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India(2012,Jan)

인도영화 "워터(Water)"

봉들레르 2012. 7. 5. 09:43

▲ 영화 [워터] 포스터

2005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던 영화 <워터(Water)>는 식민지시대 말기, 성스러운 갠지스 강변에 자리 잡은 고도(古都) 바라나시를 배경으로 홀어미들의 기구한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결혼식에 대한 기억조차 없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결혼했던 ’쭈이야’는 일곱 살에 남편을 잃게 된다. ‘과부’가 된 쭈이야에게 처음으로 일어난 일은 양쪽 팔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부숴버린 것.

인도 여성치고-심지어 길에서 구걸하는 거지까지도- 팔찌와 반지, 귀고리 등을 주렁주렁 걸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제 쭈이야는 죽을 때까지 어떤 장신구도 몸에 걸칠 수 없다. 긴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고, 번득이는 면도날이 남은 머리카락을 깨끗이 밀어낸다. 이것은 그녀가 평생 바꿀 수 없는 헤어스타일. 지금까지 입었던 붉은색 옷을 벗고, 평생 걸치고 살아야 할 흰색 사리를 입는다.
 
남편의 장례 절차가 끝나자 쭈이야는 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바라나시 뒷골목 ‘과부촌’에 맡겨진다. 그곳에는 다양한 캐릭터와 연령대의 홀어미들이 모여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홀어미들이 생계를 위해 하는 주된 일은 사람들의 출입이 많은 사원 입구에 앉아 단체로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하며 구걸을 하는 것이다. 삭발을 하고 흰 사리를 입은 홀어미들은 다른 거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쭈이야는 하루 한 끼의 거친 밥을 먹고, 구걸을 하며 홀어미로서의 생존 방식을 알아간다.

 

‘과부촌’에서 살아가는 홀어미들의 다양한 캐릭터는 그네들의 단조롭고 억압된 삶의 여러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자나 깨나 단 과자가 눈앞에 아른거린다는 늙은 홀어미 ‘부아(고모)’는 늘 괴롭다. 홀어미에게 단 과자를 먹는 것은 금지된 소망이기에. 매일 사원에 가서 기도하고 브라만 사제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고 성수를 뿌리는 봉사를 행하는 ‘샤꾼딸라’는 힌두 성전이 가르치는 대로 과부로서의 죄를 씻기 위해 철저한 자기부정의 삶을 이어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과부촌’의 대장 격인 ‘마두’는 홀어미에게는 금지된 자그마한 호사를 즐기는 특권을 누리고 산다. 다른 홀어미들이 헛간 같은 방에 다닥다닥 붙어 새우잠을 잘 때, 마두는 독방에서 작고 낡았지만 침대에서 잠을 잔다. 거친 밥이나마 마두는 기(인도 전통 버터)를 듬뿍 넣어서 먹을 수도 있다. 이렇게 편한 잠을 자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인지 바싹 마른 다른 홀어미들과는 달리 마두는 푸짐하게 살이 올랐다. 사실 이렇게 살이 올랐다는 것 자체가 홀어미에게는 또 다른 죄악이다. 자신의 몸으로 즐겁게 해 주어야 할 남편도 없고, 태내에 품어 키울 아이도 없을 과부가 통통하게 살이 올라 무엇하겠는가 말이다.

▲ 영화 [워터] 스틸샷

 이 영화의 후반부는 공동체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깔리야니’-그녀는 다른 홀어미들과는 달리 머리를 길게 길렀고, 마두는 그녀에게는 새 옷도 사다 입힌다-가 개명한 지주의 아들이며 영국에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나라얀’과 운명적 조우를 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전개된다. 나라얀은 홀어미도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질만큼 의식도 깨인 젊은이였으나, 깔리야니는 나라얀의 아버지가 자신의 ‘고객’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날 밤, 깔리야니는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과부촌’의 큰 수입원이었던 깔리야니가 그렇게 세상을 하직한 후 마두는 쭈이야를 데리고 ‘영업’을 계속하려 한다. 어린 쭈이야에게 닥친 일을 알아버린 샤꾼딸라는 쭈이야를 기차를 타고 떠나는 나라얀의 손에 맡겨 떠나보낸다. 이 어린 홀어미의 미래는 그들의 삶과는 많이 달라졌으면 하는 안타까운 기대와 함께….

 

1938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가 21세기의 인도를 바라보는 나에게 특별히 놀라왔던 이유는 바로 그 ‘현재성’이었다. 영화 앞머리에 ‘India 1938'이라는 자막과 후반부에 잠시 등장하는 당시 인도 민족운동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모습 등 당시 정치상황을 반영하는 몇 가지의 설정을 제외하면 현재의 모습이라 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영화에 나타나는 홀어미들의 어이없을 만큼 가엾은 현실은 불과 3-4년 전 시사 잡지에 크게 실렸던 브린다반이라는 고장의 ‘과부촌’ 르뽀 기사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자식도 없이 홀로 되어 시댁에서 버림받은 홀어미들. 요즈음은 ‘성지순례’를 다녀오라는 명목으로 바라나시나 브린다반 같은 힌두교 성지로 보내버리고는 영영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슷한 처지의 홀어미들끼리 비인간적일만큼 열악한 상황에서 모여 사는 모습이며, 생계를 위해 사원에서 구걸을 하고 젊은 시절에는 몸을 팔아야 하는 처지도 시간이 멈춰버린 듯이 똑같다.

 

그나마 요즈음 이렇게 버려진 홀어미들을 위한 ‘복지제도’가 있다면, 힌두교 사원에서 이들이 사원 예배시간에 찬송가를 부르는 댓가로 하루에 2-3 루피(우리돈으로 50-70원 정도)의 돈을 준다는 것이다. 아무리 물가가 싼 인도라지만 이 정도면 돈이라 하기도 어려운 액수다. 길거리에서 끓여 파는 차 한 잔 값이니,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실 돈쯤이 되려나. 이나마 몸이라도 아파 사원에 나가지 못하면 만져볼 수 없는 돈이다.

 

어떤 이유 때문이든 버림받지 않은 홀어미들의 삶도 고단하긴 마찬가지이다. 특히 남편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면 더욱 그렇다. 고기, 달걀, 버터, 단 것 등 몸에 영양분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먹을 수 없게 되고, 딱딱한 자리에서만 자야하며, 수도자적 삶을 강요받는다.

 

홀어미가 가야할 길이 오죽 험난했으면 인도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람모한 로이같은 이는 ‘지난한 홀어미의 삶을 살아가느니 사띠를 행하여 목숨을 끊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는 말까지 했을까. 또한 사띠를 행하는 것도, 고결한 홀어미 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자신을 위한다기 보다는 죽은 남편의 천상에서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방법이다. 이런 홀어미로서의 절제을 지키지 못하면 사후에 자칼의 새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니 여자로 태어난 것이 억울하달 수밖에.

▲ 두마바띠 여신

 홀어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신화에 나타난 홀어미 여신의 모습에서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남신 쉬바와 그의 아내 사띠 여신-남편을 위해 몸을 불태웠던-이 카일라쉬에 함께 살적에 한 번은 사띠가 너무나 배가 고팠다. 남편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쉬바가 이 요구를 무시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남편을 잡아먹고 말았다는 것이다.

 

남편을 먹어치워 스스로 홀어미가 된 사띠는 두마바띠라는 다른 여신으로 그려진다. 두마바띠는 다른 여신들이 대부분 젊고 아름답게 그려지는데 반해서 늙고 추한 노파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백발의 머리카락은 산발을 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며, 그녀를 따르는 것은 까마귀뿐이다. 그녀는 늘 화가 나있고,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다. 그래서 채워도 채워도 만족되지 못하는 욕망을 상징한다. ‘남편을 잡아먹어’ 홀로 남았으며, 남편도 먹어치울 정도의 식욕은 남편이 사라진 후에도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남아 욕구 불만 때문에 늘 화가 나 있는 늙은 여자. 이것이 바로 홀어미의 모습이다.

 

나는 두마바띠에게 잡아먹힌 쉬바가 참 안타깝다. 왜 옆 사람의 배고픔에 그토록 무관심했었을까. 어쩌면 허기를 메우기 위해 남편이라도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되었던 두마바띠는 오히려 상황의 희생자는 아니었을지. 또, 남편을 잡아먹음으로써 ‘스스로’ 홀어미의 삶을 선택한 두마바띠는 우리는 몰라도 기실, 굉장히 독립적인 캐릭터가 아니었을지. 홀어미 여신의 신화는 가엾은 인도의 홀어미들을 위해서는 새로운 자리에 방점이 찍혀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