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omestic travel/서해안

남농과 운림산방

봉들레르 2014. 7. 19. 11:09

 

 

조선시대 남종화의 대가 허유의 맥을 이어가는 화방

 

 

진도 그림의 뿌리이자 한국 남화의 고향이 바로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살면서 그림을 그리던 곳으로,

조선후기 남종화의 대가로 불리는 소치 허련선생은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의 효시인 왕유의 이름을 따 허유로 알려져 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며 남화의 맥을 잇는다.

허련은 진도 태생으로 이웃 땅인 해남 녹우당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혔는데,

대둔사에 머물던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우게 되면서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간다.

스승인 김정희가 죽은 후 허련은 고향으로 내려와 작품활동을 펼치며 한국 남화의 맥을 형성한다.

남화 또는 남종화라고 불리는 화풍은 전문 화원들이 그리던 북종화와는 대비되는 그림으로

수묵을 가지고 담대하면서도 자유로운 형식으로 선비의 마음을 담아 그리는 산수화를 말한다.

운림산방은 말년에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그림을 그리던 화실로 ‘ㄷ’자 기와집인 운림산방과

그 뒤편의 초가로 된 살림채, 새로 지어진 기념관, 오각으로 만들어진 연못 등의 고즈넉한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종종 영화나 드라마가 촬영되기도 해 눈에 익은 연못이 보이고 뒤로 허련이 살았던 운림산방이 보존되어 있다.

전시관에서는 허련의 작품을 비롯해 그의 손자인 허건의 작품까지 남화를 대표하고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관과 함께 있는 진도역사관에서는 진도의 옛 모습에서 지금까지 그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남농(南農) 허건(許楗ㆍ1908-1987년)은 남도 화단의 스타였다.
  

 

할아버지가 추사를 사사한 소치(小痴) 허련(許鍊ㆍ1808∼1893),

아버지가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1-1938)이니 예술가 집안의 후광이 컸고,

명성은 높았지만 돈은 없었던 집안 형편 때문에 37세에 동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기구한 사연도 유명세를 더했다

.
남농은 '삼송도'로 대표되는 소나무 그림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가 새로 일으킨 남종화가 잘 팔려 가문의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재건한 후

1970년대에 시작한 소나무 그림은 서울에서도 널리 유통돼 화가로서의 외길보다는

각계 인사와 널리 교우하고 수석수집 취미 등을 기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어 남농의 특색이 독창적으로 구현되는 45~60년대다.

'조춘고동(早春古洞)'처럼 우리의 주변인 전국 곳곳의 실경, 농부와 어부 등 다양한 소재를 화면에 담아낸다.
그림에 반초서체의 화제를 적기도 했다. 속필로 유명한 그답게 붓질의 경쾌함이나 속도감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작품들이다.
삼원법도 활용하지 않고 '정방산 성불사'에서 보듯 특유의 집중된 화면구성을 보인다.

자신만의 이런 화풍을 남농은 '신남화(새로운 남종화)'라 불렀다.

실제 그는 50년에 탈고한 명저 '남종회화사'에서 "예술은 민족성을 잊어서는 안된다"며

"남화는 중국에서 왔어도 조선의 남화를 그리고, 유화는 서구에서 건너왔지만 조선의 유화를 그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모든 예술은 사람을 고무하고 감동과 기쁨을 주어야 한다" 등의 예술론을 편다.

남농하면 떠오르는 산수화, 소나무의 전형은 70~80년대에 이뤄졌다.

해안 등이 화면 한쪽을 가로지르고 비탈진 언덕에 나무가 배치되는 '남농표 산수화',

거칠고 빠른 붓질과 농묵·담묵의 효과적 대비 등으로 강인한 생명력과

문인의 청렴한 정신적 기개를 드러낸 '남농표 소나무'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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