~7세기 경의 -법신게-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다메크 스투파의 기하학 무늬와 꽃무늬 형상은 전형적인 굽타 시대 양식이다
표면에 새겨진 장식무늬는 화려함의 극치다
이 무늬는 스투파 전체를 덮게 만든 헝겊커버의 자수무늬를 옮긴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스투파를 돌고있는 서양
녹야원 울타리
밖으로 통하는 곳에는 거지들이 항상 있다.
'My travel abroad. > India(2012,J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6-5 바라나시 거리 (0) | 2012.02.10 |
---|---|
6-4 물간다쿠티 비하라(Mulagandhakuti) (0) | 2012.02.06 |
6-2 초우칸디(Chaukhandi) 스투파 (0) | 2012.02.06 |
6-1 바라나시(Varanasi) (0) | 2012.02.05 |
5-8 아그라를 떠나며 (0) | 2012.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