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omestic travel/서해안

2-4 염전

봉들레르 2014. 6. 19. 22:16

 

 

산에서 내려와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어서 간다.

 

돌담이 높다

 

올라갔던 산

 

 

 

염전

 

 

 

보리

 

낮으막하게 파란지붕은 비가 오면 덜 된 소금을 피신시키는 곳이다.

 

 

 

비금도는 천일염의 메카다.

남한 최초의 염전 ‘구림 1호’(1947년)와 1948년 섬 주민 450가구가 공동 조성한 ‘대동염전’(150ha·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이어 1951년 조성된 대성염전(100ha)이 모두 여기에 있다. 1958년엔 천일염이 전매사업에서 풀렸다.

덕분에 비금도 소금밭은 ‘금을 불러들이는 소금(召金)밭’이 됐다.

최고전성기는 1962년. 화폐개혁 직후 환금성 높은 소금에 돈이 몰리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

 

 

 

 

 

천일염은 염전에서 해수를 자연 증발시켜 얻은 염화나트륨이 주성분인 결정체를 말한다

 

 

 

소금꽃은 염전에서 물기가 증발하고 생성된 소금 결정체를 꽃으로 유적으로 하는 말이다

 

 

 

 

 

 

 

 

 

 

 

차를 세운 곳으로 오니 동네분들이 쓰레기를 줍다가 새참을 먹고있다.

나도 목이 마르던 차에 막걸리 한 대접을 받아 먹었더니 꿀맛이다.

 

 

소금 결정체가 뭉쳐 형성된 소금 바위가 있는 가까운 중국도 몇 가지 방법을 이용해 소금을 채취했다는데,

바다에만 의지해 소금을 생산한 우리나라는 바닷물을 끓여서 채취하는 '전오염제조법'을 이용했단다.

하지만 생산비가 많이 드는 방식인지라 소금은 자연 비쌀 수밖에 없어 오늘날처럼 값이 싼 중국 소금을 주로 수입해 먹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07년에 천일염이 도입된다. 무기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되는지라 소금 역시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서해안의 질 좋은 천일염과 여주산 기름진 쌀을 효율적으로 빼앗기 위해 '수인선'과 '수여선'을 건설한다.

수인선협궤열차가 지난날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국내의 염전들이 8·15 이전까진 주로 대동강 하구 광량만을 중심으로 개발된지라 8·15 직후부터 6·25 직전까지 남한은 소금 부족에 허덕인다.

그 부족량이 무려 10만여 톤. 설상가상 6·25 전쟁으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던 연백 염전이 북한으로 넘어가고

국내 다른 염전들이 전쟁으로 파괴되면서 남한의 소금 부족은 더 극심해진다.

소금 부족을 해결하고자 정부는 관영 염전을 개발하는 동시에 민영 염전을 적극 장려한다.

그리하여 1955년에는 완전 자급자족이 가능해진다. 이런 와중인 1948년에 조성된 곳이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된 비금도 대동염전이요.

전쟁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의 살길을 열어주고자 작은 섬 2개를 연결해 1953년에 조성한 것이 태평 염전이다.

 

대동 염전은 비금도 주민 450여세대가 나물로 끼니를 이어가며 100헥타르가 넘는 갯벌을 개척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대동 염전은 지금은 폐염전이 된 경기도 서해안의 주안 염전, 남동 염전, 소래 염전, 군자 염전을 제외하고는 조성 당시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듯 큰 규모, 그래서 엄청나게 많이 소출하는 것에만 대동 염전의 가치가 있지 않다.

"비금도 비금 중앙 초등학교에 '천일염전기술자양성소'라는 염부 양성기관이 설치되어 비금도 관내 젊은 예비 간쟁이들을 많이 배출하였다고 한다.

빵을 만드는 사람도 아니고 대장장이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소금 일궈내는 간쟁이를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비금도 섬의 '천일염 기술자 양성소'는

하늘과 바다가 뒤에서 밀어주고 연륜 있는 간쟁이 선배들이 문자향이 아닌 몸에 밴 경험과 투박한 직정으로 젊은 예비 간쟁이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분들이 한창 나이였을 때 비금도 안의 염전학교 출신 기술자들을 주축으로 '수림 염전 개발 기술 조합'이 결성되었고,

이 조직을 통해 염전 기술자들의 활동이 하나의 계보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우

리나라 염전 발전사의 행간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요목이 아닐 수 없다." - 비금도 대동 염전 편에서

<염전, 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에서 만나는 대동염전의 지난 역사 중 하나다.

이후, 비금도 대동 염전의 기술자들은 인근 지역은 물론 군산, 부안, 무안 등지에 진출하여 숱한 염전을 개발한다.

 따라서 대동 염전은 그저 물을 가두어 소금을 얻는 생산적인 의미만의 염전이 아니다.

소금 부족이 극심했던 시기에 조성되어 부족한 음식의 맛을 채우고, 염전 기술자를 본격적으로 배출하여

국내 염전의 발전을 이끈 우리 염전과 소금의 산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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