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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의식주 체험3-배낭 여행중 경험하는 현지인의 초대

봉들레르 2010. 1. 5. 09:24

이제까지 배낭여행을 다니면서 겪어본 최고의 경험 중 하나가 현지인의 초대다. 현지인들의 생활 구석구석을 조금이라도 더 보겠다고 서민들의 주거지 뒷골목을 다녀보곤 하는 나이고 보면 그러다 어느 집에 초대를 받게 된다면 두 말 않고 댕큐 베리머치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당케쉔 쎼쎼다. 여행중에 현지인들의 주거지 안에 까지 들어가 살아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현지인의 초대를 통한 방법 외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현지인들의 생활문화인 의식주에 가장 깊숙히 들어가 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초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친구가 되었으니 여행 중 얻을 수 있는 가장 멋진 선물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내가 여행중 현지인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본 것도 세 번 뿐이었다. 무언가 소정의 목적을 얻기 위해 나를 초대한 경우도 있고, 이방인을 집 안으로 초대해 친구가 되기를 좋아하는 친절한 사람들의 즉흥적 초대도 있었고, 친구로서 보여주는 우정의 표현도 있다.

 

인도에서 새해를 맞은 2007년 1월, 커주라호에서 가이드로 만나 속셈이 있긴 했지만 자기 집으로까지 초대했던 시키라는 소년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지금도 나로 하여금 이 소년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금금하게 만들곤 한다. 저녁 늦은 시간에 커주라호에 도착한 우리는 다음날 아침 사원유적군 관람을 예정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게스트하우스에서 준비한 식사를 마친 우리는 걸어서 얼마되지 않는 곳에 위치한 사원 유적군으로 갔다. 사원 유적군 입구 매표소에 진을 치고 있던 직업 가이드들은 수요보다 공급이 현저하게 많았다. 나는 알아듣기 어려운 인도식 영어에 피곤함을 느끼고 있던 터였고 가이드 책자만으로도 어느 정도 정보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니 굳이 가이드를 고용할 생각도 없었고 쉬엄쉬엄 가이드에 얽매이지 않은채 요모조모 뜯어보며 천천히 구경하고 다닐 참이었다. 사원 유적군 안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힌두교 사원들이 지척을 두고 여기저기 세워져 있어 전체를 둘러보는 데는 크게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이 곳을 나와 마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사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기 위해 민가가 흩어져 있는 곳을 가이드 책자를 펼쳐 들고 찾아 다니던 중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어 그들을 모델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송아지를 안고 노는 소녀들)

 

그 때 만난 한 소년이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접근해 왔다. 자신의 이름을 시키라고 소개한 뒤 일행 중 내가 리더였음을 알아챈 이 소년은 나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나이까지 따져가며 상세한 신상명세를 알고자 했다. 소년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가이드를 자처하는 것이었고 친구라는 명목으로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영리하고 똑똑한 이 소년은 당시 나와 함께 여행중이던 일행에게 가이드가 없음을 알아차리고 우리를 고객으로 본 것이다. 여행객이나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가보는 사원 유적군 매표소에서 다소 떨어진 이 곳에서 우리에게 가이드로서 접근한 이유가 무엇이었까. 생각할수록 소년의 영리함이 놀랍다. 매표소 주변이라면 어른들 틈에서 경쟁하기도 버거웠을 뿐 아니라 가족들의 생계가 달린 이 경쟁에서 어른들이 철없어 보이는 이 소년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침탈하는 것을 곱게 보고만 있을 리도 없었다. 관광객들이 사원 유적군을 둘러 본 뒤 마을에 흩어져 있는 사원들을 둘러보기 위해 지나는 길목을 이 소년은 블루오션으로 찾아낸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가이드로 끌어들도록 나를 요리하는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이러한 타고난 사업수완은 누가 가르쳐 준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소년은 자신이 공부할 학비를 벌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스스로 터득한 것이었지만 무척 창조적이고 개척적이었고 게다가 지략적이기까지 했다. 관광객에게 덮어놓고 접근해 가이드를 하겠다고 설득력 없이 통사정하는 어른들보다 훨씬 나았다. 무슨 어린애가 구사하는 영어가 이리도 유창하고 발음이 좋은지 어른들이 하는 전형적인 식민지 발음보다는 알아듣기에도 편안했다.

 

나는 처음엔 이 소년을 나와 우리 일행으로부터 떨궈내려고 했었다. 이 소년을 외면하고 가려고 하면 '그 방향으로 가면 무슨 무슨 사원이 있는데 그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하며 달라붙었다. 그의 안내에 관심이 없다는 노골적 표현으로 다시 방향을 바꾸면 '이 방향으로 가면 무슨 무슨 사원이 있으니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역시 끈질기게 들러 붙었다. 이 소년은 영리함 외에도 현대의 능력있는 젊은이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적극적이고도 집요한 근성마저도 갖고 있었다. '가이드비를 원치 않으며 단지 당신을 친구로 얻으려 할 뿐'이라는 말이 나로 하여금 이 소년을 다시보게 만들었다. 가이드비를 원치 않는다는 말은 내게서 가이드비를 받아낼 자신을 갖고 있다는 뜻을 내재하고 있었다. 나는 일행들로부터 이 소년의 가이드 역할에 동의를 일단 얻었다. 어른들로서는 절대 해낼 수 없는 치밀한 방법론적 수단과 심리전에까지 치밀한 소년이었지만 나는 알면서도 넘어가 주기로 작정했다. 나는 이 소년이 향토 역사와 유적 현황에 대하여 어른들도 모를 지식까지 훤히 꿰차고 있다는 사실에 나로 하여금 놀라다 못해 경악을 하게 만들었다. 이 소년은 세 가지 소원이 있다고 밝힌 뒤 그 하나는 대학에서 공부할 돈을 버는 것, 또 하나는 엔지니어가 되는 것, 나머지 하나는 자신 소유의 상점을 여는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2년전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 등의 가정사 등을 통해 나의 동정심까지 자극하고 있었다.

 (식사준비를 하는 시키의 어머니)

 

우리는 한동안 시키라는 이 소년이 하는대로 우리 자신을 내맡겼다. 흩어져 있던 주요 사원들을 거의 다 둘러 보았다는 판단이 서자 현지에서 구성된 6명의 일행 중 4명이 초등학교 교사들이었던 관계로 이 곳의 학교를 들러 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들이 시키의 학교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해서 학교 방문으로 이어졌다. 학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열악했다. 그나마 지붕이 있는 교실은 저학년이 쓰고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지붕이 없는 야외에서 수업이 이루어졌다. 마침 교장선생님도 휴일에 나와 우리를 맞아 주고는 약간의 기부를 부탁했다. 많지 않은 금액이나마 기부를 한 뒤 학교를 나오자 시키는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초대 하고자 했다. 이는 적당히 용돈이나 쥐어 주어 보내려 했던 우리의 속을 이미 꿰뚫고 한 초대였다. 처음엔 사양했더니 나는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도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나의 초대를 거절하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했다. 사실 시키는 빠져나갈 구멍도 없이 나를 조여왔지만 나는 오히려 이 조치를 반겼다. 현지인의 집에 받는 초대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일행에게 현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는 굉장한 기회가 생겼으니 거절하지 말고 가서 시키의 어머니에게 학비의 일부나마 보탬을 주고 나오자는 제안을 했다. 모두가 찬성했다. 여행중에 서민들의 삶을 유심히 보려고 노력하는 나로선 상당히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여행중 현지인의 집 방문은 이 것이 나로선 처음이었다.

(시키의 집에 모인 아이들)

 

우리가 시키의 초대를 받아들이자 시키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 따라왔다. 시키의 어머니가 마침 취사중이었다.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지만 나는 영어로, 그녀는 힌디어로 했다. 그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했다. 시키는 자신의 방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나와 일행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자그마한 방에 책상 하나, 침대 하나, TV 한 대 가 전부였다. 시키는 까칠하게 친구들을 내보내려 했지만 외국인의 내방이 신기했던지 꿈쩍들도 하지 않았다. 조금 지나니 시키의 어머니가 짜이(밀크를 넣고 끓인 홍차)를 내왔다. 차를 마시고 한동안 앉아 아이들과 놀다 나왔다. 우리는 시키의 어머니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 얼마 안되지만 시키의 학비에 보태달라고 한 뒤 집을 나왔다. 배웅하는 시키 어머니의 얼굴이 환했다.

 (시키의 집 마당에 설치된 작은 사원으로 안에는 시바의 상징인 링가가 모셔져 있다)

 

아이들과 앉아 그저 사진 몇 장 찍었지만 여행중 흔치 않은 즐거움이 있었다. 시키의 이러한 영민함이라면 자라서 반드시 크게 될 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속이 있어 한 초대였지만 나는 그 초대가 고마웠고 그가 장성하거든 그의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빌어 보았다.

 

2008년 겨울, 혼자서 중동여행을 위해 떠났다. 요르단으로 가기 위해 이스탄불을 경유하던 것이 터키에 두 번째 방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들렀던 샤프란볼루에서 현지으로부터 받은 초대도 상당히 기억에 남는다. 자정에 인천공항을 떠나 저녁이 되어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에센레르 오토갈(고속터미널)로 가서 샤프란볼루행 장거리 버스를 탔다. 11시 30분에 출발한 이 버스는 이른 새벽에 샤프란볼루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이 곳은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라 세르비스(소형 버스로 된 service 버스)를 타고 마을 중심부에 도착한 시간이 05:30이었다. 주변이 어두웠기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선 아침식사를 하고 카메라 밧데리를 충전하기 위해 한 카페를 찾는 것이 최선이었다. 요기를 하고 차를 마시며 날이 밝기를 기다린 뒤 날이 훤해지자 샤프란볼루의 고가옥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이른 아침이라 집 밖에 나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시간이었다. 마을의 초입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내가 가진 카메라를 가리키며 포즈를 취했다. 나는 흔쾌히 이 귀여운 소녀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층에서 내려다 보던 소녀의 동생이 역시 뭐라고 하더니 포즈를 취했다. 두 말 않고 찍어 주었다. 소녀의 어머니인지 할머니인지 모르겠지만 나이든 여인이 밖을 내다 보던 모습을 찍고 싶었다. 이 번엔 내가 허락을 구하고 찍었다. 소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더니 소녀가 손을 오므려 잔모양을 한 뒤 입에 대고 껄떡 마시는 시늉을 하며 "차이" 하더니 나의 팔을 잡아 끌었다. 자신의 집에서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말이었다. 사양을 했더니 여인도 나를 보고 안으로 들라며 손짓했다. 터키인들 역시 집안에 손님 맞기를 좋아한다고 들은바 있었다. 나는 예의상 한 번 사양한 뒤 그들의 진심을 읽은 뒤 집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샤프란볼루에서 나를 초대해 준 이 댁 안주인)

 

부인의 성화에 이제 막 잠에서 설익은 눈을 비비며 자리를 터는 노인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들어오는 손님을 기꺼이 맞아주며 밤새 장작을 아끼느라고 식어있었을 난로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내게 처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던 소녀 이름은 구르벳(Gurbet)이라고 했다. 예쁜 이름이었다. 손님을 위해 가스 버너에 차를 올리다 말고 미소짓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이중으로 된 주전자의 아래쪽은 물이 팔팔 끓고 위쪽으로는 차가 담긴 물이 은근히 데워진다. 준비가 되면 윗주전자의 차를 반정도 붓고 나서 아래주전자의 끓는 물을 부어 희석해 마시는데 맛이 아주 좋다.

아래 사진은 나를 위해 난로에 온기를 넣은 이 집 가장 핫산(Hassan)씨의 아침기도 모습. 이교도이며 이방인인 내 앞에서 뭔가 감사하는 듯한 기도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기도 속에는 나를 위한 기원도 들어 있었을 것만 같다.

(가장인 핫산씨의 아침기도)

 

옷을 차려입고 홍차를 준비하며 이들의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바게뜨와 비스킷, 치즈와 올리브 그리고 홍차 한 잔. 이들의 아침식사는 행복해 보였고 이 곳에 나를 초대해 주고 행복까지 덤으로 나눠 준 그들에게 감사했다.

(나그네를 위해 내어 놓은 아침식사: 비스킷, 치즈, 올리브, 바게뜨, 그리고 홍차로 소박하지만 푸짐한 식탁) 

 

영어를 할 줄 아는 이가 없어 제대로 된 대화 없이 그저 서로의 이름과 미소를 주고 받았을 뿐이자만 많은 대화보다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음에 다름아니었다. 부모는 돈벌러 객지에 나가고 조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것 같다. 두 아이들에게 용돈을 쥐어주자 그러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난 그들에게 줄게 이것 밖에 없음에 융숭하고 황송한 대접에 몸둘바를 더욱 알지 못했다.

(홍차가 끓기를 기다리며 한 컷)

 

하직인사를 고하자 문간으로 나와 손님을 떠나 보내는 노부부의 모습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이 번 2009년 겨울에 북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날 참인데 이스탄불을 경유하게 될 것 같다. 거리만 가까우면 이들을 다시 보기 위해 다시 한 번 샤프란볼루를 방문하고 싶은 생각도 굴뚝같다.

(손님을 보내는 핫산씨 부부)

 

현지인의 세 번째 초대는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요르단 와디무사 도착 첫 날 저녁이었다. 남녀가 섞여 14명이 한꺼번에 묵었던 한 호텔의 도미토리룸에서 만난 마사유끼와는 2008년말을 보내고 2009년을 요르단에서 함께 맞았다. 이제 막 새로 들어와 짐을 풀던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온 마사유끼의 인상은 무척이나 호감가는 상이었다. 잠깐 사이에 친해져 각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 그가 한국으로 놀러오게 되었다. 나는 2008년 말과 2009년 초에 터키,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을 두루 돌아본 뒤 마사유끼와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마사유끼는 요르단에서 나와 헤어진 뒤 시리아로 갔다. 그 곳에서 마사유끼는 마사요시라는 친구를 만났고 친화력 뛰어난 마사유끼는 그와도 금방 친해졌던 모양이다. 2009년 봄이 되자 마사유끼는 마사요시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나는 그들이 서울에 머무는동안 방을 하나 내주었고 어머니와 상의해 부모님 댁에서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이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같은 해 가을이 되어 도쿄를 방문했다. 마사유끼는 자신의 차로 나와 동행한 친구 뜀도령을 데리고 다녔고 서울에서 처음 만나 친해진 마사요시는 내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부모님 댁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마사요시의 부모님이 사시는 집은 도쿄로부터 차로 몇 시간 떨어진 곳이었다. 이주 아타가와에서 우리네와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른 일본의 온천을 즐긴 뒤 늦은 저녁에 마사요시의 부모님이 사시는 집에 도착했다. 

(거실 겸 식당: 거실과 주인 침실을 보면 전통양식을 퓨전으로 지은 지은 듯하다)

 

(이 집은 전문 잡지에도 몇 쪽에 걸쳐 상세히 소개될 만큼 잘 지어진 집이었다)

 

운좋게도 마사요시의 부모님이 사시는 집은 전통식 다다미 방을 가진 일본에서도 흔치 않은 집이었다. 게다가 운이 더욱 좋았던 것은 마사요시의 어머님의 요리솜씨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일류솜씨였다. 

(아들의 친구들을 위해 정성껏 마련된 만찬)

 

우리는 식탁에 둘러 앉아 차려진 음식에 감격해마지 않았다. 차려진 음식은 도미 샤브샤브(긴다이메), 와규를 이용한 로스트 비프, 마제수시(새우초밥), 유즈코쇼, 토란요리 등이 차려진 풍성한 식탁이었다. 맛은 놀라울 정도였다.

뜀도령의 귀뜸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맛있습니다'라고 만 하면 주인은 '맛이 없는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한단다. 정말 맛있다는 표현하려면 약간은 오버를 하고 정색을 해야 한다나. 나는 마제수시를 한 입 넣어 보고 정말 맛있다고 생각한 순간 뜀도령이 한 말이 생각났다. 휘둥그레진 내 눈을 전시까지 해가며 외운 말을 써먹었다. "오이시, 혼또니 오이시데쓰(맛있네, 정말 맛있습니다)" 어르신들이 도리어 연신 "아리가또 고자이마쓰"라며 만족해 하셨다. 나는 음식맛을 하나씩 다 본 뒤 "홋뻬타가 오치소오(먹다가 볼이 빠지겠네요)"라고 말했다. 이 것은 한국에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다"는 표현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마침 그 말을 했을 때는 어머님이 부억에 잠깐 들어가 계실 때였다. 이 말을 듣고 무척 만족해 하시며 아버님이 내게 뭐라고 하시는데 마사유끼가 옆에서 영어로 통역했다. "방금 그 말씀 크게 한 번 만 더 하시지요" 크게 한 번 더했다. "홋뻬타가 오치소오!" 어머님이 주방에서 나오시며 역시 기뻐하신다. 

뜀도령과 나는 아버님이 준비해 주신 사케 카라쿠치를 마셨고 마사요시와 부모님들, 그리고 마사유끼는 내가 가져간 막걸리를 즐기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초대 받아 묵었던 전통 다다미 방)

 

우리를 위해 마련된 다다미 방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날 아침 일본 전통식으로 준비된 아침식사까지 대접 받았다. 우리의 청국장과 비슷한 나또, 키리보시다이콩(무우 볶음), 긴삐라고보(우엉볶음), 미소시루(된장국), 사께(연어구이) 등이 식탁에 올라왔다.

(일본 전통식으로 차려진 아침식사)

 

일본 가정에 초대받아 전통음식을 맛보고 전통식으로 지어진 집에서 자 보았으니 일본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을 한 셈이다. 아들 친구들을 위해 두 분이 준비하신 음식과 접대는 이제까지 받아 본 손님접대로는 최고였으니 지금도 그 고마움을 표현하기 쉽지 않다. 나는 마사요시와 마시유끼에게 내년 여름에 놀러 오면 제주도로 안내하겠다고 약속했다.

 

배낭여행을 다니다 보면 현지인의 초대를 접할 기회가 간혹 생긴다. 이런 기회는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현지문화에 가장 깊숙히 들어갈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친구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되니 사양하거나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 번 겨울에 북아프리카 2개국 정도를 여행할 참인데 염치도 없이 벌써부터 현지인 누군가로부터 초대를 받을 기회를 은근히 기대해 본다.

출처 : 코렐리 일기장
글쓴이 : 코렐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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