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Sweden(2016 Jul)

12-5 노벨박물관

봉들레르 2017. 1. 6. 23:30

박물관은 노벨 재단(Nobel Foundation)에 의해 노벨상 시상 100주년인 2001년에 설립되었다.

다이너마이트 등을 개발한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의 삶을 기리고,

노벨상(Nobel Prize) 및 그 수상자들에 관한 정보를 전시하고 있다. 

'창의성'을 모토로 운영되는 전시관에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업적 및 이와 관련된 시대적 배경 등에 관한 전시 뿐 아니라,

700여 편이 넘는 창작 단편 영화, 각종 공예품과 전자기기 등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나아가 퀴리 부인(Madame Curie) 등 인류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에 대한 특별전 역시 열리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매일 무료 영어 가이드 투어(겨울 2회, 여름 4회)가 진행되고 있으며,

내부에는 식당과 카페, 기념품점 등의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롬(Stockholm) 중심부 감라 스탄(Gamla Stan)에 있는 스토토겟 광장(Stortorget)에 위치한다. 

 

 

 

 

 

 

 

 

 

 

 

 

 

 

 

 

 

 

 

 

 

 

 

 

 

 

 

 

121년 전인 1895년 11월27일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유언장에 서명했다.

스톡홀름 노벨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던 이 유언장은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노벨상의 시작점이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세계 평화, 문학, 물리학, 화학, 의학 등 5개 분야에서 업적을 거둔 이들에게 전해달라는 유지를 이 유언장에 담았다.

노벨은 유언장을 작성하고, 이듬해인 1896년 사망했다.

이 유언장은 1897년 1월2일 공개됐고 노벨상이 창설된 것은 4년 후인 1901년이었다.

노벨이 유언장에 주관단체를 명시했지만 수상자 선정 방법 등은 밝히지 않아 첫 시상까지 시간이 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유언 내용이 공개된 후 스웨덴에서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정당한 유산을 엉뚱한 상에 빼앗기게 됐다고 생각한 노벨의 일가친척들은 법적 대응을 고려했다.

노벨의 유산은 3300만 크로나,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2500억원에 달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수상자의 국적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국부 유출이라는 비난도 쇄도했다.

그렇다면 노벨은 왜 유언장에 자신의 막대한 유산으로 상을 제정하라고 썼을까.

노벨이 사후 비난을 피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 발명으로 축적한 재산을 기부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노벨은 평화주의자로, 다이너마이트가 전쟁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힘들어했다고 한다.

노벨이 오보에 충격을 받아 노벨상 제정을 결심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형인 루드비그 노벨이 1888년 사망했을 때 프랑스의 한 신문은 그가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제목으로 부고기사를 썼다.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됐다는 이 부고 기사의 내용을 읽고

노벨이 재산을 기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벨이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와 교환한 서신 등을 보면 평생 독신으로 살며

자식이 없었던 그가 유산으로 상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워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93년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기꺼이 내 유산의 일부를 한 재단에 기부해 상을 제정하고 싶습니다.

(중략) 남자이건 여자이건 유럽에서 평화의 실현에 가장 공로가 큰 인물에게 수여할 상말입니다."

노벨이 상의 분야를 평화, 문학, 물리, 화학, 의학 등으로 명시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과학 분야의 기초가 되는 수학상이 없다는 점은 숱한 소문을 낳았다.

대표적인 것이 노벨이 수학자와 연적 관계였기 때문에 수학 부문의 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다.

노벨의 연인으로 알려진 이는 23살 연하인 소피 헤스였었는데 그가 수학자와 사귀었고 이에 노벨이 질투를 느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당시 유명 수학자였던 미타그 레플러와 노벨 사이에 한 여인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미타그 레플러의 지도를 받았던 러시아 출신 여성 수학자 소냐 코발레프스카야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노벨과 미타그 레플러는 거의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