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Austria(2009.Jul.)

10-1 빈(Wien)에서-벨베데레 궁전

봉들레르 2009. 8. 15. 17:14

 

빈에서의 첫 일정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미술품 수집 장소인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으로 간다.

가운데 녹색 바탕에 흰 글씨로 U자가 써있는 것이 지하철역(U-Bahn) 표시이다. 

  전철역 내부의 자동발매기에서 교통권을 사기 위해 들어간 동안 밖에서 대기하는 가족들

 빈 시내의 지하철, 버스, 트램을 24시간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권. 5.7유로이니 24시간 이내에 4번 이상 차를 타는 날은 이 티켓을 구입하는 것이 1.8유로의 싱글티켓을 번번이 끊는 것보다 유리하다.

 

  트램O, 트램D를 갈아타며 갈 예정이다.

 지하철과는 달리 타고가는 동안 시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 : 터키와의 전쟁에서 빈을 구한 오이겐 공의 궁전이었으나 오이겐공이 사망한후 합스부르크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드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벨베데레는 상, 하 궁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하궁이 1714년에 먼저 만들어졌고 상궁은 그 후 1723년에 완성 되었다.

1955년 5월 미,소,영,불 4국의 외무장관들이 10년간의 신탁통치를 마치고 오스트리아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선언한 곳이기도 하다.

위쪽 궁전은 보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 입구 쪽에 커다란 연못이 자리잡고 있으며 후기 바로크 시대의 세속적 건축물(성당을 제외한)중 단일 건물로는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상궁만 또는 하궁만 또는 콤비티켓으로 양쪽을 다 볼 수도 있는데 우리는 9.5유로씩 내고 상궁만 보았다. 

 

 

 

 

              가슴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도 만져서 까맣게 되었다.

 날씨도 더운데 떨어질줄을 모른다.

 

 돌기둥에 기대 잠시 더위를 식히고

 내부를 둘러본다.

 이 곳 뿐만 아니라 빈 시내 곳곳엔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의 이런 형태의 조각들이 많았다.

 

 

 

 

 

 

 

내부의 이런 홀까지는 사진을 찍으며 볼 수 있었지만 미술품이 전시된 곳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피카소의 회화 작품과 오스트리아 조각가 프란츠 자베르 메세르슈미트의 두상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는데 가끔씩 국내에 작품을 들여와서 하는 전시회에 가보았을 때보다 훨씬 다양하고 훌륭한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궁전의 홈페이지에서 주요 작품에 대한 자료를 가져왔다.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던 유명한 작품.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세계사 교과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역사화이자 수많은 신문 잡지 등에서 패러디되어 사용  

                  인 자크

파블로 피카소

92세까지 살면서 회화, 조각, 등을 포함해 총 5만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그의 열정은 평생 끊이질 않았던 여자들에게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몇 명의 여자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잘 알려진 애인만도 일곱 명이 넘었다.
 대부분의 여인들이 피카소에게 버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고마워하기도 하였고, 또한 그리움에 자살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Picasso-<아비뇽의 처녀들>

거의 500년을 이어온 미술의 전통을 마감시켜버린 그림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작품하나로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버렸다는 말을 듣는다.

        Picasso-<에나멜 냄비>

Picasso- <누워있는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년 7월 14일 - 1918년 2월 6일

빈 출생. 빈의 미술공예학교를 나온 뒤 역사주의 특히 매커드의 감화를 받아 괴기·장식적인 화풍을 전개하였다.

유명한 부르크극장의 벽면장식에서는 모든 유파를 절충한 양식이 보이나 1898년경부터는 독자적인 장식 패턴을 구사하여 상징의 주제를 찾아냈다.
1900∼1903년에는 빈 대학교의 벽화를 제작하였는데 그 표현이 너무나 생생하여 스캔들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고독에 묻혀 자기 스타일에 파고들었다. 동양적인 장식양식에 착안한 점,

추상화와도 관련을 가지면서 템페라·금박·은박·수채를 함께 사용한 다채로운 기법은 그의 독창적인 기법이다.

대표작으로는 <키스>, <유디트>연작 등이 있다.

 

클림트가 죽자 무려 14명이 친자확인 소송을 신청하였고, 그중 4명이 자식으로 판명되었다  

클림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며 또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바로 이 <키스>이다. 오스트리아 국가에서 지정한 국외 반출 금지 작품이다.

따라서 그동안 국내의 전시회에 왔던 작품은 복제품이다. 사이즈도 굉장히 크고 주변에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려있기도 한 작품이었다.

삶의 매 순간에 미학을 부여하고자 했던 분리파의 염원이 가장 잘 구현된 작품이다. 장식적이고 화려한 이 그림은 두 남녀의 입맞춤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반대되는 두 세계가 합일에 이르는 순간을 서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이 입맞춤을 묘사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에로틱한 분위기보다는 시적인 명상의 세계를 연상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그림에서 여인이나 남자는 단지 남자나 여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상반된 두 극단을 모두 통칭하는 하나의 기호 혹은 상징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어둠과 빛, 늙음과 젊음, 죽음과 탄생 등이 두 인간을 통해 표현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어둠과 빛, 죽음과 탄생 등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입을 맞춘 두 연인처럼 하나로 존재한다. 정사각형의 화면 정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두 인물의 합일과 마치 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축복을 내리기라도 하듯이 눈처럼 쏟아져 내리는 황금 분말들과 이제 땅에 몸을 누일 두 인물을 받아줄 대지에도 꽃들이 쌓여 푹신한 양탄자를 펼쳐놓은 것만 같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상반된 두 세계의 합일이 꿈 속에서만 가능한 세계라는 메시지를 이 그림에서 읽을 수도 있다.  

                                                                             

                                        <키스>의 여주인공 에밀레 플뢰게.

          클림트 동생과 플뢰게의 언니가 부부. 일찍 죽은 후에 조카딸의 후견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관계 시작.(미묘한 사랑관계)

           아주 가까이서 서로 깊이 사랑했지만 정신적인 관계 이상의 선을 결코 넘지 않았던 관계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음)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클림트. 수많은 여자들이 클림트를 거쳐가고 사생아가 12명에 이르렀지만 그녀는 그런 여자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받는 것이 싫어 그와 그를 스쳐지나가는 많은 여자들을 애태우며 지켜볼 뿐이었다.

          클림트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처럼 그녀 또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클림트처럼 많은 남자를 만나면서

         욕망을 채우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직 첫사랑인 클림트만 바라봤을 뿐이다. 클림트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다른 남자와는 사랑을 나누지 않고 영원한 클림트의 여인이 되고자 했다.

다행히 클림트는 죽기 직전에 그녀를 찾았고,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도 그녀의 이름이었다.

 플뢰게는 끝까지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고, 그가 죽자 그녀는 클림트의 편지들을 소각시켜 그의 비밀들을 지켜주었다.

 <처녀들>

<컴머성 정원의 산책로>

시드니의 hydePark 에서 찍은 사진인데 <컴머성 정원의 산책로>와 배경이 유사하다.

 <개양귀비 들판>

  <정원에 만발한 꽃> 

 

<물뱀1>

 

                                                                                             <물뱀2>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부인의 초상1'

세 번째로 비싸게 거래된 작품으로 지금 돈으로 환산해 1억 4480만 달러.

역대 13번째로 비싼 그림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부인의 초상2'

<에밀리 푸뤼게에 보낸 엽서>

<유디트1>

 <유디트2>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년 6월 12일 - 1918년 10월 31일  

오스트리아 빈 대학 출신 천재 화가. 과감하고 에로틱한 인체 묘사, 거칠고 뒤틀린 터치로 유명하다.

죽어서도 끊임없이 논란을 몰고다닌 그의 작품 세계를 '비틀림의 미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쉴레는 남자 인물을 묘사할 때 종종 자신의 자화상을 사용하곤 했고 그의 걸작 중 하나인 <가족>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은 1905년에 결혼한 그의 부인이다. 처음에는 아이를 등장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화가는 꽃다발이 놓여있던 여인의 다리 사이에 대신 아이를 그려 넣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18년 부인은 당시 전 유럽을 휩쓸고 있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고, 화가 자신도 3일 후 같은 병에 걸려 죽었다. 그림은 이렇게 해서 미완성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쉴레가 묘사한 인간의 몸은 모두 살갗이 벗겨진 것처럼 강렬한 색을 띠고 등장한다. 육체에 대한 강한 증오를 읽을 수 있다. 또 이 그림에서처럼 서로 몸을 벗고 원초적 상태에 가까이 다가가 있으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두 인물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검은 죄수복 같은 것을 입고 있는 한 남자와 붉은 줄무늬가 있는 스커트를 걸친 여인이 서로 끌어안고 있다. 두 사람은 거칠고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돌들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마구 구겨진 흰 천 위에 누워있다. 남자의 눈은 겁에 질린 듯 먼산을 바라보고 있고 여인은 안타까운 몸짓으로 남자를 끌어안으려고 하지만 몸은 뒤로 밀려나 있다. 두려움, 안타까움 혹은 죽음이나 질병 같은 암울하고 처절한 분위기가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는 이들은 클림트의 남녀의 합일의 순간을 묘사한 <키스>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두 그림은 동일한 주제를 너무나도 상반된 방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주의자였던 에곤 쉴레의 그림에는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 그의 그림에서 두 남녀 사이에는 두 사람의 만남과 결합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모종의 장애 혹은 거부하는 강렬한 힘의 존재가 느껴진다. 성과 죽음의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만남을 묘사한 이 그림은 인간의 실존이 부딪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장면 중 하나를 거의 아무런 수사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벨베데레 궁전의 전시실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독특한 느낌을 받은 것은 프란츠 자베르 메서슈미트의  <성격 두상(Character Heads)〉시리즈가 전시된 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모든 작품이 그동안 보았던 일반적인 두상의 조각작품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독특한 표정들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역시 빈에서 활동했던 독일 출신 궁정화가 프란츠 자베르 메서슈미트는 ‘얼굴에 혼란스러운 정신상태’가 엿보인다는 이유로 그토록 갈망하던 빈 미술 아카데미 교수직에서 탈락했는데, 그 사건 이후 사망할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면서 실망과 상처를 조각으로 표현한 〈성격 두상(Character Heads)〉시리즈는 그의 작품세계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백미(白眉)로 남아 있다. 메서슈미트는 거울 앞에 선 채 자신의 몸을 스스로 꼬집거나 때리면서 그로 인해 변하는 일그러진 여러 얼굴 표정을 기록했다고 한다.  

 

    

                                                      

         

 자신이 심한 우울증과 피해망상을 겪기도 했던 조각가 메서슈미트는 이 <성격두상>으로 불리는 다수의 두상 조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예술가이다. 벨베데레 미술관에 있는 두상 역시 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움츠린 목과 극도로 안면 근육을 수축시킨 얼굴 묘사 등을 통해 조각가는 폭발 직전의 상태에 처해 있는 인간의 극단적인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궁전 정원에서 조깅하는 사람

 

우리가 벨베데레 궁전을 빠져나올 무렵 더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