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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타슈켄트(Tashkent)와 천마(天馬)의 산지 페르가나(Ferghana)

봉들레르 2010. 9. 25. 18:54

타슈켄트(Tashkent)와 천마(天馬)의 산지 페르가나(Ferghana) 
 
   
 
27-3)  반월도(半月刀)를 휘두르며 몰려온 이스람 세력의 침입에 이어진 타라스 강의 대결전이 지나고 수백 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징기스칸의 검은 회오리바람이 지나가고 그리고 다음으로 티무르제국이 건립되어 한 세기가 지날 때, 14세기가 되어서야 현재의 우즈베크 민족이 속디아나로 이동해 들어왔다. 원래 우랄산맥에 남단에 살던 투르크계의 유랑민이었던 이들은 풍요로운 땅으로 밀려 들어와 농경민으로 정착하면서 ‘우즈베크 칸’이라는 강력한 지도자의 이름 아래 모여들어 ‘우즈베크’ 민족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투르크계의 여인들

그러다가 티무르 제국이 연이은 내분으로 쇠약해지자 황실의 용병의 자격으로 제국의 심장부에 다가가 1,500년 마침내 티무르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로 무혈 입성하여 우즈벡 민족의 나라를 세우지만 통일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지역별로 부하라, 키바, 코칸트란 이름의 ‘칸국(汗國)’이란 이름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우즈베키스탄’이란 이름은 “우즈베크 칸의 자손의 땅”이란 뜻으로 그곳에서 찬란했던 문화를 이룩했던 고대 원주민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냥 흘러 들어와 땅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일 뿐이다. 
 
  그렇게 별 볼일 없이 지내다가 19세기를 맞이하여 러시아가 영국의 진출을 막는다는 구실로 차례차례 군소 칸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할 때, 1925년, 공산화된 소비에트공화국의 일원이 되기에 이른다. 붉은 러시아 땅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기에 들어서서 구 러시아가 개혁, 개방정책으로 연방이 해체되기 시작하자 1991년 9월에는 우즈베키스탄 이름의 공화국으로 본의 아니게 자립하여 현재 ‘독립국가연합의 일원이 되었다.

*타슈켄트의 티무루상

 이 나라의 수도가 타슈켄트(Tashkent)이다. 혜초사문이 석라국(石?國)이라 불렀던 바로 그곳이다. 혜초는 이 나라에 대해서 특별한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다만 호국 6개국으로 묶어서 공통적 사항만 몇 가지 기록했을 뿐이다. 사마르칸트에 비해 별 특징도 없는 곳이기에 나그네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단지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전에 혜초사문이 갔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페르가나국(跋賀那國), 즉 현재의 페르가나(Fergana)는 꼭 다녀와야 했기에 버스를 타고 유서 깊은 나라로 향했다. 훼르가나 계곡은 현재는 한 마디로 복잡한 지형으로 우즈벡, 타지키스탄, 키르기스탄 세 나라의 삼각지점이다. 그래서 타슈켄트에서 기차를 타면 키르기스탄의 호젠트(Khojent)란 도시를 거쳐서 가야한다. 그 이유는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 제국이 분리될 때 민족별로 국경선을 그었기 때문에 생 긴 결과라고 한다. 

 
 
국경선이 그렇게 복잡하게 섞여 있는 지형 속에 있지만 페르가나는 지형적으로는 천산산맥과 기사르산맥 사이의 거대한 삼각형의 분지로 천산에서 발원하는 시르다리아(Syr Darya)강의 상류 지역으로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토지로 인해 예부터 목화를 비롯한 농산물이 많이 생산되는 곡창지대로 이름이 높았다. 이 지방이 예부터 동서양의 사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그 첫째는 천마(天馬)라는 별명의 명마의 산지이고 다음으로 대 실크로드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타슈켄트의 중앙광장의 티무르기마상

 한(漢)대에는 페르가나를 대원(大宛) 또는 발한나(拔汗那)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대 여행가 장건(張騫)이 다녀가면서부터였다.  한 무제(武帝)는 월지족과 손을 잡고서 흉노족을 쳐서  실크로드를 개척하기 위해 장건을 서역으로 보냈다. 장건은 B,C 139년 중원을 출발하였으나 도중에서 흉노에게 사로잡혀 10여년을 지내다가 감시가 느슨해지자 탈출을 감행하여 서쪽으로 길을 재촉하여 마침내 대원국- 페르가나에 도착하였다. 그 뒤 대원국의 도움으로 강국-사마르칸트로, 다시 월지-속디아나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이미 새 땅에서 정착한 월지족은 그곳의 비옥함에 만족하여 흉노에의 원한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던 그는 빈손으로 귀국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귀로에 다시 흉노에게 잡혀서 죽음 직전에 내분을 틈타 달아나 13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타슈켄트의 무희들
그의 견문에 의해 대원국의 천마가 한나라에 소개되었다. 이에 한 무제는 B.C 102년, 이광리(李廣利)장군으로 하여금 변방의 기병 6만 명과 불량배 소년 및 시종들 그리고 소 10만, 말 3만, 당나귀, 낙타 1만 필을 주면서 대원국을 정벌하고 천마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에 이광리는 많은 고생 끝에 대원에 도착하였으나 성이 견고하여 깨뜨리기 어렵게 되자 시르다리아 강물을 막아 수공(水攻)으로 성을 함락하고는 3천 필의 명마를 데리고 귀환하였다고 한다. 이에 한 무제는 명마를 얻은 기쁨에 겨워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천마가 오네. 서쪽 끝에서 오네. 만 리 먼 곳에서 중원으로 들어오네.
 영특한 위풍을 이어받아 외국을 굴복시키니
 대 사막을 건너와 사방의 오랑캐가 이에 복종하네.』

  그 이후 페르가나와 장안 사이에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던지「史記」대원 조를 보면 얼마가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포도주에 대한 기록도 나타난다.

*요리를 위한 화덕

『한 무제가 대원의 말을 좋아하여 사자가 길에서 마주칠 정도로 빈번하게 오갔다. 이러한 사절단은 한 무리가 큰 것은 수백 명이고 작은 무리는 수십 명이었다. (중략) 이런 무리는 많을 때에는 해마다 수십 회 적을 때에도 5~6회 씩 파견되었다. 가까운 곳도 수년이나 걸리는 여행이었다. 』


 우리의 혜초사문은 이 나라를 ‘대원국’으로 부르지 않고 페르가나로 불렀다. 혜초는 아마도, 중국으로의 귀향길을 모색하고 싶어서였던지, 아니면 단순한 순례였는지, 강국- 사마르칸트에서 동쪽으로 이 나라에 들어와 다시 쿠탈국으로 넘어가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또 강국으로부터 조금 동쪽은 페르가나국이다. 이 나라에는 왕이 두 사람이 있다. 시르다르야[縛叉大河 Syr Darya]강이 나라의 중앙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데, 강 남쪽에 한 왕이 있어 대식국에 속해 있고, 강  북쪽에 한 왕이 있어 돌궐에 속해 통제를 받고 있다.』

*시시카바브를 굽는 모습
또한 쿠탈국(骨?國), 즉 현재의 타지기스탄의 쿠탈(Khuttal)에 대하여도,
『또 페르가나국의 동쪽에는 한 나라가 있으니 이름이 쿠탈국이다. 이 나라 왕은 본래 돌궐의 종족이고 백성의 반은 호족이고 반은 돌궐족이다.(중략) 주민의 절반은 토화라 말을, 절반은 돌궐 말을, 절반은 본토 말을 한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은 삼보를 공경하고 신봉하여 절도 있고 승려도 있다.… 』

 위 구절에서 암시되듯이, 언어에 대한 명확한 구별도 그냥 주워들은 것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내용으로, 혜초사문이 직접 답사한 기록이라고 추정되는 근거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종전에는 학계에서도 이 ‘호국’을 완전히 전문국으로 분류하였으나 최근에는 일부 학자들이 선별적으로 검토할 필요를 느낀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혜초의 다음 기록은 돌궐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은 호밀국으로 아프간의 북부 와칸계곡의 입구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렇다면 혜초사문은 도로 남으로 내려갔다는 말인데, 이 대목은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다.

*우주벡의 명물 인리피오쉬카 빵

왜냐하면 페르가나에서 중국의 서역도호부의 관할인 카슈카르는 천산(天山)산맥만 넘으면 쉽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인데, 그 길을 택하지 않고 남으로 내려갔다는 말이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혹 길깃트에서 바로 파미르 고원을 넘지 않고 빙빙 둘러서 왔던 여러 번의 경우처럼, 당시 천산산맥을 넘지 못할 무슨 말 못할 정세의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할 수없이 도로 다시 남으로 내려간 것일까?


*노상식당

출처 :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
글쓴이 : 김규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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