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박사의 돈암장(敦岩莊)과 이화장(梨花莊), 김구 선생의 경교장(京橋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
그리고 남로당의 박헌영의 혜화동의 혜화장(惠化莊)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서울에 지어진 댜규모의 저택들이다.
모두 '장'(莊)자가 들어간다. 당시에는 '장'자가 들어가는 집을 짓는 게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장급 저택들은 누가 지었는가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이 발견된다.
*돈암장은 조선왕조가 망하면서 궁궐내시가 나와 지은집으로 궁궐 건축 양식이 도입되어 있었다.
#《방 둘레에 복도가 'ㄷ'자로 돌아가면서 설치된 부분이 바로 궁궐양식이다. 》
*이화장은 원래 있었던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의 집터에다가, 1930년대에 황해도 재령 부자, 강익하가 다시 증축한 것이다.
강익하는 당시에 '미두(米豆)재벌'로 같은 황해도 출신인 이승만하고도 교분이 있었고, 김구와도 친했었다.
《강익하의 부인이 '전쟁고아의 어머니'로 알려진 황온순으로 제주도에다 한국보육원을 세워 6·25 전쟁고아 900명을 데리고 살았다.
/그녀는 원불교 소태산(少太山)의 직접 훈도를 받은 제자이다.
*경교장은 평북 구성군 출신인 최창학이 1938년에 지은 집이다.
최창학은 금광을 캐서 천만장자라는 소문이 날 만큼 떼돈을 벌었다. 경교장은 그 돈으로 지은 집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혜화장은 전북 함라(咸羅)
의 만석군 아들, 김해균(金海均:1910~?)의 경택(京宅:지방 부자가 서울에 마련해 놓았던 집)이었다.
당시 《서울의 명륜동과 혜화동은 호남 대지주들의 저택들이 많았던 지역이다. 》
함라에는 김해균의 99칸 고택이 보존되어 있다. 김해균은 당시 도쿄대(東京大)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김해균의 99칸 고택은 현재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23호로 지정된 김안균가옥(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으로,
조선 후기 양반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집으로 당시 주택구조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박헌영의 고교후배로서 박헌영의 재정적 후원자이자 정치적 동지로
그는 월북해서 숙청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소수의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함라마을의 돌담길은 주택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담장이 높은 점이 특징이다.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인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밖에도 토담, 돌담, 전돌을 사용한 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이 섞여 있고,
담장 일부는 거푸집을 담장의 양편에 대고 황토 흙과 짚을 혼합하여 축조되었다.
마을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세대를 이어가며 만들고
덧붙인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다.
조해영 가옥
조해영가옥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고가이며
1986년 9월 8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안채 1동과 별채 1동 그리고 변형된 문간채만 보존되어 있다.
안채는 상량문에 ‘대정(大正)7년’이라 명기되어 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으로 보여진다.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 또는 그보다 조금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김안균 가옥
7천649㎡ 터에 지어진 김안균 가옥(전북도 민속자료 제23호)은 전북 최대 규모로
1920∼30년대 전통적 상류 가옥의 변모상을 잘 보여준다.
이 집은 조선 말기의 양반가옥 형식을 기본으로 지어졌으며 구조 및 의장 등은
일본식으로 돼 당시의 주택 모양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집의 건축 년대는 오래되지 않으나 규모를 보면 전북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가옥이다.
규모뿐만 아니라 사용된 하나 하나의 부재나 그것을 깎고 다듬는 데 드린 공력면에서도 온갖 사치(奢侈)를 다한 가옥으로
이만큼 재력이 투입된 가옥도 전국에서 그 예를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또 이 가옥이 1920년대에 지어진 만큼 우리나라의 전통적(傳統的)인 상류가옥이
이 무렵에 어떻게 변천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면에서도 강릉의 선교장(船橋狀)과 더불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함라면은 또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유배온 뒤 여러 작품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허균은 자진해서 함라면을 유배지로 택했는데 그 이유는
너른 들과 인근 바다에서 나는 먹을거리가 풍성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배원 가옥
이배원가옥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에 있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2002년 12월 14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이배원이 1917년에 지은 것으로 그는 함라면의 대표적인 부농 중 하나였다.
건립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주위의 토석 담장만이 남아 있다.
사랑채는 내부가 개조되어 원불교 교당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안채는 입식부엌으로 개조하여 활용하는 안방 뒤쪽 공간을 제외하고 비교적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안채는 ‘ㄱ’자형 목조 와가로 장대석 두벌대 기단 위에 주좌를 높게 치석한 방형 초석을 놓고 기둥은 방주를 사용했다.
기둥은 모서리를 둥글게 쇠시리 하여 모접기 하였다.
평면은 좌측부터 건넌방, 대청, 웃방으로 이어지며 웃방에서 전면으로 두 칸의 안방과 부엌이 돌출 된 ‘ㄱ’자집이다.
이 집은 평면상으로 전후 퇴집 구조이나 가구 구조는 1고주오량가(一高柱五梁家)로
배면 평주에서 고주 중간에 대들보를 끼우고 고주 머리가 직접 종보와 중도리를 받치게 했다.
함열향교
“향교(鄕校)” 말 그대로 시골의 학교라는 뜻으로 옛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중등 교육기관으로서 지방관의 책임 하에 설치 운영되었던 공립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향교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과거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한 고려시대를 그 기점으로 보고 있다.
고려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신진사대부들이 고려의 권력을 잡으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가 지도 이념으로 채택된 유교와 성리학을 백성들에게 보급시키기 위해 ‘1읍 1교’의 원칙에 따라 전국 모든 군현에 향교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렇게 건립된 향교에는 교관이라는 중앙 관료가 파견되었고 교육의 기능뿐만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 미풍약속을 고취시키는 등 사회교화의 기능도 실시하였다.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향교. 1437년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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