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Sweden(2016 Jul)

12-2 세계 10대 박물관에 꼽힌 바사박물관

봉들레르 2016. 12. 23. 00:02

 

Central Stockholm and the movements of Vasa from Skeppsgården ("navy yard") to the anchoring place

near the old royal castle where it was fitted and armed in the spring of 1628,

and finally the location where it foundered and sank

 

 

 

 

 

 

1628년 8월10일 일요일 오후, 스웨덴 왕국의 스톡홀름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했다. 수천을 헤아리는 인파가 부둣가에 모였다.

이날은 북방의 ‘사자왕’이라고 불렸던 호전적인 왕 구스타브 2세가 특별한 애착을 갖고 만든 최강의 전함, ‘바사호’가

처음 바다로 나서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배에는 선원 100여명과 남편이나 아버지로부터 승선 기회를 얻은 가족들이

배에 올라 부두 쪽으로 으스대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족들은 스톡홀름 앞바다의 요새까지만 항해를 만끽하고 내릴 예정이었다.

악대의 웅장한 행진곡 연주와 사람들의 함성으로 축제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사호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비극을 맞았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첫 돌풍은 무사히 넘어갔다.

배가 좌현으로 기우뚱해서 보는 이들을 불안하게 했지만 결국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다음 작은 돌풍이 때렸을 때 대참사가 벌어졌다.

대포와 물자를 잔뜩 실은 거함 바사호는 다시 기울었고 축포를 쏘기 위해 열어둔 포문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거워진 배는 더 기울었고 바닷물이 배 안에 차올랐다. 옆으로 기울어 가라앉기 시작한 배 안에서 선장은 하선을 명했고,

아비규환 속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밑바닥 쪽에 있던 선원과 그 가족 30명은 결국 나오는 길을 못 찾고 배와 함께 수장됐다.

당시 스웨덴과 전쟁 중인 폴란드를 압박하러 발트해를 가로지를 예정이었던 바사호는 겨우 1300m가량 나아가고 꿈을 거둬야 했다.

 

이후 388년의 시간을 지나 지난달 13일 스톡홀름에서 바사호를 만났다. 거함은 변치 않는 위용으로 박물관에 들어선 이를 압도했다.

바닥에서 돛대 꼭대기까지 높이 52.5m, 함체의 높이(선미 기준) 19.3m로 5층 건물만한 나무배가 영화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선체의 길이는 47.5m, 뱃머리 대(바우스프릿)까지 포함한 총길이는 69m에 달했다.

보우스프릿에는 거친 파도를 넘어보지 못한 왕의 상징물, 사자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세계의 바다를 향하지 못한 바사호가 400년 가까운 시간을 뛰어넘어 세계인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고 있는 바탕에는

수많은 탐험가, 과학자, 고고학자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지난해 세계 최대 여행정보사이트인 ‘트립어드바이저’ 선정

세계 10대 박물관에 꼽힌 바사박물관에서 수중고고학 연구와 콘텐츠의 가치를 살폈다.

폴란드와 전쟁터에서 바사호의 합류를 손꼽아 기다리던 구스타브 2세는 어처구니없는 참사 소식에 대로하고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배에 남았다. 가까스로 탈출한 선장 쇠프링 한손을 비롯한 책임자들은 모두 철창에 갇혀 조사를 받았다.

아무도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바사호는 64문의 대포와 300명의 전투원을 태울 정도로 당시 최강 화력으로 설계됐는데,

덕분에 물 밖의 선체가 너무 커졌고 무게중심이 위로 쏠려 복원력을 잃기 쉬운 상태였던 것이다.

설계자는 수많은 함선을 건조한 조선 명장 헨릭 히베르트손이었는데, 바사호가 완성되기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출항에 앞서 위험을 알리는 징후는 여럿 있었지만 모두 무시되었다. 결정적 이유는 왕 자신이었다.

그야말로 가장 간절하게 이런 강력한 함선을 원했기 때문에 아래에서 올라온 경고는 중간에서 모두 없던 일이 된 것이다.

 

세월 따라 전설처럼 되어버린 바사호를 현실로 일깨우고 사람들을 규합해 건져 올리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는

아마추어 고고학자 안데르스 프란센이었다.

1950년대 초부터 바사호에 주목한 그는 철저한 문헌 조사로 가라앉은 장소의 후보를 압축하고 무거운 추를 내려

바다 밑에 목재가 있는지를 검증하는 방식으로 홀로 조사에 나섰다.

1956년 그는 드디어 바사호로 추정되는 검은 오크 목재를 발견한다.

그는 해군과 정부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이는 위원회 설치와 인양 시도로 이어졌다. 바사호가 맞았다.

인양은 바사호 밑에 6개의 터널을 뚫고 쇠줄을 연결해서 들어 올리는 방식이 채택되었는데,

모두 1300명의 다이버가 2년에 걸쳐 이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었다.

1961년 4월24일, 바사호는 333년 만에 어두운 바닷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 군함은 침몰하고 근 300년이 지난 뒤에야 한 끈질긴 청년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해저 탐험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성과중의 하나로 꼽히는데,

처음에는 별것이 아닌 듯이 보였던 두 개의 실마리가 배를 찾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첫 번째 실마리는 배를 갉아먹는 길이 30cm쯤 되는 연체동물인 좀조개였다.

이 좀조개는 인류가 처음으로 바다에 나간 이래 목조선을 갉아먹는 벌레이다.

1930년대 후반, 당시 겨우 20세였던  안데르스 프란젠은 스웨덴의 서해안을 항해하다가

좀조개에 많이 갉아 먹힌 난파선 조각이 떠있는것을 발견했다.

프란젠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발트해의 항해에 익숙한 그로서도 나무가 벌레에 의해 그렇게 심하게 갉아먹힌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발트해는 염분이 많지 않아 좀조개가 많이 번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그는 발트해에 침몰한 바사호가 아직 그대로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리했다.

옛 침몰선의 인양을 꿈꾸어 오던 프란젠은 1차 세계대전후 바사호와 그 배가 침몰한 위치에 관한 가능한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갈구리와 드랙 와이어(견인철선)로 항구 밑바닥을 쓸어 보았으나 낡은 침대틀과 갖가지 쓰레기만을 건져냈을 뿐이었다.

4년 동안 그가 노리는 목표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4년 동안 그 목표물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를 그의 목표로 인도해 줄 두번째 실마리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1956년 어느 날, 항구 밑바닥을 조사 하던 중 해저의 샘플을 집어 올리는 장치인 코어 샘플러에 뭔가 단단한 것이 부딪쳤다.

끌어올려 보았더니 거멓게 변한 아주 오래된 오크나무 조각이었다.

프란젠은 이 수역 바다에서 오크가 거멓게 되려면 100년은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기가 오래된 배를 발견한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배가 바사호가 아닐까? 그의 예감이 적중했다.
해군 잠수부가 33m 바다 밑까지 내려가 보았더니 바사호가 5m의 진흙에 흘수선 까지 묻힌 채 박혀 있었다.

인양작업의 첫 단계는 부선에서 내려뜨린 강철 케이블을 침몰선 밑으로 통과시킨 다음, 부선을 올렸다 내렸다 함으로써

침몰선을 진흙에서 끌어내어 더 얕은 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작업이 2년 걸렸다. 그 다음에 잠수부들이 내려가 모든 포문을 닫고 물이 새어들 만한 데를 모두 틀어막은 다음,

드디어 1961년 4월 31일 케이블, 팽창시켜 부력을 조절할 수 있는 부선, 그리고 수압식 재크등의 장비를 동원하여 바사호를 끌어올렸다.

 한겨레






 

 

 

 

 



 










 


















 











 

박물관 관람 후 까페에서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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