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omestic travel/동해안

1-3 바우길에서 경포대(鏡浦臺)

봉들레르 2017. 2. 23. 22:42










강릉 솟대다리

경포해변과 강문해변을 연결하는 길이 89.15m, 폭 4.1m의 인도교인 아치형태의 강문솟대다리



































경포대는 강릉시 저도 경포호의 북쪽 언덕에 있다.

정면 6칸 측면 5칸에 기둥이 32개나 되는 팔작지붕 겹처마기와 구조다. 1

326년(고려 충숙왕 13) 강원도 안렴사인 박숙이 신라의 사선(四仙)이 놀았다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터에 세웠다가

1508년(중종3) 강릉부사 한급이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현재의 건물은 1745년( 영조21) 부사 조하망이 새로 지은 것이다.



경포대의 현판은 해서체로 쓴 것과 전서체로 쓴 것, 두 개가 있다.

해서체는 헌종때 한성판윤을 지낸 이익회(1767~1843)가 썼다.

이익회는 홍문관에 등용된 뒤 대사간 대사성, 홍문관제학에 올라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글씨에 능해 ‘삼우당문익점신도비’를 써기도 했다. 전서체는 유한지(1760~미상)가 썼다.

유한지는 서예가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영천의 ‘은해사영파대사비’ 와 산청의 ‘문익점신도비’ 등의 전액을 썼다.

‘월하독작(月下獨酌)’

                  이태백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밝은 달맞이하니

그림자 비쳐 셋이 되었네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그저 흉내만 낼 뿐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봄날을 마음껏 즐겨보노라

 노래를 부르면 달은 서성이고

춤을 추면 그림자 어지럽구나’


경포호 자리는 본래 어느 부자가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하루는 중이 부잣집을 찾아 쌀 시주를 부탁하자 그 부자는 똥을 퍼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부자가 살던 집이 내려앉아 호수가 됐다. 쌓였던 곡식은 모두 조개가 됐다.

흉년이 드는 해에는 조개가 많이 나고 풍년이 드는 해에는 쌀이 적게 났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쌓아둔 곡식이 조개가 됐다고 적곡조개라 했다.

봄 여름이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운 조개를 이고 지고 갔다.

호수 밑바닥에는 아직 기와 부스러기와 그릇들이 남아 있어 헤엄치는 사람들이 가끔 줍는다고 한다.



정자 안에 있는 ‘제일강산(第一江山)’ 현판은 주지번의 글씨라고도 하고 양사언의 글씨라고도 한다.

‘강산’은 떨어져 나가 후세 사람이 쓴 글씨이다. 주지번은 명나라 산동 사람인데 서화가 뛰어났다.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을 쓴 사람이다.

조선에도 많이 알려진 명필인지라 조선 사람들이 글을 구하기 위해

초피나 인삼을 들고 중국에 있는 그를 찾아갔을 정도로 유명했다.

강릉경포대-沈英慶(심영경)

十二欄干碧玉臺(십이난간벽옥대) : 열두 난간 벽옥 같은 누대에 올라보니
大瀛春色鏡前開(대영춘색경전개) : 동해 큰 바다의 봄빛, 경포대 앞에 펼쳐있네
綠波淡淡無深處(녹파담담무심처) : 봄 물결 잠잠하고 깊지도 않아
白鳥雙雙自去來(백조쌍쌍자거래) : 흰 물새 쌍쌍이 한가히 날고
萬里歸仙雲外笛(만리귀선운외적) : 먼 곳으로 돌아가는 신선의 구름 밖 피리소리
四時遊子月中杯(사시유자월중배) : 철마다 유람하는 나그네의 달빛 속 한잔 술
東飛黃鶴知吾意(동비황학지오의) : 동녘으로 날아드는 황학도 내 마음 알아
湖上徘徊故不催(호상배회고불최) : 호수 위를 배회하되 재촉하지 않는구나

율곡 이이가 10살 때 경포대 인근 오죽헌에 살면서 쓴 ‘경포대부’가 좌측에 걸려있다.

‘여기에 한 누각이 호수에 임하여

 마치 발돋움 자세로 날 듯하다

비단 창문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누대의 단청엔 아침 햇빛 비춰주네

 아래로는 땅이 아득하다

(중략)

하늘은 유유하여 더욱 멀고 달은 교교하여 빛을 더하더라 ’




하늘에 뜬 달이 하나요,

바다에 뜬 달이 두 번째,

세 번째는 호수에 뜬 달이다.

마지막 달은 술잔 위에 뜬 달이다.

하나를 더 한다면 당신의 눈동자에 들어 있는 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