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omestic travel/경기내륙

2014. 08. 29 이성계 말년에 머문 양주 회암사(핸폰)

봉들레르 2014. 8. 29. 16:01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 기슭에는 조선시대까지 회암사가 있었다.

축구장 19개 정도의 크기(13만6676㎡)에 건물만 262칸인 조선 최대 규모 사찰이었다. 당시 승려 3000명이 수행했다.
조선 건국 초 국가에서 운영했으나 선조 때 절은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터(사적 제128호)만 남아 있다.

회암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무학대사와 함께 머무른 곳이다.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한다.

회암사 터가 요즘 주목받고 있다. 절터에서 출토됐으나 미국 보스턴박물관에 있는 문화재 환수 운동이 본격화하고 있어서다.

또 최근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을 다룬 TV드라마가 방영되고 그의 책이 잇따라 출판된 것도 계기가 됐다.

이곳에는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회암사지 부도(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같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3.2m 높이의 당간지주(幢竿支柱), 주춧돌, 석축 등도 있다.
절터에서는 지난 10여 년간 문화재 200여 점이 출토됐다.

조선 태조의 연호가 새겨진 기와 막새, 효령대군의 기와 불사 유물, 조선 왕실 전용 도자기, 불상, 불화 등이다.

국보급으로 꼽히는 라마탑형(티베트 지역 불탑) 사리구(舍利具·사리보관함)는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있다.

사리구는 13세기 회암사 부도에 안장됐으나 일제강점기인 1939년 일본인이 도굴해 밀반출했다. 이를 보스턴 미술관이 사들인 것이다.
시민단체와 불교계는 사리구 환수 운동을 하고 있다. 문화재 환수운동을 주도하는 조계종 혜문 스님은

 “정계·문화계·재미동포 등이 보스턴박물관과 사리구 반환 문제를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는 양주시 등과 사리구 환수 운동을 해나가기로 했다.

 출토된 유물 대부분은 회암사 절터 입구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박물관은 양주시가 2012년 7월 127억원을 들여 지었다. 지상 2층(연면적 3561㎡) 규모다.

박물관은 다음 달부터 10월까지 ‘500년 전 왕실사찰로 떠나는 시간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연등 제작과 화엄사지 투어 등이 준비돼 있다.

양주시는 회암사터 주변에 내년까지 잔디광장, 쉼터 등을 조성해 관광객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기로 했다.
절터에는 아직도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돼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양주 회암사에  무학대사 부도(덕이 높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돌탑)

 

서울이 조선왕조 도읍으로 정해지는 데 태조 이성계 외에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승려인 무학(1327~1405)이다.

새 도읍지 후보로는 계룡산을 포함, 10여개가 있었다. 이성계는 일일이 답사를 다녔고 대사로 높여 대접한 무학에게 자문을 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1394년 8월 고려 남경터를 보여준 뒤 의견을 물었을 때 무학은 "사방이 높고 수려하며 가운데는 평평하니 도읍할 만하다"고 했다 한다.

 600년 역사의 서울이 결정된 순간이다. 구세력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성계의 천도의지와 한강유역의 지정학적 고려,

그리고 무학 등 당시 불교계의 풍수지리설 영향에 따른 것이다. 불교는 부패집단으로 지탄받았으며 왕조교체의 빌미도 됐지만 아직 이념적으론 건재했다.

하지만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된다. 무학이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태종)과 사이가 나빴고

또 전반적인 숭유억불 정책이 강화되면서 서울과 관련한 그의 역할은 잊혀지고 '왕십리'같은 설화로만 남았다.

 . 무학이 생전에 머물던 회암사는 왕실사찰로 조선 초까진 번성했지만 지금은 터만 있다. 새 회암사가 옛 회암사터 위쪽에 세워졌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 선시는 고려 말 고승으로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나옹선사(1320∼1376)의 작품이다.

시뿐 아니라 가곡으로도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나옹선사는 쇠락해 가는 고려불교를 일신하기 위해 교종과 선종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스님이다.

스님의 노력은 춘천 청평사, 안성 청룡사, 금강산 건봉사 등 많은 사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나옹선사가 입적한 신륵사에는 지팡이가 싹터 자랐다는 은행나무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선사의 탑비명은 선사와 친분이 있던 목은 이색 선생이 썼다.

이색은 “보제(나옹선사의 법호)가 살아있는 것 같다.

신륵사는 보제께서 크게 도를 펴던 곳으로 장차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며 흔쾌히 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양주 회암사는 나옹선사가 주지로 머물며 고려불교의 중흥을 모색했던 곳으로,

선사의 스승 지공화상이 창건했던 절이다.

지공화상은 인도 마가다국 출신으로, 히말라야와 원나라를 거쳐 1326년 고려에 들어왔다.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 지공화상의 정신은 고려불교 발전의 계기가 됐다.

고려에 머무르는 3년 동안 지공화상은 감로사와 숭수사, 건동선사, 통도사 등에서 설법하며 널리 존경을 받았다.

나옹선사는 스승의 당부를 잊지 않고 회암사 중창불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회암사는 고려불교를 대표하는 총본산이자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왕실의 원찰로 자리매김했다

 

 

 

삼대화상 진영. 왼쪽부터 무학대사, 지공화상, 나옹화상.

 

 

회암사의 공양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커피까지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