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Uzbekistan(2014 Aug)

5-3 사흐리샵스(Shakhrisabz) 풍운아 아미르 티무르

봉들레르 2014. 8. 25. 12:53

 

티무르의 고향-샤흐리 사브즈

 

시내의 식당

 

 

 

 

 

 

 

점심값으로 지불하는 100장이 넘는 돈을 세는 꼬마의 손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낮술에 얼굴이 벌개진 우즈벡인

종업원들

 

식사 후에 찾아 간 곳은

우즈벡 최고의 영웅인 티무르 공원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사흐리샵스 옥사라이 왕궁터의 티무르 황제 동상

티무르가 젊은 시절에 전쟁터에서 엉덩이에 화살을 맞아 평생을 절름발이로 지냈다.

이 조각상에도 좌우의 다리가 다르게 조각되어 있다

뒷면의 조각은 고압적이다.

 

 

악 사라이 궁전

 

악 사라이(Ak-Saray) 궁전(1380~1404)

  22.5m에 이르는 아치로 된 입구는 200년 전에 허물어졌고, 이 궁전은 당시 중앙아시아 최대규모였다.

양측 두개로 된 방형의 거대기둥(pylon)과  정교한 모자이크가 선명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다.

양측 기둥의 높이는 일부 파손되었지만 38m에 이른다.


악사라이는 지금으로부터 630년 전에 지은 건물이다.

구운 벽돌로 뼈대를 만들고, 건물의 지붕은 목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동안 정치적 풍상, 세월의 풍상을 견뎌오느라 벽체만 남은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건축기술의 명성이 조금도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악사라이 속의 계단을 따라 꼭대기로 올라가면 계단은 목재를 사용했다.

하지만 600년이 지났는데도 조금도 썩지 않았다.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 보면 샤크리잡스를 넘어 끝없는 평원이 펼쳐진다.

악사라이의 건축에는 터키, 인도, 이란 등 속국이 된 나라들에서 유능한 장인들이 모두 참여하였다고 한다.

악사라이는 비단 우즈벡의 한적한 도시, 샤크리잡스에 있을지라도 이 건물은 명실 공히 15세기 세계 건축기술의 바로미터인 것이다.

만약 너희들이 우리의 힘을 의심하면, 이 건축물을 봐라.” 14세기 중앙아시아의 풍운아 아미르 티무르의 호기 어린 말이다.

이 문장은 그의 고향인 샤흐리 사브즈에 남아 있는 악사라이 궁전의 정문 벽에 새겨져 있다.

티무르(1336~1405)는 몽골족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몰락한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족 간의 항쟁과 약탈에 참가해 세력을 키우며 두각을 나타냈다.

칭기즈칸의 자손을 명목상 최고 지위인 ‘칸’으로 옹립하여 꼭두각시로 만들고

자신은 ‘아미르’ 칭호를 달아 실질적으로 최고 권력을 누렸다.

1385년 동부 페르시아의 모든 지역을 손에 넣고 이어서 지중해 연안까지 영토를 넓혔다.

1398년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의 델리를 점령해 대제국을 건설했다. 지금도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부하라에서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 사마르칸트로 가는 길목에 있는 샤흐리 사브즈는 상술의 달인이었던 소그드인들의 옛 도시였다.

7세기에는 서유기의 현장법사도 인도로 가는 도중에 들렀다고 하나 뭐라 해도 그 조그만 마을을 역사에 기록되게 한 것은 그곳에서 태어난 티무르의 존재다.

세계적인 제국을 구축한 후에도 그는 고향을 잊지 않고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에 결코 뒤지지 않는 거대한 건축물을 차례로 건설했다.

‘녹색 도시’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이 불린 것을 보면 그 당시 오아시스 도시로서의 풍요로움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그가 죽고 난 후 번영을 시기한 이웃 도시 부하라의 칸에 의해 티무르제국이 남긴 건축문화의 존재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렸다.

오늘날의 샤흐리 사브즈는 둘러보면 지난날의 화려함이야 찾을 수 없어도 조용한 옛 성터에는 장대한 역사가 숨겨져 있다.

이 도시의 중앙지점 광장에는 티무르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다. 뒤편으로 그가 남긴 가장 큰 건조물인 악사라이 궁전 잔해가 남아 있다.

이 궁전은 1380년에 착공되어 티무르가 죽은 해인 1405년까지 건설이 계속됐다.

현재는 정문 입구의 아치형 기둥 두 개만 반쯤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다.

악사라이는 백색의 궁전이라는 의미이나 실제는 푸른색과 황금색의 타일로 장식된 궁전이었다.

하얀색은 고귀함이라는 의미가 있어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현재 두 기둥의 높이는 38m인데 원형 아치 부분이 무너지기 전에는 50m 이상이었다.

이 아치문의 왼쪽 기둥 중간에 아랍어로 ‘술탄(왕)은 알라의 그림자다’라는 글씨가 쓰여 있으나

오른쪽 기둥에는 ‘술탄은 그림자다’라고 잘못 썼다고 한다. 물론 술탄은 티무르를 말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건축가는 이 잘못으로 아치의 꼭대기에서 떨어뜨려지는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이 정문 아치로부터 남쪽으로 대리석이 깔려 있고 정원수 등으로 가꾸어진 광장이 펼쳐진다.

궁전의 위치는 현재 티무르의 동상이 서 있는 부근에 있었다.

처음에는 티무르의 여름 궁전으로 사용될 예정이어서 후궁들을 머물게 하고 옥상에는 풀장 시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샤흐리 사브즈는 원래 케슈라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초창기의 티무르는 그곳에 부친의 거대한 묘와 성벽을 건설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쿠르트조를 정복하고 나서는 그 나라의 수도인 헤라트의 성문을 그대로 옮겨와 악사라이 궁전 성문으로 이용했다.

중앙아시아의 맹주가 된 티무르는 이처럼 고향 마을인 케슈 즉 샤흐리 사브즈에서만 활발한 건축 활동을 전개했다.

이를 보면 티무르는 그곳을 자기 나라의 중심으로 만들 예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서아시아 및 남러시아의 원정에 성공하고 거대한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따라서 티무르는 입지 조건이 부족한 샤흐리 사브즈보다 실크로드의 중요한 중개지인 사마르칸트를 건설 활동의 중심으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까지 국제도시로 유명한 사마르칸트와 역사의 뒤안길에 서 있는 샤흐리 사브즈의 운명은 그때부터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전쟁의 달인 티무르는 왜 이토록 도시 건설에 집착한 것일까.

그것은 도시가 갖는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인식했거나 이슬람 국가로서 신자들에게 모스크와 마드라사 등 종교적 환경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막대한 부와 강한 권력을 과시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는 것이 최적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샤흐리 사브즈의 경우 방대한 면적의 궁전은 모두 없어지고 정문 아치 기둥 두 개만 달랑 남아 있다.

이 궁전 잔해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역사의 속 깊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악사라이 궁전은 푸른색과 황금색의 타일로 장식되었으나 지금은 상처투성이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티무르 시대를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 재미있다.

 

 

 

악 사라이 궁전 복원도

파괴된 궁전의 복원도

 

 

그늘에서 수제품들을 만들어서 팔고있다.

 

 

 

 

 

 

벌집구조모양으로 붙여졌던 타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