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omestic travel/서울시내

2013.05.12 안평대군 집터

봉들레르 2013. 5. 15. 12:37

 

 

부암동 사무소

좁은 길에 반딧불 길이라고 붙여놓았다.

 

 

chocolate & pottery cafe

자하문 고개를 넘어 부암동 동사무소 옆 골목길로 한 이백 미터쯤 오르면, 작은 비석이 하나 놓여 있다. 현진건 집터

두 갈랫길 사이에 놓인 비석 뒤로 누군가 버린 합판과 낡은 세발자전거가 비스듬한 담 사이에 끼어 있다.

반은 무너졌고 반은 담쟁이덩굴에 의지하고 있는 담 너머 그곳은 빙허(憑虛) 현진건 집터다.

무성한 잡풀과 질척질척한 모래더미, 식수로 사용했을 것 같은 산비탈 아래 작은 우물, 샘물이 흘러내리는 도랑을 따라가면, 연못도 하나 있다.


종로구 부암동 325-2번지는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리얼리즘 기초에 큰 기여를 한 빙허(憑虛) 현진건(1900~1943)이 살았던 곳이다.

1936년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중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른 그는 이듬해 동아일보를 사직한다. 그는 출옥 후 이 집에서 생계를 위해 닭을 쳤었다.

그러다가 그는 친구의 꼬임에 빠져 미두(미곡을 이용한 투기로, 현물 없이 약속만으로 미곡을 사고 파는 일)를 하다가

재산을 탕진하면서 술과 가난 속에 빠지게 된다.

 

현진건(1900-1943)은 「운수좋은 날」, 「빈처」, 「술 권하는 사회」 등 우리나라 근대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대문학 초기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소설가이다.

「시대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역임한 그의 작품은 자전적 소설과

 민족적 현실 및 하층민에 대한 소설, 역사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끝내 친일 작가가 되기를 거부하며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 작품활동을 이어오다

이곳에서 제기동으로 이사 한 후,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터의 주인이었던 현진건은 대한제국 말기에 대구 우체국장을 지낸 경운(慶運 혹은 炅運)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빙허(憑虛). 1900년 8월 9일(음력) 대구 출생.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17년 일본 세이조중학(成城中學)을 졸업하고,

그해 귀국했다가 다시 중국 상하이로 가서 후장대학(?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1919년에 귀국했다.

당숙인 희운(僖運:필명은 현철(玄哲))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20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게 된 것도 그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1922년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박종화(朴鍾和) 등과 〈백조〉 동인이 되었고,

그해 직장을 종합시사지 동명사(東明社)로 옮기고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정건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200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3급)이 추서되었다.


사람이 살았던 빈 집터만큼 쓸쓸한 풍경이 또 어디 있을까. 가만히 서서 이른 시간에 벌써 저녁 어스름이 내린 곳을 둘러본다.

마당 한 켠에 베어진 은행나무 더미가 누렇게 말라있고 그 위에도 덩굴식물들이 자라있다.

어디쯤에 양계장이 있었던 걸까. 생계를 위해 양계를 했던 그는 찾아오는 문인들을 위해 닭을 잡았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글을 쓰다가 이 시간 즈음에 마당에 서서 마주 보이는 삼각산 봉우리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산책삼아 뒷문으로 걸어 나갔을 테고, 바로 옆 집 안평대군 이용의 별장으로 통하는 작은 계단을 서너 발짝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별장이 현진건 집터의 뒷문과 연결된 통로에 있다는 걸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역사의 현장으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안평대군이 꿈 속 무릉도원 자리에 정자를 세운 곳, 그곳이었다.

부암동 ‘무계정사’ 길은 안평대군이 바위에 새긴 ‘무계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감옥에서 출소한 뒤 동아일보 기자직에서 해직된 현진건이 가솔을 이끌고 이곳 부암동에 정착하여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어쩌면 안평대군의 답답함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현진건은 1937년에서 1940년까지 부암동에서 살았다.

4년 동안 현진건은 생계수단을 위해 이곳에서 양계를 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무영탑』을 연재하였고,

신문연재를 했던 장편소설 『적도』를 간행하였고, 강제로 중단된 미완의 역사소설 「흑치상치」를 발표하였다.

현진건은 부암동에서 이전에 썼던 「빈처」 「B사감과 러브레터」 「운수좋은 날」과 같은 사실주의 소설과는 다른 역사소설을 썼다.

그는 왜 부암동에서 역사소설을 썼을까. 그리고 그는 왜 부암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던 것일까.

문인들은 왜 그가 살았던 이전과 그 이후 집보다도 부암동 집을 기억하고 회고하였던 것일까.

부암동과 현진건의 인연에는 4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식민지 말기의 시대 상황이 스며들어 있다.

  장편소설 『적도』의 주인공 여해처럼 대상 잃은 열정을 승화시키지 않는다면 악해지는 자신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암동은 그의 소설 속에 없다. 「희생화」의 누이가 사랑을 나누던 남산이나 사직골과 광화문의 어둠처럼,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인력거를 끌던 비오는 남대문 정거장이나 인사동처럼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부암동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부암동에 살았던 그의 삶의 절박성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장편소설 『적도』일 것이다.

『적도』는 역사소설을 제외하고 현진건이 쓴 마지막 소설이다. 『적도』에서 현진건은 실패한 사랑의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대상 잃은 열정만큼 처치 곤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적도』는 경성의 부유한 실업가에게 첫사랑 영애를 뺏긴 여해가 오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까지 하고 출소하던 이른 봄날,

남산과 서대문 형무소 주변의 독립문 풍경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서울의 봄은 눈 속에서 온다’로 시작되는 『적도』에는 마음의 정절을 지키며 독립운동가인 ‘백년낭군’을 기다리는 기생 명화,

실패한 사랑이 모욕이 되는 걸 지켜보는 영애, 여해의 복수로 희생되는 영애의 시누이 은주,

 이들의 삼각관계가 식민지 경성을 중심으로 돌고 돈다. 그러나 『적도』에도 부암동은 없었다.

『적도』는 현진건이 독립운동을 했던 셋째 형 정건이 3년 옥살이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다음해 형수의 자살을 겪은 후에 쓴 소설이다.

기생 명화의 ‘백년낭군’ 김상열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느라 폐병이 생겼고,

그들의 사랑을 위해 여해는 병든 상열을 대신하여 폭약을 가지고 경찰서에서 자폭한다.
 
식민지 청년의 순수한 사랑은 감옥에서 모두 썩어버렸고 대상 잃은 위험한 열정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 열정은 스스로를 태우고 타인을 태우는 것으로 변질되지만,

여해의 우울한 열정을 두고 기생의 애인인 독립 운동가는 무쇠와 같은 열정을 개인의 감정에만 쓰지 말 것을 부탁한다.

식민지 청년과 기생의 성인식과 같은 장편소설 『적도』 이후 현진건은 현실을 소재로 한 소설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신라 경주를 부암동으로 옮겨온다.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무영탑』은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현진건은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 얽힌 당나라 석공과 누이의 이야기를 백제 석공과 아내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바꾸었다.

역사소설에서 역사보다는 창작이라는 예술성에 의미를 둔 현진건은 미완으로 끝난 「흑치상치」도 부암동에서 썼다.

백제 장군 ‘흑치상치’가 의병을 일으켜 당나라 장군 소정방에 항거하여 백제성을 회복했던 사실을 소재로 한

「흑치상치」는 총독부 경무부의 말썽으로 게재가 금지 되었다.

 

  이런 곳에서 회사생활을 하면 일이 잘 되겠다.

  길을 가로질러 누운 소나무

150년 되었다는 소나무가

 

가정집으로 들어가서 정원수가 되었다.

앞집 소나무가 담을 넘고 길을 건너 내 집에 가지를 뻗자 집주인이 지지대를 놓아 주었다.

소나무가 들어간 집 장승들

안평대군 이용 집터는 세종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별장으로,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武溪洞)에 있었으며,

무이정사(武夷精舍)라고도 하였다. 세종 29년(1447) 4월 20일 안평대군이 꿈에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노닐었던

도원(桃源)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하여 완성된 작품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그림에 나타난 장소를 찾아 이곳에 당도하여 여기가 꿈 속에서 본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라 하고

정자를 세워 글을 읊고 활을 쏘며 심신을 단련하였다고 한다.


이 정사는 효자동에서 자하문고개를 넘어 부암동사무소를 끼고 돌아 올라가면 오른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 앞면 윗부분 가운데에 안평대군의 필적으로 알려진

'武溪洞(무계동)'이란 글씨가 큰 현판 모양으로 옆으로 음각되어 있다.

바위를 오른쪽으로 끼고 바로 맞은편 언덕에는 원래 안평대군의 집터라고 추정되는 곳에 'ㄱ'자 모양의 건물이 동남향을 하고 서 있으며,

정사 앞으로는 멀리 북악산 줄기가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두벌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건물로,

오른쪽 끝에서 전면으로 1칸 반이 꺾여 나와 돌출되었다.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안평대군은 1452년 단종 즉위 후 이징옥(李澄玉) 등을 시켜 함경도 경성(鏡城)의 무기를 서울로 옮기고

이곳에서 장사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하며 무력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이곳은 당시 사람들이 '흥룡지지(興龍之地)'라고 말하였던 곳으로, 이는 곧 왕이 나올 역모의 땅으로 간주되었음을 뜻한다.

안평대군은 단종 원년(1452)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 실권을 박탈당하고,

이듬해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일 때 역모로 몰려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교동(喬桐)으로 옮겨져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시문·서·화에 뛰어났으며, 이곳으로 문인들을 초빙하여 시회(詩會)를 여는 등 풍류를 즐기며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안평대군이 죽은 후 이곳도 폐허가 되고 말았다. 안평대군은 영조 23년(1747)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안평대군 집터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 두루마리, 비단에 연한 색, 38.7×106.5㎝, 일본 텐리대학 도서관

안평대군이 꿈에 무릉도원에서 노닌 광경을 안견에게 말해 그가 3일 만에 그린 것이 천하의 걸작 '몽유도원도'다.

어떻게 이야기만 듣고 3일 만에 그렸을까. 바로 이곳이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웠으니 그냥 그리면 됐다는 얘기다.

1970년대만 해도 이곳에는 자두밭과 능금밭이 많았다.

그 골목을 더 올라가니 옛날에는 집터였을 곳에

지금은 채소밭이 되었다.

골목 끝에는 철문이 닫혀있다.

소나무에 둘러싸인 가옥들

 

‘몽유도원도’에는 안평 대군 죽음이 예언돼 있다

 

“그대가 내 꿈을 그려줘야겠어.” 안평대군이 말했다. ‘대군의 꿈을 제가 그리란 말씀이시옵니까?’ 하려다가 안견은 입을 다물었다.

안평대군의 얼굴 위를 설핏 지나가는 어둠을 보았기 때문이다. 안견은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 들떠서 무릉도원을 얘기하던 사람한테 그 어둠은 가당치도 않아 보였다. 헛것을 보았으리라.
“그리하겠습니다.” 안견은 몹쓸 생각에 사로잡혔던 스스로를 부인하듯 결기를 담아 대답했다. 스물아홉 한창 나이가 아닌가.

대군 같은 사람에게 어둠이라니. 안견이 일어섰다.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때였다.

몸을 돌려 막 방문을 열려고 하는 찰나 등 뒤에서 안평대군이 꿈에 취한 듯 몇 마디 더듬거렸다.
   

 “이상한 일이로다. 하고많은 사람들이 내 집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리거늘 꿈속에서는 어찌 두어 사람만 동행하게 되었을꼬….”
  신음처럼 내뱉은 그 말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었음을 안평대군은 알지 못하였다. 1447년 음력 4월 20일, 다음날이었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그대가 마치 꿈을 꾼 것 같구먼…. 어찌 이리 정확하게 그렸단 말인가. 역시 그대는 신필(神筆)이야.”
   
 안평대군은 벌써 몇 차례나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안견이 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사흘 만에 완성해서 들고 간 그림 앞에서였다.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치자마자 험준한 바위 사이로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꽃밭이 곧바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과감한 구도였다.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칠 때마다 그림의 세계가 서서히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을 감상하려는 사람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려는 의미도 있거니와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구조처럼

그림도 이야기를 담아 전개시키려는 의도에서다. 
   
 그런데 이 그림은 전혀 뜻밖이었다. 서론이 생략되고 바로 본론이 펼쳐졌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오솔길을 지나고 골짜기를 건너 한참 만에야 도달했던 복숭아꽃밭이 그림을 펼치자마자 한눈에 들어왔다.

‘산벼랑은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은 빽빽하여 시냇물이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듯’한 신선세계가 눈부시게 출렁거렸다.

그곳에 지금 복숭아꽃이 한창이다. 안개 속에 푹 잠겨 언뜻언뜻 고개를 내민 꽃잎은 연분홍색 위에 금채(金彩)를 더하여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침식된 듯한 바위에 둘러싸인 꽃밭을 부감법(俯瞰法·위에서 밑을 향해 내려다보듯 그리는 기법)을 써서 한눈에 들어오게 한 구도도 뛰어나다.

꽃밭 아랫부분의 바위를 과감하게 낮춰 감상자의 시선을 가리지 않게 한 발상도 효과적이다. 
   
 환상적인 꽃밭에서 눈길을 거두어 왼쪽으로 향하면 두 팔을 벌린 듯한 기암괴석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복숭아 꽃밭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여기를 나가면 현실세계입니다. 이 문을 나서는 순간 당신이 꿈꾸던 아름다운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가시겠습니까?” 
   
 그 말을 뒤로 하고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 평범한 야산이 납작 엎드려 있다.

화려한 꽃도 기괴한 암벽도 사라진 언덕 같은 낮은 산이 비루하게 드러누워 있다. 드디어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조선 초기의 문화 수준 가늠자
   
 꿈에서 깨어난 순간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안평대군의 꿈이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근거로 했다는 것을. 얘기는 이렇다.

무릉에 사는 어부가 강물 위로 떠내려오는 복숭아꽃을 보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근심 걱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곳은 복숭아꽃이 가득 피어있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어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그곳에서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부는 슬그머니 집 생각이 나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바깥세상에 나가더라도 이곳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청했다.

어부는 약속을 어기고 그곳을 나올 때 곳곳에 표시를 해두었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가 보니 도원(桃源)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는 당시 글줄이나 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붓을 들어 사흘 만에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문화적인 바탕 위에서 가능했다.

그림의 출처는 도연명의 글이었다. 그러나 안견은 도연명의 글이 아니라 안평대군의 꿈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몽유도원도’에는 여타의 ‘도원도’에 보이는 어부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말을 타고 돌아다닌 복숭아꽃밭이 강조되었다.

한참을 두 사람이 ‘몽유(夢遊)’하다 나중에야 최항과 신숙주를 만났던 복숭아꽃밭, 도원이었다.
   
본질을 꿰뚫어볼 줄 아는 안견의 탁월함에 감탄을 거듭하던 안평대군은 이 그림을 3년 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붓을 들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라는 제목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신숙주, 김종서, 정인지, 박팽년, 최항, 성삼문 등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22명 학자들의 시를 덧붙였다. 이로써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한 작가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단순한 예술작품을 넘어

그 시대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귀한 보물이 되었다.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그런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열흘을 계속 피어있는 꽃이 없는 것처럼 안평대군의 삶의 꽃도 오래가지 못했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둘째형인 수양대군과의 정쟁에서 꺾여 서른다섯 해를 마지막으로 꽃잎처럼 떨어졌다.

그렇게 속절없이 생짜로 떨어질 사람이 어찌하여 화려한 꿈을 꾸었던고. 그가 꿈꾸었던 무릉도원 같은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이 지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이상향이었을까. 하고많은 꽃 중에 굳이 복숭아꽃을 보게 된 것도 안평대군의 몽상적인 취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꽃잎 위에 구르는 이슬만 먹고 살기에는 안평대군의 꿈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냉철한 이성을 지닌 수양대군의 눈에는 안평대군의 풍류야말로 나라 말아먹기에 딱 좋은 풍류가의 작태로밖에 판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수양대군의 입장에서는 꿈만 꾸는 동생이 반석 위에 올려놓은 왕조의 기둥을 무너뜨리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으리라.

한 사람의 헛된 꿈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면 그 죄는 죽어 마땅했다. 이것이 바로 안평대군이 꿈속에 노닐던 복숭아꽃밭에서 숨을 거둔 이유였다.

안견에게 복숭아꽃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 꽃밭이 바로 자신의 ‘수목장(樹木葬)’을 치르게 될 장소라는 것을 안평대군은 알지 못했다.

뇌쇄적인 꽃잎이 자신의 주검을 덮어줄 명정(銘旌)이라는 것을. 
   
 ‘몽유도원도’를 보고 찬탄의 시를 썼던 사람들도 양쪽으로 갈라졌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정적을 처단하던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과 함께 죽임을 당했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는 안평대군의 사후에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정인지와 신숙주는 수양대군 편에 서서 승리자의 영화를 마음껏 누렸다.

조금만 날씨가 더워도 쉽게 상하는 녹두나물을 일컬어 ‘숙주나물’이라고 비아냥거리게 된 내력도 신숙주 같은 변절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나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오늘밤은 또 무슨 꿈을 꿀까. 나의 꿈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꿈인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꿈인가.
조정육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