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India(2012,Jan)

9-1 바이샬리(Vaishali) 스투파

봉들레르 2012. 3. 17. 10:39

 

파트나 호텔에서 아침 5시반에 출발이다.

 

옛날에는 파탈리푸트라까지가 마가다국 영토이고, 강을 건너 북쪽은 경전에 자주 나오는 밧지족의 영토였다.

파트나에서 세계에서 가장 긴 10km가 넘는 마하트마 간디 브릿지를 건너가면

인도 최대의 바나나 집산지인 하지푸르를 지나 8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바이샬리가 나온다

길카리우나 포카연못

파트나를 흐르는 강가강은 부쪽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칸타키강, 골고라강, 야무나강이 합쳐진

 강가강과 데칸고원에서 흘러오는 손강 등 네 개의 강이 모여 하나가 되어 흐르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개의 강에 비유하여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세상에는 브라흐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계급 차별리 있지만 내 법 안에는 없다.

네 개의 강이 결국 하나가 되어 흐르듯 내 법 안에서도 하나가 된다."

바이샬리는 북인도 일대의 교통,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그 당시 가장 화려하고 부유했던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언론과 새로운 사상을 마음껏 누리던 인도 최초의 공화국이었다.

그래서 열반경에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으로 밧지족의 나라가 망하지 않는 법 7가지를 설하시는 모습이 있다.

역사적으로 공화국제도의 기원이 이 곳이라 해서 지금도 인동 중앙정부에서 국회가 개원할 때면 관리들이

이 곳 카리우나 포카(Kharauna Pokhar) 연못에서 물을 떠 가지고 가서 성수로 사용하며 의식을 집행하고 있다

논밭으로 일구어진 들판이 펼쳐져 있고, 검고 왜소한 체구의 비하리들이 이 넓은 들판의 군데군데에 작은 부락을 이루며 살고 있는

오늘날의 바이샬리 모습은 형편없이 가난하고 옹색한 시골에 다름이 아니다.

가는 도중에 잠시 제법 큰 레스토랑에 들려 휴식

잘 꾸며 놓았다

나무로 만든 의자가 신기하다.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소년이 이제야 잠에서 깬다.

안개가 끼여서 온몸에 음산한 기운이 감돌아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인다.

 

 

 

 

바이샬리를 각별하게 생각하셨던 석존은 평생에 걸쳐 여러번 바이샬리를 방문하셨을뿐 아니라,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신 후의 다섯번째와 마지막 하안거(夏安居)도 이곳에서 보내셨다.

이에 덧붙여 바이샬리는 석존이 세상을 떠난 후 백년 쯤이 지나서 행해진 불교 교단의 두번째 집회(2차 결집)의 장소가 됨으로서,

 바이샬리는 불교사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이곳은 또한 자인 Jain교의 창시자이며 마지막 터탕카르 Tirthankar인 바르다마나 마하비라 Vardhamana Mahavira가

BC 561년경에 태어나 유년기의 12년을 보냈던 곳으로, 바이샬리는 자인교에 있어서도 중요한 성지이다

축구장 세 개 정도 크기의 카라우나 포카아르(Kharauna Pokhar) 연못이 있는데, 맑은 물로 가득 차 있다.

이 곳으로 갠지스 강물이 지하 수맥을 타고 스며 들어 온다고 한다. 카라우나 포카아르는 바지안 족의 지도자들이 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때

의식을 치르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저런 낚시에 잡히는 고기도 있을까?

불자를 위한 암자앞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들 

 

 

 

영어공부  

 

수학

분수와 나눗셈

 

성지순례를 온 티벳인들이 식사를 준비한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일이다. 마하가섭의 찬탄이 끝나자 향나무 더미에서는 저절로 불이 붙게 되어 부처님의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부처님의 열반과 다비 소식을 들은 주변의 일곱 왕들이 사리를 얻어 대탑을 세우고자 쿠시나가르로 몰려들게 되고,‘

드로나’라는 브라흐만의 중재로 말라족을 비롯한 8개국의 왕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왕, 바이샬리의 릿차비족, 카필라바스투의 샤카족, 알라캅파의 부디족, 라마그라마의 콜라족,

 베타투비파의 바라문, 파아의 말라족, 쿠시나가라의 말라족 등이 분배받았는데,

 8개국의 왕들은 자기 나라에 부처님의 사리탑을 세우게 된다.

이곳은 8등분된 부처님의 진신사리 중에서 1등분을 분배받은 바이샬리의 릿차비족이 스투파를 세운 곳으로

근본 8탑중 하나이며, 200년 후쯤에 아쇼카왕이 이곳에서 사리를 출토하여 그중의 일부는 이곳에 다시 봉안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세운 여러 곳의 부처님 성지의 세운 탑에 나누어 모셨다(

부처님 사리탑터 전경

부처님 사리탑터 기단 흔적

 

 

 

현재는 비바람을 위하여 유적의 위로는 돔형태의 지붕을 설치하였고, 탑신은 소멸되었고

지붕아래에는 둥그런 탑의 기단을 이루는 붉은 벽돌로써 그 존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늦게 소식을 듣고 사리를 분배받지 못한 모랴족은 타다 남은 재를 모아 회탑(灰塔)을 세우고,

드로나 브라흐만이 사리를 분배했던 병을 가져가 병탑(甁塔)을, 부처님 수염과 머리털을 안치해 세운

나란다의 탑까지 모두 11개의 사리탑이 인도 전역에 세워지게 되었다.

부처님이 카필라바스투에서 출가하여 수행자가 사는 문명의 도시인 바이샬리에 처음 오셔서 고행주의자인 발가바 선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고행주의는 도의 길이 아님을 알고 다른 스승을 찾아 강가강을 건너 마가다국의 왕사성에 이르게 된다.

그 곳에서 아라라까라마와 웃타카라마푸트라를 만나게 되지만 그들의 최고 경지인 무소유처나

비상비비상처 역시 진정한 해탈의 길이 아님을 알고 가야로 떠난다.

성도 후 부처님께서 다시 이 곳을 방문한 것은 깨달음을 얻으시고 2년째 되는 해로,

바이샬리는 극심한 가뭄으로 사람들이 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 때였다.

전설에 성자(聖子)를 마을에 초청하면 자연재해를 퇴치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마침 왕사성에 성자가 출현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 곳 사람들이 부처님을 청했다.

그런데 정말 부처님께서 강가강을 건너 이쪽 언덕에 발을 딛자마자 비가 쏟아져 바이샬리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고,

그래서 온 국민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게 되었다.

많은 나라들 중에서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신심이 가장 돈독했고 부처님을 한 번도 음해한 적이 없었던 도시,

 그리고 부처님이 가장 사랑했던 도시가 바로 바이샬리이다.

 

 

밖에서 수업시간을 기다리는 학생들

성지순례 온 티벳인들 한테 자이를 얻어 마셨다.

 

 

 

 

 

 

 

스투파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 곳은 원래 인물이 출중한 왕족 출신들인 리챠비족이 살던 곳인데, 지금은 반 이상 천민들이 살고 있다.

아마 왕족계급이 전쟁에 져서 천민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나라가 망하니 천민들만 남아서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부처님께서 천상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려면 리챠비족을 보라고 할 정도로 옷도 원색으로 아주 화려하고

매우 부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이샬 리가 마가다국에 의해 망한 후 다시 어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거나

한 번도 재건된 적이 없어서, 지금은 교통도 외지고 아주 낙후한 농촌으로 변해버렸다.

농토는 아주 비옥하지만 여름에는 거의 절반이 강물에 잠겨 있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며,

 물이 빠지면 진흙으로 변해버려 신발을 신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이다.

가옥도 흙벽돌도 아닌 억새 같은 짚으로 엮어 담을 치고 사는 아주 가난한 마을이다

 

 

 

간단한 조리기구로 음식을 만든다.

살림살이가 간단하다.

 

 

소똥

 

 

아예 바닥에 앉아서 공부하는 어린이들

 

 

 

열반을 선언하신 곳, 차팔라 영지

 

우기가 끝나자 부처님은 주의에 흩어져 있던 제자들을 불러모아 이 곳 차팔라 영지에서 계정혜 삼학을 설하시고,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어느 날 바이샬리에 들어가 탁발하고 마을을 나오시면서, 마치 코끼리가 뒤를 돌아 보듯 천천히 몸을 돌려 지그시 바이샬리를 내려다보시며

‘여래가 이 아름다운 도시,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니라.’라고 하셨다고 한다.

물론 바이샬리 사람들도 부처님을 존경하였지만, 부처님도 바이샬리를 매우 사랑하셨다.

이 곳에 야트막한 두 개의 언덕이 있는데 아마 그 곳에서 바이샬리를 내려다보시자 않았나 추정된다.

현재 이 곳 지명은 비마세나 카팔라라고한다. 부처님이 80노구에 병든 몸을 이끌고 이 마을을 떠나 열반의 길을 걸어가실 때,

리챠비족들은 다시는 못 뵐 거라는 생각 때문에 부처님을 계속 따라왔다고 한다.

부처님이 칸타키강을 건너가신 뒤에도 사람들은 계속 강변에 서서 이별을 안타까워 하여,

부처님은 발우를 물에 띄워 그들에게 보냈다. 박물관에 가면 그림이나 조각에 강이 흐르고

발우가 물에 떠내려가는 그런 모습은 부처님이 바이샬리 사람들과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여성 최초의 출가지


부처님이 성도 후 6년만에 쉬라바스티에서 고향인 카필라성을 방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출가를 했다.

그 이후 아버지인 정반왕이 돌아가시자 어머니인 마하파제파티가 부처님께 출가를 청하였고,

이미 남편이 출가를 해 혼자 남은 여자 혹은 과부들과 부처님의 부인이었던 아쇼다라를 포함하여 500명의 여인들도

부처님께 출가하기를 청하였다. 한 번도 출가를 거절하신 적이 없었던 부처님이셨지만 그러나 거절하셨다.

여인들이 재차 출가를 청하였으나 다시 거절하시고는 바이샬리로 떠나버리셨다.

그러자 500명의 여인들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맨발로 카필라성에 바이샬리까지 걸어왔다.

이 곳에 도착했을 때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 아난존자가 가슴이 아파 부처님께 ‘여자는 출가해서 성불할 수 없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여자들도 수행하면 똑같이 성불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용기를 얻어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500명의 여인들이 이 곳까지 와서 부처님께 출가를 청하고 있다고 말씀드리자

마침내 부처님께서 여인의 출가를 허락하셨다.  이 곳은 세계 최초로 여성 수행자가 공인된 곳으로 여성해방의 근원지라 할 수 있다.

카톨릭에는 아직도 여자를 신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물며 당시 인도 풍속으로 본다면 여자는 남자에 예속되어

어려서는 아버지의 딸로, 젊어서는 남편의 아내로, 늙어서는 아들의 어머니로 소위 삼종지도로 존재할 뿐이지

인간으로서의 권한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수행자로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비구니교단을 허락하셨다.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다는 것은 부모, 자식, 남편과의 관계 즉 남자에 의지하는 않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존엄한 가치를 인정받는 완전한 여성해방이라 하겠다.

 부처님께서는 두 번 거절한 것은 그러한 사회적 조건에서 출가를 허락한다면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파장을 예견하셨을 것이고,

그러나 이 곳 바이샬리에서 허락하신 것은 이 도시의 진보된 사상과 개방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사회적 물의가 적고 또 그것을 수용해 낼 만한 역량이 있다고 보셨을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머리를 깎고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아들에게 예속되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고

자립할 의지를 보였다는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그 이후에도 많은 여성들이 출가하였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된 분들도 많았다.

그러나 불멸 후 몇백 년이 지나면서 인도의 전통사상에 의해 여자는 전륜성왕과 제석천왕과 범천왕과 마왕과 부처가 될 수 없다는

5불가론(五不可論)이 제기되면서 여성교단이 폐지되고 만다.

소승불교인 미얀마나스리랑카에서는 여전히 비구니교단은 인정되지 않고 있어, 비록 승려와 똑같이 생활하지만

가사 대신 하얀 옷을 입고 수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곳 바이샬리는 세계 여성운동의 성지로 가꾸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는 곳이다.

 


제2결집과 교단의 분열


 이 곳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 제 2결집이 일어난 곳이다. 제 1결집을 하고 100년 정도 지나면서

계율의 현실성 문제 때문에 진보적인 승려들은 10가지 계율에 대해 새로운 제의를 했다.

계율에는 무엇이든 일체 소유를 못하게 되어 있으나 소금의 경우는 얻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상하지 않아,

먹고 남은 소금을 보관해 두었다가 먹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리고 특히 이 곳은 상업도시라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길을 가다가 스님을 뵈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돈으로 공양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사용자에 따라서 공양을 받는 것과 똑같은 개념이 될 수도 있고, 재물을 축적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굉장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수행자들 사이에 10가지 계율에 대한 소소한 이견이 생겼는데 이것을 십사(十事)라고 한다.

그래서 700명의 장로가 바이샬리로 집결해서 몇 달간 토론을 한 후, 십사를 비법으로 선언하고 1차 결집의 내용을 검토하여

부처님 말씀을 첨삭하며 결집을 마쳤다. 그러한 장로들의 결정에 반발하여 만 명의 승려들이 모여 일만송(一萬頌)이라고 하여

자기들끼리 별도로 결집을 하였다. 이때부터 이들을 대중부라고 부르고 제 2결집에 참여했던 장로들과 승려들은 상좌부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교단이 둘로 분열되는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교단 자체가 완전히 두 개로 독립한 것은 아니며

계율에 대하여 견해가 다른 두 개의 파가 교단 내부에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마거사의 고향


이 곳은 교단이 분열되면서 대승불교가 처음 흥기한 곳이며 유마거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유마거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마거사가 실존 인물인지,

전설상의 인물인지를 떠나서 유마경의 소재가 바이샬리이고, 재가자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불교운동인 대승불교가 시작된 곳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승불교는 일체의 형식을 떠나 깨달음의 길을 추구하는 보살사상이 핵심이다. 유마거사의 집터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