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경찰서장으로 근무중이던 1968. 1. 21. 22시10분경 “CIC대원이라는 거동 수상자 30여명이
세검정에서 자하문쪽으로 도보 행진 중인데 검문에 응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
타격대 출동명령과 동시, 현장으로 달려가 괴한들의 앞을 가로막자 “우리는 CIC부대원들인데 훈련갔다 오는 길이다”고
소리치며 계속 밀고 내려오자 “나 종로서장인데 도대체 누구냐?”고 고함치면서 완강하게 진출을 막았다.
이때 괴한들이 최서장의 멱살을 움켜잡으려 하자 현장에 있는 대원들에게
괴한들을 무조건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는 순간 뒤쪽에서 연이어 총소리가 나자
최서장과 맞서고 있던 괴한 1명이 뒤로 물러서며 외투 속에 숨겨둔 기관단총을 난사하여
최서장은 왼편 가슴에 3발을 맞았으나 권총으로 응사하면서 전투지휘를 하다 전사하였다.
서울 성곽의 끝에 창의문(彰義門)이 서있다.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 불리는 곳이다.
창의문(彰義門),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의를 드높인 문이 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광해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궁궐로 진입했다고 한다.
1623년(癸亥) 능양군(陵陽君)을 옹립하려는 의군(義軍)들이 창의문 북쪽 세검정에서 칼을 씻어 결의를 다진 다음
이 문으로 들어가 거사에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창의문 누각 안에는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 명단을 적은
‘계해거의 정사공신(癸亥擧義 靖社功臣)’ 현판이 걸려 있다. 이때 1등 훈작을 받은 사람이 김류(金瑬)와 이귀(李貴) 등이다.
누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1740년(영조 16)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 다시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사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대문 중에는 동대문인 흥인지문만이, 사소문 중에는 북소문인 창의문만이 오리지널인 셈이다.
창의문의 누각을 내려와 1층 석축을 살펴본다. 홍예 위쪽으로 물받이에 해당하는 누혈(漏穴) 장식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연꽃 모양으로 위쪽을 향하고 있으니 앙련인 셈이다. 그리고 홍예의 상단부 한 가운데는 새가 지네를 잡아먹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 새를 봉황이라고도 하고 닭이라고도 하는데, 창의문 주변 산에 지네가 많기 때문에 새겨 넣었다는 얘기도 있고,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새겨 넣었다는 얘기도 있다.
창의문을 그린 그림으로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창의문이라는 화제가 붙은 그림에 보면 소나무와 바위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고갯마루에 문루가 하나 보인다.
문루 오른쪽 위로 ‘창의문 겸재’라는 명문이 분명하다. 겸재 정선이 삼청동 또는 효자동 쪽에서 바라본 창의문의 모습이다.
창의문 뒤 왼쪽으로는 검은색으로 웅장하게 바위봉우리가 표현되어 있다. 벽련봉(碧蓮峰)이다.
그 위에 작고 동그란 바위가 하나 굴러 떨어질 듯 얹혀있다. 이 바위가 부침바위(付巖)이며,
그 때문에 이 동네 이름이 부암동이 되었다고 한다. 부암동은 현재 창의문 북쪽지역을 말한다.
북쪽에서 바라본 창의문
여기부터 부암동 주택가 골목이 이어진다
서태후가 즐겨 먹던 만두 "천진포자"와 "마마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거리 모퉁이에 커피 상점 클럽 에스프레소가 있다.
세계 35개국의 커피를 취급하는 로스트 전문점인데, 국내 최초로 커피 아카데미를 열었던 마은식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대학로에 1990년 커피전문점을 오픈해 당시에는 생소했던 에스프레소를 선보였었는데 2001년 부암동으로 이전해왔다.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창가 옆에 이름표를 붙이고 줄지어 놓여진 시음용 커피포트들을 볼 수 있다.
작은 종이컵에 다양한 커피를 시음해보는 재미 또한 그만이다.
'커피 중독자 시리즈'라는 제목의 이벤트에는 다소 장황한 문구가 적혀 있다.
한국지방재정공제회의 옥외광고센터에서 작년 7월의 최우수작으로 선정한
서울시 부암동에 위치한 ‘오솔길 몽’s 키친에‘ 시민이 뽑은 아름다운 간판’ 인증패를 주었다.
시민과 전문가에 의해 최우수 간판으로 선정된 ‘오솔길 몽’s 키친’ 간판은
LED보다 더 친환경적이고 무전(無電)형인, 우리 정서에 부담 없는 페인팅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창의성이 높으면서도 전달력이 뛰어난 간판으로, 상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
주변 분위기를 돋보이는데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69년 오픈 이래로 옛날 수작업 방식으로 떡을 뽑고 있는 완소 떡집 종로구 부암동 동양방아간이 부암동의 새벽을 여는 집이다.
정원이 있는 퓨전 한정식집 "소소한 풍경"
소설가 "이상"의 전 부인이자 화가 김환기의 부인인 필명 김향안(본명 변동림)여사가 92년 11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건립,
김환기의 기획전및 출판 세미나등의 사업을 펼쳐왔다. 그녀는김환기 그림의 지평을 전 세계에 넓힌 "김환기 미술"의 완성자이기도 했다.
"우리 같이 죽을까?" "우리 먼 데 갈까?" 시인 이상(1910~1937)은 요절하기 1년 전
친구 변동욱의 동생 변동림에게 청혼하면서 이런 말을 건넸다.
이화여전에 다니던 변동림(1916~2004)은 이상을 따라 훌훌 집을 나섰고
두 사람은 서소문 밖 개울이 흐르는 언덕 아래 단칸방에 허름한 신혼살림을 차렸다.
신혼은 길지 않았다. 이상이 일본으로 떠난 9월까지 석 달 남짓 이어졌을 뿐,
그 이듬해 이상은 일본 도쿄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수필가 변동림은 그로부터 7년 뒤 그의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바꿨다.
현대미술의 거목 김환기(1913~1974)를 만나 재혼할 때 그가 내건 조건이기도 했다.
"내게 향안이라는 아호를 줘요. 그러면 변동림이 아니라 김향안이 되어 평생 환기 씨를 위해 살게요."
이 다짐처럼 김환기와 변동림은 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4년 결혼식을 올렸다.
향안이라는 아호를 부인에게 준 뒤 김환기는 수화라는 아호를 새로 썼다.
재혼할 당시 수화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전남 신안군 안좌도 지주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1932년 집안에서 맺어준 여인과 스물이 되기 전 결혼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고대하던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고
결국 부친이 숨을 거두자 그는 아내와 이혼했다.
그 뒤 2년 만에 변동림을 만나 당시로서는 과감한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미술계 어른 고희동이 주례를 서고,
문인들 상당수가 예식에 참석했다. 김향안은 흰 드레스를 입으며 신여성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변동림이 김향안이 되는 과정을 복원한 책이 나왔다. `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김환기의 전기다.
예총 초대 미협 이사장, 홍익대 학장이던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ㅡ1974 新安)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 김환기(1913~1974)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환기미술관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전을 기획했다.
한국적 서정주의를 바탕으로 독창적 예술 세계를 정립한 김환기는 한국은 물론 일본, 파리, 뉴욕에까지 그 이름을 알린 인물
김환기는 백자 항아리에서 조선의 정서와 정신을 발견하면서 적극적으로 수집에 나선다.
백자의 발견은 그가 새로운 작품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미술관에서 바라다 보이는 꽃이 많이 핀 집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착상을 얻은 대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는
고국과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향수를 예술로 승화시킨 그의 대표작이다.
저녁에
김 광 섭
이렇게 많은 중에서
별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 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수화 김환기(1913~1974)는 왜 항아리를 그리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항아리가 우리 민족의 진정한 예술이라고 생각했기에 조선인으로서 항아리를 그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호: 수화(樹話). 전남 신안 출생. 1936년 니혼[日本]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1940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아방가르드 연구소를 조직하는 한편,
이과회(二科會)와 자유전(自由展) 등에 출품, 신미술(新美術:아르누보) 운동에
참여하였고, 8 ·15광복 후에는 신사실파(新寫實派)를 조직,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5년 이후 미국에 정착하여 작품활동을 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체적인 이미지 대신 연속적인 사각 공간 속에 점묘(點描)를 배열하였으며, 한국 근대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여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김환기 화백(1913-1974)의 유화 / 무제,백자와 자두나무’(28x42인치)가
2002년 당시 한국 작가로서 최고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
‘무제’는 당초 예상가 20만 달러의 4배를 넘는
82만5000달러(한화 약 8억 2천만원)에 낙찰됐다.
항아리와여인
초기 수업시대는 미술학교 재학시와 연구과 시절, 귀국하기까지의 몇 년 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과회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여 당시 일본 신감각파 대열에서 활발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광복 이후부터 프랑스로 건너가기까지의 청년시절은 한국적 모티프 발견으로
일관했다고 할 수 있다. 운학(雲鶴) ·달 ·산 ·나목(裸木) ·꽃 ·여인을 통해
한국적 풍류의 정서를 표출하려는 것이 이 시기의 지배적 경향이다.
한국적 모티프에 대한 탐닉은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9년 귀국하기까지의 파리시절에서도 농도를 더하였다.
약 10년간 미국에 있을 때에는 외견상 지금까지의 경향에 비해 많이 변모하였는데, .
우선 모티프 해소, 순화된 색감, 공간의 심화와 확대라는 특징으로 묶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실지로 작품상에는 어떠한 변모도 초래하지 않았으며,
작가 내면의 발전으로 여과시킨 심화현상일 뿐이다
피난열차
대표작으로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론도》《해와 달》 등이 있다.
한편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환기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세워져 1992년 개관되었다.
안좌면(安佐面) 읍동리(邑洞里)의 그의 생가는 지방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20세기 두 천재가 사랑한 여인
◇변동림과 이상의 만남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이다. 1916년 서울 “송현(松峴) 마루턱”에서 나고 자랐다. 부친은 구한말 일본에 유학 가서 의학을 공부한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첫 아내와 사별하고 변동림의 모친과 재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변동림은 모친이 마흔하나에 낳은 귀한 딸이었는데, 모친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자녀들도 흩어졌다. 변동림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잠시 도쿄에서 고학으로 불어를 공부한 후, 1935년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했다.
변동림이 이상을 만난 것은 친오빠 변동욱을 통해서였다. 변동욱은 당시 경성 예술가들이 모였던 ‘낙랑파라’ 카페에서 주로 음악을 선곡한 멋쟁이 지식인이었다. 이 다방은 공예가 이순석이 운영하던 곳으로, 변동림의 회고에 의하면 변동욱과 ‘동업’을 했다고 쓰여 있다. 이 카페에 가면 늘 변동욱이 있었고, 문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했던 그는 문예계 네트워크의 핵심 인물이었다. 변동림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오빠의 카페에 들러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는데, 어느 날 이상이 그녀를 소개해 달라고 변동욱을 졸랐다. 둘은 그렇게 1936년 낙랑파라에서 처음 만났다.
◇“어떤 두 주일 동안”
스무 살 문학 소녀 변동림은 이상의 문학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실려 대중적 지탄을 받았던 이상의 시 ‘오감도’에 대해, 변동림은 이상의 천재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라 평가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불꽃이 일었다. 매우 지성적인 불꽃이었다. 이들은 영문학과 러시아 문학을 얘기했고, 베토벤과 모차르트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두 주일 동안 매일 만나 인적 없는 교외에서 나란히 걷기를 반복했던 모양이다. 이상의 유고 수필 ‘슬픈 이야기, 어떤 두 주일 동안’이 당시 정황을 가장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나는 이 태엽을 감아도 소리 안 나는 여인을 가만히 가져다가 내 마음에다 놓아두는 중입니다… 여인, 내 그대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리다. 죽읍시다. “더블 플라토닉 슈사이드(double platonic suicide·정신적 동반자살)인가요?” 아니지요. 두 개의 싱글 슈사이드지요… 여인은 내 그윽한 공책에다 악보처럼 생긴 글자로 증서를 하나 쓰고 지장을 하나 찍어 주었습니다. “틀림없이 같이 죽어 드리기로.”
변동림의 회고 글에는 “우리 같이 죽을래?”라는 말을 고백처럼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상의 수필 내용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방풍림 우거진 속으로 철로가 놓여 있는 길”을 걸으며, “사람은 하나도 만날 수 없는 황량한 인외경(人外境)”에서 이들은 밀회를 나누었다. 그리고 약속한 날 변동림은 집을 나왔다. 가방에 몇 권의 문학책과 외국어 사전만 달랑 넣고. 그렇게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랑이란 믿음이다. 믿지 않으면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 없다. 믿는다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거다. 곧 지성(知性)이다”라고 변동림은 썼다. 지성을 바탕으로 변동림과 이상은 매우 깊은 정신적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두 개의 싱글 슈사이드”를 각오한 것이다. 각자의 내면을 너무나도 깊이 파헤친 나머지, 아프고 잔인한 사랑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지 4개월 후 이상은 홀로 먼저 동경 유학을 떠났고, 거기서 1937년 4월 어이없이 생을 마감했다.
◇변동림에서 김향안으로
임종을 지키기 위해 변동림이 도쿄로 갔을 때, 이상이 마지막 소원으로 “센비키아(千匹屋·가게 이름)의 메론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메론을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죽은 이상을 위해, 변동림과 친구들이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때 김환기도 도쿄에 있었으니, 장례식에서 변동림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식으로 김환기와 변동림이 만난 것은 1940년대 초 서울, 일본인 시인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의 집에서였다. 어쩌면 김환기가 변동림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을지 모른다. 노리타케는 집에 두 사람을 초대해서 자연스러운 만남을 주선했다. 처음 변동림은 김환기에게 별다른 인상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동림의 마음을 흔든 것은 김환기가 고향 섬에서 서울로 꾸준히 보내온 ‘그림 편지’였다. 매우 다정다감한 글과 그림이었다. 김환기는 이상이 지녔던 자학적 성향, 신경증적 예민함을 대신해서, 훨씬 부드럽고 서정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다만, 조혼 풍습으로 일찍 결혼하여 세 명의 딸을 둔 채 이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김환기는 변동림에게 선뜻 고백할 처지가 못 되었다. 용기를 준 것은 변동림이었다. “열이면 어때? 데려다 교육하면 되지.” “대신 당신의 아호(어릴 때 부르던 이름)인 향안(鄕岸)을 내게 주세요.” 이렇게 해서 변동림은 김환기의 아호를 받아 김향안이 되었다. “같이 죽자”는 이상과의 사랑이 죽음을 맞은 후, 변동림은 김환기에게 “같이 살자”는 희망을 안겨주며,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났다.
◇김향안과 김환기, 서로를 지탱하는 힘
김향안은 당돌해 보일 정도로 당찬 여성이었다. 자신감과 대담성은 그 시대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경지였다. 김향안은 1944년 김환기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후, 1974년 환기가 뉴욕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년간 김환기의 생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내 예술이 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김환기를 위해, 1955년 김향안 혼자 먼저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다. 김환기의 작품 슬라이드만 달랑 들고서 말이다. 그녀는 소르본 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 다니면서, 불어와 미술사를 먼저 공부했다. 그리고 파리 화단의 주요 인사와 교제하여, 김환기의 아틀리에를 구하고 개인전 일정도 잡은 후, 김환기를 파리로 오게 했다.
김향안은 특히 루냐 체코프스카라는 화랑 주인과 친분을 쌓아놓았다. 다사스 거리에 마련된 김환기의 첫 아틀리에도 루냐가 구해주었다. 루냐는 모딜리아니의 친구이자 모델로, 2010년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에서 도난당해 더 유명해진 ‘부채를 든 여인’의 실제 모델이었다. 총 16점의 모딜리아니 초상화가 그녀를 모델로 했다. 루냐는 자신이 운영한 화랑에서 김환기의 파리 첫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이후 김환기는 파리에 체류한 2년 동안 5번의 전시회를 개최했고, 김향안은 화랑과 거래를 진행하고 통번역을 담당하며 매니저 역할을 자처했다.
김환기는 아내의 수고로움과 능력을 처음부터 매우 높이 평가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김향안의 신랄한 비평도 달게 받아들였다. 그뿐인가. 환기가 그린 그림에는 온통 아내의 얼굴이 등장한다. 그가 쓴 편지, 엽서, 생일 카드에도 김향안을 향한 사랑과 신뢰가 물씬 넘쳐난다. 김향안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김환기를 위해, ‘화가의 아내’라는 일종의 직업 정신을 가지고 그의 성공을 지원했다고 할 수 있다. 뉴욕 체류 시절에는 백화점 판매원을 하고, 종일 글을 옮겨 적는 필사(筆寫)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이 ‘내조’라기보다 ‘서로 돕는 일’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들의 관계는 부부임을 넘어 ‘동지(同志)’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큐레이터, 수필가, 화가 김향안
1974년 김환기의 죽음도 갑작스러웠다. 목디스크를 치료하는 간단한 수술이라 생각하고 입원했다가, 수술 직후 뇌출혈로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 30년간 동고동락했던 이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김향안은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다”고 썼다.
김향안은 다시 30년의 삶을 혼자 살아낸 후 2004년 생을 마감했다. 그사이 김향안은 김환기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세계 유수 미술관에 김환기 작품이 소장되도록 했고,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지금은 국고로 살 엄두도 내지 못하는 대표작들을 기증했다. 환기재단을 설립해서 출판 사업을 벌이는 한편, 미술평론가와 작가를 후원하는 일도 했다. 무엇보다 김향안은 건축가 우규승에게 설계를 맡겨 환기미술관을 1992년 서울 부암동에 건립했다. 그녀는 스스로 큐레이터이자 미술관 경영자였다.
또한, 김향안은 평생 자신만의 시간을 쪼개어 수필가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파리와 뉴욕 시절 내내 꾸준히 수필을 써서 발표했고, 총 5권의 수필집을 출간했다. 그녀의 놀라운 재능은 ‘화가’로서도 발현되었다. 뉴욕 화실에 들어오는 햇살이 아까워 그림을 그렸다는 김향안. 그녀의 작품은 밝은 대낮의 빛에서만 감지되는 환한 색조의 섬세한 변주를 보여준다. 김환기와는 분명 다른 화풍을 구사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리움’의 정서만은 두 사람 작품에서 공통으로 흐르는 특징이다.
한편, 김향안은 시인 이상을 기리는 일에도 힘을 보탰다. 이상이 죽은 지 53년이 지난 1990년, 그의 시비(詩碑)를 건립하려는 논의가 한국에서 일어나자, 직접 사비를 들여 뉴욕의 조각가 한용진에게 제작을 맡겼다. 한용진 특유의 무심하기 그지없는 비석이, 그렇게 이상의 모교인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김향안의 대단한 점은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신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먼저 간 두 남편에게 보낸 진심 어린 신뢰만큼이나, 이들이 생산한 예술(문학이든 미술이든)의 가치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가졌다. 그 확신이야말로 김향안으로 하여금 과감한 결단과 끊임없는 도전을 가능케 한 힘이었다. 어떤 점에서 김향안은 세상이 예술가를 알아주지 않던 시대를 살아낸, 누구보다 선구적이고 용감한 예술 후원가였던 셈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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