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 사용하는 재료가 다양해지고 그 생산 방법 역시 현대화되다보니 그 명성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경상북도 봉화(奉化)의 춘양면(春陽面)은 한반도 최고의 목재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춘양에서 생산된 금강(金剛) 소나무는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아무나 구할 수는 없었고 궁궐이나 관청, 지체 높은 양반의 집을 건축할때나 사용이 가능했다.
조선 후기 봉화군 춘양면에 강용(姜鎔, 1846~1934, 호 : 만산(晩山))이 건립한 만산고택은, 그런 춘양목을아낌없이 사용한 집이다.
지은 지 벌써 130년이 지났건만 이 집이 여전히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만산고택의 올곧음이 비단 겉에 보이는 부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기울어진 국운을 걱정하며 여러 문인들과 학문을 교류한 칠류헌(七柳軒)은 굽힐 줄 모르던
선비들의 기개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내부배치도
고고함과 부드러움, 그 아름다운 조화
만산고택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 하나는 편액이 많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더 없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분위기를 뽐내는 정원이 있다는 점.
실제 만산고택에서는 여기저기 오래 전부터 자리를 잡아온 편액들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 강용 할아버지의 선대께서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高宗)의 아버지 흥성대원군(興宣大院君)과 친분이 두터우셨어요.
대과에서 장원급제를 하신 후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과 언론기관인 사간원(司諫院)에서 요직을 두루 맡았던 어른이셨는데,
강용 할아버지께서 태어나셨을 때 흥성대원군이 직접 만산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손수 글씨까지 써주었다고 합니다.” 라고
강용의 고손자이자 현재 집주인인 강백기(姜百基) 씨는 말한다.
조용하고 온화한 집이라는 뜻의 ‘정와’는 당대의 서예가로 이름을 널리 떨쳤던 강벽원(姜壁元) 선생의 글이고,
본심을 잃지 않도록 착한 마음을 기른다는 의미의 존양재는 항일 독립운동인 3.1운동을 이끈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글이라고한다.
‘차군헌’은 조선 후기 서예가인 권동수(權東壽)의 글씨로 ‘차군(此君)’은 대나무를 예스럽게 부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현판 못지않게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앞서 언급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정원이다.
정원을 가꾸는 안주인은, 손질을 많이 해 인위적인 모양을 잡기보다,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크도록 배려한 마음이 엿보인다.
그래서 담쟁이가 담을 넘고 수풀이 안채 대문 옆에 우거져도 모두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봉화 만산고택 사랑채
봉화 만산고택 문간채
굽이굽이 돌아 들어가는 안채와 사랑채
봉화 만산고택 사랑채
대부분의 주택이 사랑채를 남향으로 하는데 비해 만산고택 본채의 사랑채는 동향이고 안방이 남향으로 되어 있어, 그
결과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북쪽으로 나있다.
이로 인한 찬바람을 막기 위하여 중문이 안마당과 직접 연결되지 않도록 한 번 꺾음으로써 외부로부터 시선과 찬 공기를 차단한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고 사랑방 오른쪽에는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다.
사랑마루 뒤편에는 작은사랑방과 뒤쪽에 딸린 작은 방인 골방이 있다.
작은사랑방 뒤편으로는 중간방이 있고, 안채 부엌과 연결되어 있는 골방은 사랑채와 안채의 통로 역할을 한다.
사랑채 오른쪽의 감실 뒤편으로 난 중문을 통해서도 안채로 출입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1800년대 이후의 주택 중 봉화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봉화 지역의 ㅁ자 주택은 이 지역의 추운 겨울철에 대비하기 위해 건물을 완전히 폐쇄할 수 있다는 점과
수납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툇간이 발달한 점이 특징.
이 툇간은 공간적으로는 수납을 하고 에너지 사용 측면에서는 아파트 베란다처럼
외부의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또한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을 시각적으로 차단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중문을 닫으면 외부에서 안채의 살림을 전혀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안채는 사랑채 뒤편과 이어져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고, 안대청 왼쪽에는 안방이 세로로 길게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방 앞쪽으로는 부엌과 중간방이 연결되어 있고, 안채의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봉화 만산고택 사랑채
당당한 솟을대문, 따뜻한 대청마루
솟을대문은 집안의 위세를 나타내는 상징 중 하나.
현대의 청와대 비서실장 격인 정3품 당상관 이상만 가질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권세 있는 집안임을 알리는 동시에 고택에 수레가 드나들 정도로 재산이 많은 집임을 자랑하기도 했던 것.
춘양면에 소재한 부유한 집이라 그런지 만산고택의 솟을대문은 부재(部材)가 매우 장대하며 사용된 목재 역시 양질이다.
봉화 만산고택 칠류헌 대청
만산고택의 또 하나의 특징은 솟을대문 옆의 행랑채에 속해 있는 대청마루.
주로 하인이 거처하는 행랑채에는 외부로 돌출된 공간이 없는 반면
이곳 만산고택에는 잡다한 일을 맡아 하던 사람들에게 잠시 쉬거나 접객할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된 것이다.
이 집을 지은이의 실용적인 사고와 아랫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영친왕의 글씨가 걸린 서실
바깥마당 왼쪽의 서실은 원래 온돌방과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방으로 개조해 숙박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서실에 걸려 있는 ‘글로 맺은 좋은 인연’이라는 뜻의 ‘ 한묵청연(翰墨淸緣)’이란 글씨는
고종의 아들 영친왕(英親王)이 8세 때 썼다고 한다.
우국지사가 모여든 칠류헌
봉화 만산고택 칠류헌
봉화 만산고택 칠류헌 대청
별당인 칠류헌은 팔작지붕을 얹고 있는 건물로, 본채에 비해서 매우 큰 규모를 자랑한다.
왼쪽에는 창고인 광이 있고 오른쪽에는 온돌방과 대청이 연결되어 있다.
온돌방 뒤편에는 골방이 있고, 대청에는 짧은 판자를 가로로, 긴 판자를 세로로 놓아 만드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위로 올려서 천장에 걸 수 있도록 만들어진 분합문을 열면 40~50명도 충분히 앉을 만한 공간이 된다.
본채의 규모가 작아서 사랑채만으론 외부 손님들을 맞기엔 좁았기 때문에,
사랑채는 주인이 거처하는 장소로만 삼고 따로 칠류헌을 지어서 외부손님들과 교제하는 장소로 삼았다.
칠류’는 두 가지 의미가 조합된 단어인데, ‘칠(七)’은 천지가 월화수목금토일을 따라 돌아오듯
조선의 국운이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차용했고 ‘류(柳)’는 우국충신이었던 중국 송나라 시인 도연명이
자신의 집 주위에 충성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은 옛 이야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즉 수백 년이 흘러도 변함없는 춘양목을 사용해 오직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공간을 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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