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India(2012,Jan)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일을 밝히다

봉들레르 2012. 4. 25. 09:37

천민 출신의 벽을 넘어 인도의 희망이 된 나렌드라 자다브

 

신분의 장벽과 현실의 제약을 극복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많은 이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때로는 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인도의 미래를 이끌 인재’라 불리며 차기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가운데 11억 인도인의 희망으로 떠오른 인도의 경제학자 나렌드라 자다브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나렌드라 자다브는 인도중앙은행의 수석경제보좌관을 거쳐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의 자문관으로서 세계 금융시장을 좌우했으며 현재, 인도 최상위 대학인 푸네대학의 총장으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화려한 약력이 그를 인도의 영웅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천민 출신이라는 신분제도의 장벽을 뛰어넘은 그의 남다른 인생 여정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수천 년간 쌓인 신분제도의 높은 장벽

인도에는 3500여 년간 이어 내려온 카스트제도가 있었습니다. 카스트란 신분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 것인데 최상위 승려계급인 브라만을 시작으로 군인계급인 크샤트리아, 서민계급인 바이샤, 노예계급인 수드라 순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최하위 계급인 수드라보다 더 낮은 계급으로 카스트에 들지조차 못한 이들이 있는데 바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라고 불리는 달리트입니다.
불가촉천민이란 ‘접촉할 수 없는 천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들은 상층 계급들과 살갗이 닿는 것조차 금지되었습니다. 상층 계급들은 이들과 닿는 것만으로도 오염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몸뿐 아니라 그들의 작은 물건에라도 닿았다가는 채찍과 몽둥이로 매질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노예보다 못한 신분이었던 달리트는 마을의 하수인으로서 상층 카스트가 시키는 허드렛일이나 죽은 가축의 사체를 치우는 일, 짐승의 가죽을 손질하는 일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려하는 더럽고 힘든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 대가로 얻는 것은 상층 카스트가 주는 약간의 음식과 최소한의 생활을 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적은 돈이 전부였습니다. 이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 또한 극히 적었습니다. 마을의 구성원이면서도 마을 밖에서 살아야 했고, 공동 우물이나 저수지 같은 공공 시설을 사용할 수도, 일체의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습니다. 상층 카스트에게 이유 없이 매질을 당해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는,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길고 긴 시간이 지나도 이러한 불합리한 제도에 반기를 드는 달리트는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이들은 자신의 비인간적인 삶을 당연한 운명처럼 받아들여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정해진 신분은 죽을 때까지 바꿀 수 없다’는 카스트제도의 인식이 뇌리에 박힌 달리트는 더 나은 삶에 대해 꿈을 꿀 기회마저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차별과 고난의 연속이었던 달리트의 삶.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이들의 삶에 희망의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인도의 미래를 열어갈 엘리트로 불리는 나렌드라 자다브가 바로 수천 년간 이어진 이 암울한 유전을 물려받은 달리트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꿈꾸게 해준 이름, 아버지

많은 병폐를 낳으며 수많은 달리트의 권리를 빼앗은 카스트제도는 나렌드라 자다브가 태어나던 1950년대에 이르러 기적적으로 폐지됩니다. 영국의 식민통치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된 인도에 근대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달리트의 인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고, 여기에 더해 신 지식인들이 카스트의 모순을 고발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여 이루어낸 결과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달리트는 비참하고 불행한 현실을 벗어나 행복한 내일을 꿈꾸게 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시, 변하지 않는 현실이 달리트의 희망을 또다시 가로막았습니다.
수천 년간 이어오며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뿌리내린 사상과 관념이 한순간에 바뀔 수는 없었습니다. 법으로는 카스트가 폐지되었지만 사람들의 생각 속에 달리트는 여전히 달리트였고 그들과 닿기만 해도 오염된다는 의식 또한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궁핍했고 어디를 가도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카스트의 폐지 소식을 듣지 못한 시골지역일수록 그 정도가 더 심했습니다. 카스트가 사라져야 할 곳은 법보다 사람들의 생각 속이었습니다.
뭄바이에 사는 달리트인, 다무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달리트에 대한 정부의 배려로 어렵게 철도회사에 채용된 그는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언제나 고된 노동에 얽매여 삶의 여유가 없었지만, 다무에게는 꼭 이뤄야 할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달리트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인간다운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달리트의 인권 운동이 일어날 무렵, 그는 자신들의 인권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고 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먼 길을 걷는 일도, 한뎃잠과 끼니를 거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를 보며 손가락질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먼 이상을 좇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달리트의 인권을 찾는 일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식에게만큼은 이런 비참한 삶을 결코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덟 명의 자녀를 둔 다무는 카스트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달리트에 대한 대우가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 운명을 직접 개척하지 않는 한 자녀들의 삶 역시 결코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무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도록 지켜만 보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무는 자신이 끼니를 굶더라도, 또 몸이 고되더라도, 자신의 삶을 희생해서라도 자녀들의 운명을 바꾸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녀 사랑은 철도 기계공에,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가 달리트의 인권을 위해 수많은 수고와 역경을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다무는 무엇보다 자녀들의 교육에 열정적이었습니다. 달리트로서의 삶이 처참한 이유 중 하나가 배우지 못한 데서 오는 무지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무가 아들을 학교에 입학시키러 갔을 때, 입학시기가 지났기 때문에 입학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원했던 다무는 입학을 허가해줄 때까지 학교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며 물러서지 않았고, 그의 열정에 마음이 열린 교장이 입학을 허가한 사례는 자식들을 고난의 삶에서 해방시키려는 다무의 의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무는 자녀들에게 항상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달리트라는 신분의 벽에 갇혀있던 꿈과 희망을 자녀들에게 찾아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수많은 고통을 묵묵히 감내한 이유였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그의 자녀들은 달리트 출신임에도 결코 스스로를 비천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상층 카스트의 냉담한 반응과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이들은 무사히 정규교육을 마친 후 달리트로서의 비천한 삶이 아닌 자신이 꿈꾸던 삶을 이루었습니다.

그들 중 한 아들은 달리트를 비롯해 사회의 수많은 약자들을 돕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이 가진 능력을 무수히 많은 이들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여러 대기업들이 내미는 좋은 조건의 취업제의를 모두 마다하고 다시금 인도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의 아버지 다무가 심어준 확고한 신념과 그 신념을 통해 얻은 능력으로, 달리트와 또다른 소외계층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인도로 돌아가면 달리트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을 것이라는 주위의 걱정과 염려가 뒤따랐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두의 걱정을 불식시키며 인도에서 경제학자로 명성을 얻으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연설과 강연을 통해 수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고 있는 그는 1억 7천만 달리트에게 밝은 미래를 제시하고, 11억 인도인의 마음에 커다란 감동을 안겼습니다. 그가 바로 다무의 막내 아들, 나렌드라 자다브입니다.
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 그리고 확고한 신념은 나렌드라 자다브에게 최고의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통해 얻은 교훈은 달리트라는 신분의 장벽과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자신이 꿈꾸던 삶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나아가 많은 이들의 마음에 희망과 감동을 심어줌으로써 그들의 인생에도 큰 변화를 불러오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