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Czech(2013.Aug)

2-4 체코의 자존심-시민회관, 화약탑

봉들레르 2013. 8. 20. 01:14

 

좌측은 House At the Hybernians

오전 팁투어 : 9:30 시민회관 (Obecni Dům 오베츠니 둠) 정문 앞에서 시작

시민회관(오베츠니 둠 Obecni Dum; 영어로는 Municipal House)은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르누보 건축물로

콘서트 홀과 전시회장, 카페, 레스토랑을 갖춘 문화시설이다. 1층에는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의 오프닝과 클로징 공연장인 스메타나 홀이 있다.

앞으로도 영원하라는 의미의 글귀가 쓰여 있다고

양쪽의 조각은 체코 공화국의 굴욕과 재탄생을 의미한다

 

시민회관은 19세기와 20세기의 혼합 아르누보양식 건축물이다.

원래는 왕궁이었지만 왕들은 프라하 성으로 돌아가고 17세기 후반 대화재로 인해 소실됐다.

이후 1903년 체코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참여해 1912년 건물을 재건했다.

특히 이곳에서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공화국이 선포됐다.

 

 

 

http://www.kralovskacesta.cz/en/home.html

모자이크화는 체코의 대표적 화가인 알폰스 무하의 작품으로 '프라하에 경의;라고 하는 그림이다

 

 

 

 

 

 

 

알폰소 무어

Smetana Hall

 스메타나 홀은 체코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스메타나를 기념하는 스메타나 필하모니의 활동무대가 되는 곳이다.

시민회관의 내부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아르누보 양식으로 통일되어 있다

 스메타나 홀 

홀 안에 들어서면 높은 천정의 타원형 실내장식이 돋보인다. 타원형 주변의 밝은 조명이 실내를 비추도록 설계되어 있다.

스메타나

 

‘체코음악의 창시자’라 불리는 스메타나는 민족적인 멜로디와 리듬을 살려 애국적인 작품을 많이 작곡한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음악가이다.

보헤미아 리토미즐에서 태어나서 오스트리아 통치를 받던 시절, 독일어를 공부하며 자랐다.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처음 음악교육을 받았고 6세때 처음 공개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다.

음악적 재질이 발견되면서 그는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는다.그와 프라하의 만남은 11세 되던 해이다.

프라하에서 그는 베를리오즈나 슈만, 그리고 리스트를 만났다.

특히 리스트는 스메타나가 작품을 출간하도록 후원했고 1849년에는 프라하에 음악학교를 설립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1856년에는 스웨덴으로 가서 지휘자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1861년 체코의 민족운동이 활발해지자

다시 조국 프라하로 돌아온 그는 음악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아름다운 멜로디 속에 우수가 깃들여 있는듯한 스메타나의 음악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고 있는 보헤미아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보헤미아의 언어마저 탄압을 받자 프라하에서는 민족 부흥 운동이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스메타나는 지금의 국립극장을 설립하는데 예술인들과 힘을 합쳤다.

그는 또 드보르작이 음악활동을 하는데 힘을 쓰기도 해서 또 하나의 애국적인 음악인을 길러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는 드보르작이 더 유명하지만 체코 사람들이 스메타나를 체코음악의 창시자로 부르며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음악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였기 때문을 것이다.

스메타나의 첫 오페라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크인’과 연이어 발표된 ‘팔려간 신부’는 그의 독립운동 정신이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스메타나는 1866년에 국립극장의 수석 지휘자 자리에 앉기도 했지만 1870년 경 매독으로 귀가 어두워져 지휘자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해 가을에는 완전히 청각을 상실하고 만다. 음악가에게 치명적인 청각상실로 인해 그는 모든 공직을 버리고 보헤미아 북부의 작은 마을에 은거했다.

그러나 정신병에 시달리는 등 불행한 말년을 보내다가 1884년 프라하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비세흐라드 공동묘지에 있다. 그는 오페라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6곡으로 된 교향시 ‘나의 조국’은 스메타나가 민족음악가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곡이다.

체코의 역사, 자연, 전설을 소재로 한 향토색 짙은 작품으로 프라하에 바쳐졌다.

‘나의 조국’의 제2편에 있는 몰다우는 블타바 강의 독일어 이름이다. 몰다우강의 아름다움과 숲속 사냥의 광경, 농민의 결혼식,

즐거운 춤 등이 묘사되어 있다. 달빛아래 물의 요정들이 춤추는 듯한 감미로운 멜로디는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Obecni Dum Alfons Mucha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꼽히는 프라하 시민회관에서는 알폰스 무하가 문고리 창틀 가구 등

실내장식부터 벽화까지 한 공간을 총체적으로 연출한 방을 볼 수 있다.

그는 민속의상을 입은 여인들과 하늘을 나는 거대한 새 등을 통해 슬라브 민족의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냈다.

해마다 음악축제 ‘프라하의 봄’ 개·폐막식이 열리는

스메타나홀과 전시장을 갖춘 프라하 시민회관은 가장 유명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이다.

1912년 문을 연 문화시설로 당시 내로라하는 체코 미술가들이 실내장식을 맡았다.

특히 무하의 방은 작가의 다재다능함을 증명한다. 슬라브적 모티브를 살려 사랑과 전쟁,

죽음을 표현한 벽화부터 전등, 소파, 커튼, 문고리까지 구석구석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

옆의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시민회관과는 대조적으로 화약탑이라는 이름이 어울릴만큼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이 든다.

  1475년 지금의 구시가지를 지키는 13개 출입문인 성문 가운데 하나이자, 대포 요새로 건설되었다.

이후 총기 제작공이자 종(鐘) 주조공인 야로스Tomas Jaros의 거처 겸 작업실로 개축되었다가,

1475년 블라디슬라프 2세(VladislavⅡ)가 초석을 다지고 카를 교탑을 모델로 만들어진 화약탑은

연금술사들의 화약창고 겸 연구실로 쓰이면서 화약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Powder Tower - Opening of Celetná Street into Na Příkopě Street, Old Town

화약탑은 아르누보 양식의 시민회관과 나란히 있으며 체코 왕들의 대관식을 위한 노정이었던 ‘왕의 길’인 첼레트나 거리의 시작점이다.

화약탑이란 이름은 17세기 초 연금술사들의 연구실 겸 화약을 저장하던 곳에서 유래했다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 상점들로 가득하다

 

높이가 65m로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한다.

화약탑의 장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