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Czech(2013.Aug)

2-6 그날의 절규- 바출라프 광장(Vavlavske namesti)

봉들레르 2013. 8. 22. 11:19

 

프라하 국립박물관에서 구시청사 광장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길을 신시가지라고 하며,

이 신시가지의 바츨라프 기마상이 서 있는 곳을 바츨라프 광장이라 부른다.

바츨라프는 체코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인물로, 10세기경 보헤미안 기사들과 함께 적군을 물리치고 체코의 국난을 극복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체코 민주화의 상징인 '프라하의 봄'이 일어났던 현장으로

이곳에서 수많은 체코의 젊은이들이 소련에 대항하여 자유를 외쳤고,

그 흔적으로 당시에 분신한 두 명의 청년 사진과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심어진 나무가 바츨라프 동상 앞에 놓여 있다.

그 앞으로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어서 각종 집회나 콘서트 등이 열리고 있다.

동상 남쪽으로 750m 정도 길게 이어진 길 양쪽으로는 우리의 명동을 방불케 하는 각종 상점과 레스토랑 등이 화려한 불빛을 뽐내며 늘어서 있는데,

그 때문인지 이곳은 언제나 많은 인파들로 발딛을 틈이 없다. 역사적이면서도 초현대적인 이 광장은 프라하의 이색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미 650여년의 역사를 지닌 이곳은 프라하 여행의 출발지로 모든 여행객들이 거쳐 가는 곳이다.

 

 

 

 

 

Costa 커피집

 

 

 

중세시대에 프라하 상업 중심지였던 이 곳은 지금도 은행과 카페, 환전소, 서점, 패스트푸드점 등이 밀집,

거대한 상업 지구를 형성하고 있다. 때문에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여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 편리하다.

세계 10대 박물관으로도 꼽히는 프라하 국립박물관 아래 바츨라프 2세

기마동상이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바츨라프 광장은 길이 750미터, 폭 60미터의 대로다

 

 

 

 

 

 

 

 

1968년 8월 20일 오전 11시, 구 소련을 비롯한 동독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등 5개국으로 구성된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사전 통고 없이 일제히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 침공했다.

우호국이라 주장했던 이들의 침략 준비는 면밀했고 침략군의 대부분은 소련 군대가 차지했다.

8월 21일 오전 4시, 프라하 시내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 건물이 소련 낙하산 부대에 의해 점령당했고

시민들은 바츨라프 광장을 진격해 들어오는 소련군 탱크 앞에서 "나를 쏴라!"며 외쳐댔다

1956년 소련 내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있은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 노보트니 정권은 스탈린을 추종하며 보수 정책을 이어갔다.

60년대 들어 이에 반발한 지식층을 중심으로 민주화와 자유화 실현을 위한 물결이 일어났고

마침내 68년 1월 개혁파의 두브체크가 당 제1서기에 오르며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검열제가 사실상 폐지되고 많은 정당과 정치단체가 부활됐으며 의회는 활발한 논의와 비판의 장으로 변모했다.

자유화를 향한 정책 변화를 온 국민들은 '프라하의 봄'이라 부르며 공산체제의 탈바꿈을 환영했다. 짧은 기간 찾아온 프라하의 봄이었다.

동유럽 국가에 미칠 체제 변화에 불안을 느낀 소련은 결국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한 이탈'을 명분으로 침공을 강행해

두브체크를 밀어내고 후임 서기장에 강경파 후사크를 임명했다. 개혁의 수레바퀴가 멈춰선 것이다.


프라하에 다시 봄이 찾아오기까지는 21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89년 소련 공산당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과 함께 공산정권이 퇴진한 후

벨벳혁명의 주인공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이 들어섰고 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한국일보)

평화로운 오늘날에 바출라프광장

1968년 봄. 이듬해 1월 19일 프라하 대학 철학부의 21살 청년 얀 팔라흐Jan Palach는

국립 박물관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기고 그 계단을 뛰어 내려와 바츨라프 광장 한가운데,

바로 저 십자가가 박힌 자리에 쓰러지면서 민주화를 외쳤다. 이어 2월 25일에는 19살의 얀 자익Jan Zajic의 분신이 이어졌다

얀 팔라흐Jan Palach

청년이 산화한 자리에 그를 비롯한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는 기념판 앞 나무 십자가

 2차 프라하의 봄을 시도했던 양팔라우와 얀자익의 기념비

 

 

그날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이는 비눗방을 놀이에 시간가는줄 모른다.

 

 광장 항공사진(퍼온 것)

광장 항공사진(퍼온 것)

체코의 역사

고대
BC 5세기경 켈트인, 최초 거주
AD 5세기경 슬라브인, 정착 시작
625-658 : 최초의 슬라브족 국가인 Samo 왕국 건설
9세기 : Moravia 왕국 건설 (907년 마쟈르족에 의해 멸망)

보헤미아 왕국 (10세기-1526)
10세기경 Premyslid(프로제미슬)족, 체크부족 중심으로 왕국 건설
14세기경 Premyslid(프로제미슬) 왕조가 단절되고, Luxemburg(룩셈부르크)왕조 지배 (체크 역사의 황금시기)
1355 : 챨스4세,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후 프라하를 제국의 중심으로 발전
1419-36 : 후스전쟁

합스부르그가 지배 (1526-1867)
1526 : 룩셈부르그가의 지배 종료, 합스부르그가의 지배 시작
1618-48 : 30년 전쟁 (동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따라 보헤미아 왕국이 합스부르그 왕가에 정식 합병)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지배 (1867-1918)
(1914-18) 제1차 세계대전
(1939-45) 제2차 세계대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시대 (1918-39)
독일나치 지배 및 공산정권 시대(1939-89)
독일나치 지배 (1939-45)
공산정권 시대 (1945-89)
- 1968년 : 개혁운동(프라하의 봄) 좌절

자유화 시대 (1989 - 현재)
1989.11 : 벨벳혁명을 통한 자유민주정부 탄생
1992.6 : 자유총선 실시
1993.1 :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분리, 체크공화국 탄생
1999.3 : NATO 가입
2002.6 : 제4차 총선 실시 - 제2기 사민당 연립정부(수상 : Spidla) 집권
2004.5 : EU 가입

 

 프라하 관광의 시작은 바츨라프 광장에서 시작한다. 바츨라프 광장은 지하철 A선 바츨라프 광장역에서 하차한 후 지상으로 올라오면 바츨라프 기마상을 만나게 된다. 바츨라프 기마상의 뒤에는 국립박물관 (Narodni muzeum)이 자리하고 있다. 국립박물관은 1885년 착공해서 1890년에 완공 되었으며 네오 르네상스 양식 혹은 황제 르네상스양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2층은 역사관, 3층은 자연사관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세계 10대 박물관 중 하나로 뽑히기도 한다. 어느 나라나 자신들의 대표 박물관들을 세계 3대, 5대, 10대 박물관이라며 자랑한다. 대표할만 하니까 자랑하겠지만, 안타까운 점은 이 국립박물관은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프라하의 명성에 비해 박물관 자체가 널리 알려지지 못한점도 있고, 우리가 알만한 ‘모나리자’같은 대표적인 전시물도 없는 편이다. 맛집을 찾아가는 열정을 이런 전시 공간에 일부만 쏟아 부어도 그 나라 또는 그 도시를 알아 가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물론 취향에 따라 다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광장이 시작하는 윗부분에는 성 바츨라프 (Sv. Vaclca) 기마상을 만나게 된다.
저 위에 말을 타고 있는 분이 ‘성 바츨라프’라는 분으로 10세기에 체코를 지배했던 분이다. 지금의 체코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두 지역으로 나뉘어 지는데, 이분이 이 곳을 지배 했을 당시에는  폴란드 남부 실레지아라는 지역까지 포함해 이 세 지역을 기점으로 땅을 넓혔던 분이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성 누드밀라’(성 바츨라프의 할머니), ‘성 프로코프’(혁명가), ‘성 보이테크’(2번째 주교), ‘성 아네쥐키’(리부셰와 같은 전설 속 인물)이다. 체코가 위기에 처하면 이 네분이 성 바츨라프와 함께 나타나 체코를 지켜준다는 수호 성인들이다. 유럽을 다니다 보면 기마상을 많이 보게 되는데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것은 말이 발을 하나들고 있고, 어떤 것은 말이 두발을 들고 있는데 여기에도 다 의미가 있다. 성  바츨라프처럼 말이 한 발을 들고 있다면 전쟁에서 승리했던 장군을 상징하고, 말이 두발을 들고 있으면 전쟁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을 상징 한다. 그리고 가끔 말의 네발이 전부 땅에 닿고 있는 게 있는데 그러면 그분은 편안하게 살다가 가신 분이라고 생각 하면 된다.

바츨라프 광장(Vaclavske Namesti)은 이 기마상에서 부터 저 밑에 있는 회색건물 뉴욕커 매장앞까지 760m가 바츨라프 광장이라 불린다. 이 곳을 최초에 성 바츨라프가 만들었는데 광장으로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곡물시장, 마시장, 우시장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에 1354년에 까를 4세가 저 밑에 있는 구시가와 이곳을 하나로 뭉치는 커다란 광장을 계획 하면서 지금처럼 커다란 광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광장으로의 변신은 성공하였지만 하나로 합치는 데에는 실패 하면서 지금의 구시가광장과 신시가 광장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 광장은 뜨거운 이야기를 품고있다. 바로 ‘프라하의 봄’이다.  프라하의 봄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벗어나 공산화에서 독립을 하려는 독립 운동이라 볼 수 있다. 그전에 이 곳, 체코는 오스트리아와의 30년 종교 전쟁을 통해 270년이라는 세월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국으로 살아 오다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왕위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를 1914년 6월 28일  젊은 보스니아라는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청년이자 대학생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암살하면서 이것을 계기로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해 세르비아와 합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여러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뛰어들면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했다. 오스트리아가 1차 세계대전을 벌이게 되고, 그 전쟁에서 패하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독립을 하게 되는데 혼자 독립을 한 것이 아니라 옆 나라 슬로바키아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로 독립하게 된다. 그 이후에 소비에트 연방에 속하게 되면서 공산화가 되는데 개혁파인 둡체크가 제1서기장에 오르면서 둡체크가 ‘인간적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발표 하면서 변화의 바람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소비에트연방에 속한 동유럽 국가에서 독립을 요구할 것을 두려워한 소비에트연방이 강력히 저지하고 나선다. 1968년 광장 끝에서 끝까지 사람으로 가득 메워서 시위를 하는데 소비에트 연방이 강력이 막아 선다. 탱크를 몰고와 해산할 것을 명령 하는데 해산을 하지 않자 탱크로 밀어 붙이게 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몸으로 막아내다가 내 친구,내 가족이 내 눈 앞에서 죽어 나가자 겁을 먹게 되면서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체코는 그런 역사적 사건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교훈으로 삼게 하는데, 기마상을 등지고 오른쪽 바닦과 왼쪽 바닦을 보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이 아스팔트로 쭉 내려 오다가 횡단보도를 기점으로 또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점이 겁에 질린 체코인들이 항복을 선언한 지점다.이렇게 프라하의 봄이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그래도 독립의 의지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다음 해인 1969년 까를 대학교 철학과를 다니던 ‘얀 팔라치’라는 학생이 다시 시위에 불을 붙이고자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게 된다. 이 학생은 원래 공산주의자였으나, 소비에트가 보여준 공산주의의 현실과 이상으로 여겼던 공산주의에 현실적 차이를 느끼게 되고, 그래서 박물관 정면에 읶는 중앙 계단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이 붙은채로 이 광장으로 내려와 숨을 거두게 된다. 성 바츨라프 기마상을 등지고 밑으로 조금 내려오다 보면 작은 화단을 볼 수 있는데 이 자리가 바로 ‘얀 팔라치’가 숨을 거둔 자리이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같은 대학 후배인 ‘얀 자이치’라는 사람이 똑같이 이곳에서 분신 자살을 하게 됨으로써 이 두 분을 위해서 제단을 만들게 되었고, 이 두 분의 시신은 안델역 근처에 있는 국립묘지에 안장 되어있다. 그 이후에 1977년에 하벨(극작가)이라는 사람이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77헌장이라는 것을 내걸고 민주주의를 갈망한다. 1985년 개혁개방 정책이 소련에서 일어나자 동유럽 국가들도 개혁개방의 파도를 타게 된다. 그 와중에 1989년 11월17일 ‘자유 민주화 투쟁 기념일’(국제 학생일)을 맞아 개혁 시위를 하던 중 한 학생의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죽게 되자 일반 시민 시위자들이 대거 참여 하면서 대규모의 시위로 발전하게 되고, 공산당 간부들이 전원 사퇴를 하게 되면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비공산주의로 전환되게 된다. 이렇게 혁명이 성공하고 하벨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그 이후에 민주화를 선언 하면서 이렇게 연설을 한다. ‘우리의 혁명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혁명을 ‘벨벳혁명’이라고 부른다.’ 민주화가 된지 이제 20여년이다. 민주화가 됐으니까 행복하게 잘 살아야 되는데 다시한번 고통을 겪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독립을 할 때 혼자 독립을 한 것이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체코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속국이면서 두 나라의 산업화를 위한 공장이였고, 슬로바키아는 두 나 라의 무기 만드는 공장 이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이 지나고, 산업화,민주화를 하게 되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그러더보니 정치적 영향력에도 차이가 나자, 슬로바키아의 제안으로 신사협정을 맺으며 분리독립을 하게 된다. 이런 영화의 한 장면같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 바로 바츨라프 광장이다. 지금의 바츨라프 광장안에는 다양한 사무실, 호텔, 레스토랑들이 자리잡고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광장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광장의 중간 부분쯤에 프라하의 명물 트램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본래 이 광장의 가운데 길은 트램길로 사용하였는데 1980년대에 정비를 하며 트램길을 없앴다. 그리고 이 자리에 트램 하나를 남겨 놓아서 카페로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곳에 역사의 흔적을 남겨 놓아 숨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이 프라하의 볼거리 중 하나인 것 같다.
봄이되면 광장 중앙의 화단에 예쁜 꽃들을 심어 놓아서 사진촬영의 명소로 뽑히기도 한다. 
광장의 밑부분으로 다 내려오면 정면으로 작은 골목길로 이어진다. 이 골목으로 들어가다 보면작은 피자가게가 하나 있는데 아침을 부실하게 먹었다면 피자 한 조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피자 가게를 지나면 작은 건널목이 보이는데 이 곳에서 직진하면 하벨 시장을 볼 수 있다.하벨 시장이 좋은 점은 가게에서 저렴한 과일을 구입 후 옆에 있는 수도시설에 씯은 후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기념품 가게들보다 물건의 가지수는 적지만 조금 저렴한 가격에 기념품들을 구입할 수 있다. 보통 나무로된 제품들이 많은데 책갈피나,마그네틱이 가져가기 편하고 아이들 장난감도 많지만 그야말로 짐이다. 시장 구경을 다 했다면 왔던길을 돌아가 뉴욕커 매장 지하에 있는 무스텍역에서 말라스트나라역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