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Egypt(2007.Feb.)

이집트 여왕 네페르티티 무덤,

봉들레르 2015. 10. 2. 08:28

 

독일 베를린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네페르티티 여왕의 흉상.

기원전 1345년쯤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12년 발굴됐다.

 

네페르티티는 기원전 1370년대 재위했던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 아크나톤의 왕비다.

고대 이집트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네페르티티의 흉상’으로 유명하지만, 아직까지 그녀의 무덤이나 미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 고고학자들은 그녀의 흔적을 찾으려 애써왔다.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투탕카멘의 묘 안에 네페르티티의 무덤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CNN이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투탕카멘은 아크나톤의 다음 대 왕이다. 미국 애리조나대학교의 고고학자 니콜라스 리브스는

지난해 온라인에 공개된 투탕카멘 무덤의 고해상도 사진들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 이론을 제기했다.

사진에서는 벽에 균열이 발견됐는데, 이는 벽 뒤에 비밀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 공간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더 이른 시기의 왕실 무덤이 있을 수 있다”며 이 공간이 원래 네페르티티의 무덤이었을 수 있다고 밝혔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됐다.

피라미드 안이 아니라 룩소르 서쪽 ‘왕가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외진 골짜기에 있었고,

람세스 6세의 무덤의 바로 밑에 위치해 도굴꾼들을 피했기 때문이다.

리브스는 이 무덤이 다른 파라오들의 무덤보다 작다며,

원래 이전 시대에 다른 왕이나 여왕의 무덤으로 설계했던 무덤을 확장해 투탕카멘의 무덤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무덤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이 투탕카멘의 시대보다 앞선다는 추정도 내놨다.

 



이같은 정황증거를 바탕으로 그는 이 무덤이 원래 제18왕조 말기 이집트 여왕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이 무덤의 주인이 될 만한 여왕은 네페르티티뿐이다.

 네페르티티가 이 무덤에 묻힐 때까지만 해도 아크나톤의 뒤를 위어 파라오가 된 투탕카멘은 여기에 함께 묻힐 계획은 아니었다.

투탕카멘이 17세의 나이로 요절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페르티티의 흔적을 찾았다는 주장은 오랜 세월 동안 수차례 나왔다.

2003년에는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 내부 비밀공간에서 네페르티티의 미라가 발견됐다는 주장이 나와

고고학계가 들썩이기도 했지만 이집트 고대유물위원회는 이 미라가 15세 소년의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이 가설의 진위 역시 검증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캠브리지대 고고학자 토비 윌킨슨은 “리브스의 이론은 매우 애타는 발견”이라며 “X선을 이용해

벽 뒤에 실제로 그럴 만한 공간이 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기존 무덤에 손상을 입히지 않은 채

새 무덤을 발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투탕카문 무덤에 ‘네페르티티’도 함께 잠자나

 

1922년 11월4일,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이집트 룩소르의 ‘왕들의 계곡’에서 투탕카문(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했다.

소년왕의 죽음을 둘러싼 숱한 수수께끼와 ‘신화’가 세계에 퍼졌고, 파라오의 황금가면과 무덤은 이집트에 외화를 벌어주는 효자가 됐다.

최근 이집트가 다시 투탕카문 미스터리로 시끌시끌하다.

발단은 지난 8월 영국 출신 고고학자 니컬러스 리브스가 “투탕카문 무덤 안에 네페르티티의 묘가 숨겨져 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기원전 14세기 18왕조의 왕 아케나톤의 왕비인 네페르티티(사진)는 고대 이집트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름 자체가 ‘미녀가 온다’는 뜻이다. 다신교 시대에 아톤신 유일신앙을 주장하며 남편과 함께 ‘종교개혁’을 단행한 주역이기도 했다.

네페르티티의 미모를 보여주는 흉상은 현재 독일 베를린의 노이에스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네페르티티는 기원전 1370년경 태어나 마흔 살에 숨진 것으로 추정되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네페르티티와 투탕카문의 관계는 확실치 않다. 네페르티티는 15살에 결혼해 여섯 딸과 외아들을 뒀다. 투탕카문은 아케나톤 직후,

혹은 그 다음의 파라오였는데 선대 왕의 종교개혁을 뒤집어 아문을 최고신으로 섬기는 다신교 체제로 복귀시켰다.

 

투탕카문은 ‘살아 있는 아문’을 뜻한다. 아케나톤의 사위였다는 설도 있고, 양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2013년에는 네페르티티의 친아들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집트 중부 룩소르의 ‘왕들의 계곡’에 있는 투탕카문의 무덤

영국 출신의 고고학자 니컬러스 리브스(왼쪽 두번째)가 이집트 문화유산부의 맘두 엘다마티 장관(왼쪽 세번째) 등과 함께

지난 28일 룩소르 ‘왕가의 계곡’에 있는 투탕카문 무덤의 묘실을 살펴보고 있다

무덤에 보관돼 있는 파라오의 황금관 얼굴 부분


리브스는 지난해 스페인 전문가들이 투탕카문 묘실(墓室)에서 촬영한 디지털스캔 사진을 보고 비밀의 방들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묘실 북쪽과 서쪽 벽 뒤에 숨겨진 방 2개가 있으며, 그 안에 네페르티티의 무덤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최고유물위원장을 지낸 자히 하와스는 18왕조 때 한 무덤에 두 묘실을 만든 경우는 흔치 않으며,

아문신을 부정했던 네페르티티가 사후에 왕들의 계곡에 묻혔을 가능성은 낮다고 주장했다.

스캔사진만을 근거로 유적을 파손할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반면 리브스는 이집트 신문 알아흐람 인터뷰에서 “네페르티티의 또 다른 이름 중 하나인 ‘스멘크카레’라는 글자가 당초 북쪽 벽에 씌어 있었는데

뒤에 투탕카문이 묻히면서 덧칠된 것 같다”며 “두 개의 묘실이 있는 무덤도 드물지 않다”고 반박했다.

지난 22일 이집트 문화유산부는 레이더 탐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지하투시레이더(GPR) 탐사법을 활용하면 레이더파의 반사를 통해 묘실 벽을 부수지 않고도 벽 뒤편 땅속의 구조와 재질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뇌 CT촬영을 하듯 단면도의 층을 쌓아 내부를 파악하는 것이다.

맘두 엘다마티 문화유산부 장관은 28일 리브스와 함께 투탕카문 묘실을 방문한 뒤

“북쪽과 서쪽 벽 뒤에 긁힌 흔적과 특이한 표지가 있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고 밝혔다.

알아흐람은 1922년 카터가 무덤을 발굴했을 때 묘실 정문에도 같은 흔적과 표지가 있었다고 전했다.

정부는 카터의 발굴을 기념, 오는 11월4일에 레이더 탐사 결과를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투탕카문의 미라는 여전히 무덤에 안치돼 있다. 황금가면은 카이로 박물관에 있는데

지난해 8월 직원들이 파손된 부분을 공업용 접착제로 붙인 사실이 들통났다.

문화유산부는 지난달 “독일 전문가들의 지원을 받아 원래대로 복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투탕카멘과 네페르티티 왕비

독일 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에 소장된 네페르티티 흉상.

독일 고고학자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1914년 이집트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굴한 뒤 독일로 밀반출했다.


 

1922년 11월 고대 이집트의 ‘소년왕’인 투탕카문(Tutankhamun·투탕카멘) 무덤이 발굴되자 심상찮은 소문이 돌았다.

관 뚜껑에 ‘파라오(왕)의 잠을 깨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10살 무렵(기원전 1361년) 즉위한 뒤 19살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요절한 소년왕의 ‘저주’라는 것이었다.

5개월 후인 1923년 4월 무덤 발굴을 후원한 영국의 카나본 경이 공교롭게도 면도 중에 생긴 상처 부위를 모기에 물린 뒤 폐혈증으로 사망했다.

투탕카문 미라의 얼굴에 난 상처와 똑같은 부위였으니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코브라의 출현

의문의 죽음이 줄을 이었다. 발굴 당시 무덤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고고학자 휴이블린 화이트는 신경쇠약을 앓다가 목을 매 자살했다.

카나본 경을 돌보던 간호사와 조카, 그리고 부인도 줄줄이 사망했다.

미국 철도계의 거물 조지 굴드는 거액을 지불한 대가로 투탕카문의 관을 직접 만진 뒤 그만 폐렴으로 죽었다.

자신을 파라오의 후예로 자랑했던 이집트 왕족은 무덤을 본 뒤 아내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발굴 후 10년간 사망한 관련자는 20여명에 이르렀다.

발굴책임자였던 하워드 카터는 용케 저주를 피했다.

하지만 어느 날 카터가 애지중지하던 카나리아가 코브라에게 잡아먹히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이집트에서 코브라는 파라오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투탕카문에서 출토된 황금마스크에도 코브라가 디자인돼 있었다.

투탕카문의 저주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과학자들은 3300년간 밀폐된 무덤 속의 유해 곰팡이에서 ‘저주의 실체’를 찾고자 했다.

그들은 이후 발굴된 파라오의 미라 곰팡이에서 폐렴을 일으키는 포름알데히드 같은 유독물질이 포함돼있음을 확인했다.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포도상구균도 포함돼 있었다.

따라서 원체 면역체계가 취약한 카나본 같은 이들이 무덤 속 맹독성 곰팡이에 노출돼 사망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투탕카문의 저주는 곧 ‘미생물의 저주’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학이 어찌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

무덤발굴 때마다 별의별 흉흉한 소문이 돌고, 실제로 해괴한 사건 사고가 속출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다반사였다.

예컨대 1973년 7월26일 경주 천마총에서 금관을 비롯한 금빛 유물들이 대거 출토됐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황금관을 담은 상자를 무덤 밖으로 옮기기 위해 한 발짝 떼는 순간….

그때까지도 뙤약볕이 이글거리며 내리쬐고 있던 서쪽 하늘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다.

일순 하늘이 암흑천지로 변하면서 ‘꽈다당’하는 소리와 함께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유물 상자를 옮기려던 조사원과 인부들은 놀라 혼비백산,

금관을 수습한 상자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는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현장사무실로 뛰었다.

갑작스런 하늘의 조화에 잔뜩 겁을 먹었던 조사요원들은 폭우가 진정되자

조사하던 무덤 내부로 돌아가 그런 다음 금관 상자를 안전하게 무덤 밖으로 옮기자 그렇게 무섭던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평상대로 맑게 개었다.

모두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1971년 7월 백제 무령왕릉을 팠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왕릉의 입구를 파헤치는 순간 천둥 번개를 동반한 억수 같은 소나기가 퍼부었다.

별별 흉흉한 소문이 들리고 실제로 발굴과 관련된 인물들이 횡액을 당했다.

 

당시 김원룡 당시 발굴단장은 공교롭게도 빚에 몰려 집을 처분했고 남의 차를 빌어 타고 무령왕릉에 가다가 아이를 친 일도 있었다.

무령왕릉의 ‘무’자만 나와도 가슴이 떨렸던 김원룡은 늘 연구실 책상머리에 유서를 붙이고 다녔다는 후문이다.

■왕릉발굴의 저주

중국의 경우 더 극적인 일이 벌어진다. 1956년 명십상릉 중 정릉(명나라 만력제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도 무서운 비가 내렸다.

명루의 돌짐승과 인부 한사람이 차례로 벼락에 맞아 떨어지거나 죽었다.

실성한 노파는 발굴현장에 찾아와 흐느적거리며 “제발 부탁이니 날 용서해요.

더 이상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게요”라며 해괴한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

당시 북경시 부시장 우한(오함)의 비극 또한 왕릉 발굴의 저주로 치부됐다.

우한은 1955년 “왕릉발굴은 시기상조”라는 다른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굴을 강행했던 인물이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자신의 희극작품 ‘해서파관(海瑞罷官)’이 이른바 4인방의 함정에 걸렸다.

중국을 10년간이나 소용돌이에 빠뜨린 문화대혁명의 서곡이었다.

‘해서(1514∼1587년)’는 명나라 때 ‘해청천(海靑天)’으로 일컬어질 만큼 청렴하고 대쪽같은 성격으로 황제의 실정을 질타한 인물.

그런데 모택동은 1959년 “해서는 황제를 비판했지만 충심으로 절개를 지켰다”면서 추켜세웠고 그 선양작업을 우한에게 맡겼다.

우한은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과감하게 펼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해서를 추앙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뒤에 ‘해서파관’이라는 이름의 희극으로 공연됐다. 공연은 모택동(毛澤東)의 극찬을 받았다.

그런데 1965년,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이 “우한의 해서파관은 독초(毒草)이며 깨끗하게 청소돼야 한다”고

포문을 열면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해서파관’은 (현대중국의 황제인) 모택동을 겨냥한 것이라는 올가미였다.

우한은 1969년 홍위병들에 의해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죽기 전 정릉발굴을 반대했던 동료에게 눈물을 흘리며 옛 일(정릉 발굴)을 후회했다.

“이보게, 자네가 맞았어. 자네가 나보다 훨씬 멀리 내다본 것 같아.”

■이집트 왕비의 모습은

각설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집트 투탕카문 무덤이 뜨겁게 재조명되고 있다.
이집트 정부가 무덤 뒤편에 숨겨진 또다른 무덤,

즉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고대 이집트의 2대 미녀로 꼽히는 네페르티티 왕비의 무덤을 찾겠다고 나선 것이다.

왕비는 투탕카문의 이모인지, 계모인지는 모르지만 당대에 섭정을 했다는 설도 있는 여걸이다.

1914년 독일인인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발굴해서 독일로 냉큼 밀반출한 흉상의 주인공이다.

왼쪽 눈을 칠하지 않은 미완성 작품이지만 미소가 절색이다.

만약 발굴이 이뤄진다면 우아한 모습의 네페르티티 왕비는 어떤 메시지를 안겨줄까. 저주일까 행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