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India(2012,Jan)

8-10 세계 최초의 대학 나란다 대학

봉들레르 2012. 3. 12. 20:06

나란다 역에서 나란다 유적지까지는 통가(마차)를 타고 한 10분쯤 가면 된다.

라즈기르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이다

나란다 대학 입구의 무우수(無憂樹)나무

마야부인이 신비스로운 향기가 나는 무우수 나무 그늘밑에서 부처님을 낳으셨으며 근심 걱정이 없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유적지에는 좌우 두개의 입구가  있는데  좌측은 나란다 유적으로 가는 길이며,  우측은 박물관으로 가는 길이다. 

 

 

나란다 대학

리즈기르(Rijgir;왕사성) 바로 옆 도시 나란다(Nalanda)는 세계 최초의 불교 대학이 있었던 곳.

나란다 대학(현재 북인도 비하르주(州)에 있음)굽타왕조의 왕 쿠마라굽타 1세(415~454)가

오늘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날란다사(寺)를 창건한 이후 역대 왕조에 의해 증축, 확대되었다.

5세기경에 세운 세계 첫번째 대학으로서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불교대학이다.

이 지역은 1세기 부터 불교 성지 순례지였다.

이 지역은 부처님이 재세시에도 자주 오곤 했는데, 부처님의 수제자인 사리불(舍利弗, Sariputra)

목련(目蓮, 마하목건련Moggallana;Maudgalyayana)은 같은 친구로서 여기서 만나서 불제자가 된 곳이다.

인증샷은 어느나라 사람들이 같다.

 

 

 

란다 대학의 전경

서기 427년에서 1197년까지 팔라 제국 아래에서 불교의 학습 중심이었다. 세계사상 최초의 대학 중 하나였다.

 나란다대학의 역사는 대승불교 학문의 발달사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대승불교 교학의 양대 산맥이라 말할 수 있는 중관학(中觀學)과 유식학(唯識學)은 모두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고,

또한 이곳에 머물렀던 불교 교학 최고의 학자들 사이에서 그 이론이 정리, 보완되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문들의 수행과 생활 공간 내부의 내부로 불단과 우물이 보인다

중국의 현장(玄裝, 602-664년)이 16년간 서역 138개국을 기행하며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의하면 640년경 날란다 대학에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1만여명의 학승(學僧) 1천500여명의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나로파(Naropa1016-1100 티베트의 현자로서 티베트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의

독방 및 메디테이션 홀.

 독방은 2평에서 10여평에 이르는 여러 형태의 방들이 쭉욱 있다.

그곳은 마치 토굴같은  들어가 있으면 시원하다

 

 

대학의 복도

 

 

 

 

 음식을 데워먹던 화덕(불을 지펴서 음식을 만들던 자리)

 

근본향전 사리불 탑

대형 사리탑(stupa)은 사리불의 사리탑으로 알려졌 있다. 사리불이 태어나고 입멸한 곳으로 추정한다.

불교교육의 중심지였으나 8세기 이후 인도에서 불교가 점점 쇠퇴하자 나란다 대학도 점점 쇠퇴해지기 시작한다.

12세기에 무슬림(Muslim;회교도) 침입에 생존자 한명없이 전몰되었고, 나란다의 거대한 사원과 승원은

무려 6개월동안 불에 타서 9만권이상의 장서도 재가 되어 아직도 유적지 곳곳에 불에 탄 시커먼 흔적들이 남아 있다

 

 

 사리불 탑 계단

좌측에 사리불 탑  부조물

 

 

 

 

대승불교의 학문발달사와 그 발걸음을 같이해 왔던 이곳 나란다의 실질적인 역사는,

 A.D. 150년경 나가르쥬나(Nagarjuna, 龍樹)와 더불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학자 따라나타(Taranatha)의 기록에 의하면 “7살의 어린 나이에 이곳 나란다를 찾아

그의 스승으로부터 학문적 체계를 전수받은 나가르쥬나는 이후 이곳의 고승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 기록을 근거로 생각한다면 이곳 나란다는 당시 상좌부(上座部)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맞선

반야사상(般若思想)을 확산시켰던 대승불교 운동의 중심지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란다 대학에 일정이 끝났다.

 나란다 대학을 보고나니 저녁7시다.

『왕오천축국전』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
여기서 우리는 혜초의 행적에 대한 의문점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왜 혜초의 기록에 나란다 관련기사가 빠져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현존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지만 일정상 나란다에 관한 기사가 마땅히 들어 있어야 할 차례에 나란다의 기사가 없을 뿐더러 또한 그 부분에 결손 누락된 것으로 보이는 공백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어쩌면 혜초가 고의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혜초가 인도에 간 이유가 어디에 있었나 하는 것에서부터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혜초의 스승인 금강지(金剛智)와 불공(不空)은 나란다 출신들로서 중국 밀교의 초조로 꼽히는 유명한 밀교승이다. 혜초는 그들의 권유와 추천에 의해 인도에 왔다. 그렇다면 그의 목적은 ‘나란다 대학의 유학’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혜초는 나란다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혜초 이후에 나란다에 온 여러 명의 신라승의 사례를 들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국내의 몇몇 학자들의 견해처럼 혜초의 인도행 목적이 나란다에서의 유학이 아니고 단순한 불적지의 순례였었다면, 이는 더구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의 스승의 권유가 아니더라도 혜초의 천축순례의 모델로 삼았던 인물들인 현장과 의정 그리고 신라승들이 모두 수년간이나 머물렀던 곳이고 혜초가 ‘가이드 북’으로 이용했던 모든 기록에서도 나란다는 무거운 비중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왕사성에서 지척인 거리에 있는 나란다를 구경 삼아라도 방문했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모든 정황으로 혜초가 나란다에 온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는데 혜초는 나란다를 기록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현장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나란다의 승려는 수천 명인데 그 중에서도 재능과 학식이 높아 당대에 존경을 받아 명성이 외국에까지 뻗치고 있는 사람만도 수백 명이다. 승려에게는 엄한 규율이 있고 이를 굳게 지키고 있기 때문에 온 세상이 모범으로 삼고 있다. (중략) 외국의 학자로서 이름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 곳에 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학식이 고금에 통달해 있는 자만이 비로소 입학할 수가 있기에 유학하러 온 학문이 깊은 사람이라도 10명 중 7∼8명은 물러가게 마련이다. 그만큼 박식한 대중들의 질문공세는 거세고 어렵다. ”
시험이 이렇게 어려웠다면, ‘혜초’가 혹시나 낙방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품을 수 있다. 혜초가 인도에 오기 전 광주와 슈마트라에서 범어(梵語)와 현지 생활언어를 어느 정도 배웠다고는 하나 나란다의 문턱이 너무나 높았다면 위의 가정은 가능하다. 만약 정말로 그랬었다면 그는 심한 실의와 자존심의 상처를 받았을 것이기에 혜초로서는 ‘나란다’라는 말 자체를 생각하기도 싫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나란다에서 혜초의 체취는 맡을 수 없지만 대신 혜초보다 반세기 먼저 천축행을 감행하여 나란다에 왔었던 신라사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행운은 가질 수 있었다. 혜륜(慧輪)·혜업(慧業)·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등이 바로 그들이다. 『대당구법고승전』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의 행적은 이렇게 그려진다.
“혜륜의 범어 이름은 반야발마이고 신라사람이다. 출가한 다음 여래의 성적을 그리워하여 배를 타고 광동지방에 이르렀고 그 뒤 장안에 가서 머물렀다. 대흥선사에서 범문을 배운 후 정관(貞觀) 연간(627~649) 에 칙서를 받고 떠나는 현조(玄照)를 따라 서행하였다. (중략) 그 다음에 나란다사에 3년간 머물며 승광 법사를 모시고 ‘중론(中論)’등을 익혔고 보사자 대덕에게서 ‘유가십칠지(瑜伽十七地)’를 전수 받았다.”
또한 혜업에 대하여는 “나란다에서 경전을 연구하다가 60여 세로 입적하였다. (중략) ‘불치목 아래에서 신라승 혜업이 적다[在佛齒木樹下新羅僧慧業記]’라는 글을 발견하였다. 이외에 그는 또 범어로 된 유고를 이 절에 남겼다.” 다시 나란다의 폐허 위에 섰다. 아! 신라사문 혜업이 저술에 몰두했다던 ‘불치목’은 어디쯤 있을까?
붉은 벽돌들이 천지사방으로 널려 있는 드넓은 벌판에는 한낮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는데, 철저하게 파괴된 유적지들을 돌아보고 있으려니 문득 ‘인샬라’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말 알라의 뜻은 그런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에 머리가 무거워져 온다.
한때 인류를 구할 신념이 넘쳐흐르던 숭고한 ‘샨티’, 즉 평화의 땅에 거센 피바람이 몰아치고, 이 폐허 위로 다시 천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온 세상은 종교라는 이름의 ‘집단광기(集團狂氣)’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있다. 언제쯤이나 우리 인류는 진정한 이성을 찾을 수 있을까?
ⓒ 월간불광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인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당대 최고의 여행가 신라 승려 혜초의 모습을 복식 고증을 거쳐 디지털  추정복원한 인물도.

대학 앞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파트나 가는 길은 가로등도 없고

차들이 뒤엉켜서 꼼짝을 안한다.

 

비하르주 수도인 파트나 차나키야 호텔에 밤 9시가 넘어서 도착

나란다에서 파트나로

파트나 차나키야 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