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생 로랑의 L'Amour Fou
20세기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가 남긴 모든 것!
1958년 이브가 맡은 디올의 첫번째 콜렉션에서 피에르 베르제와 이브 생 로랑은 처음 만난다.
그 날 이후 열정적인 사랑, 엄청난 성공 그리고 내밀한 상처로 뒤얽힌 50년의 시간을 함께 보낸 두 사람.
그리고 2008년 이브 생 로랑이 세상을 떠난 후 피에르 베르제는 그들이 평생에 걸쳐 수집했던 미술품 콜렉션을 경매에 내놓는다.
‘세기의 경매’라 불렸던 그들의 콜렉션은 3억7천3백50만 유로(한화 약 6천억 원)에 달하는 단일 경매 사상 최고의 낙찰액으로 화제가 되었고,
수익금 전액은 에이즈 재단에 기부되었다.
장례식과 경매 행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의 수집품으로 가득 찬 파리의 아파트와 마라케시의 마조렐 정원
그리고 노르망디의 샤토 가브리엘을 오가는 이브와 피에르의 마지막 여정이 펼쳐진다.
천재와 광인 사이의 스타 디자이너
“언젠가 내 이름이 샹젤리제 거리에서 빛나게 될 거야.” 이브 생 로랑은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치기 전부터 이렇게 장담했다.
그는 1936년 8월 1일, 당시 프랑스령이였던 알제리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7살 무렵 연극과 의상, 패션에 관심을 보였다. 이브 생 로랑은 국제 양모 사무국 디자인 콘테스트에 참가해 ‘드레스’ 부문에서 3등을 수상했고,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와 당시 파리 패션계의 거장이자 심사 위원이었던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만났다.
이브 생 로랑은 파리 패션 학교 ‘파리 의상 조합’에 들어갔다.
마침 그의 디자인 스케치를 보고 대성하겠다는 확신이 든 디오르가 1954년 그를 즉석에서 스타일리스트로 고용했다.
생 로랑은 날이 갈수록 컬렉션 준비에 재미와 흥미를 느꼈지만 디오르는 점점 패션 업계의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힘들어 했다.
결국 디오르는 결단을 내렸다. “이브 생 로랑이 내 후계자가 될 것이다.”
1957년 10월, 디오르가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그리고 불과 4주 후인 1957년 11월 15일, 이브 생 로랑이 향후 디오르 사의 책임자가 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겨우 21살의 어린 디자이너에게는 과도한 책임이자 도전이었다.
trapezeline
1958년 1월 30일 파리, 생 로랑은 어깨에서 스커트 도련까지의 퍼짐이 사다리꼴인 ‘트라페즈 라인(trapezeline)’으로 첫 컬렉션을 열었다.
패션쇼가 끝나자 검은 양복에 검은 사각형 뿔테 안경을 쓴 유약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모델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살롱은 손님으로 미어터졌고 사방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그는 여성의 허리, 가슴, 어깨에서 쓸데없는 모든 것을 걷어냄으로써 해방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여성들을 패션으로 동행했다.
피에르 베르제가 인생의 동반자가 되다
같은 해 이브 생 로랑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케팅 전문가 피에르 베르제를 알게 된다.
두 사람은 동성의 연인이자 평생을 함께하는 오랜 파트너 관계로 이어졌다.
1960년, 프랑스가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던 때 24살의 디자이너는 군에 입대해 알제리로 파병간다.
젊고 유약한 그는 알제리에 도착한 지 불과 3주 만에 이성을 잃고 정신병원으로 실려 갔다.
프랑스 언론은 책임 회피와 엘리트들의 오만을 들먹이며 생 로랑을 비난했다.
디오르 사도 그를 해고하고 마르크 보앙을 그 자리에 앉혔다. 생 로랑은 병원에서 비쩍 마른 몰골로 피에르 베르제에게 맹세했다.
“다른 대안이 없어. 퇴원하자마자 패션 하우스를 열자.”
이브 생 로랑은 계약 위반을 이유로 디오르 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승소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1년 12월 피에르 베르제와 이브 생 로랑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해 1962년 대망의 첫 컬렉션을 개최했다.
1966년 9월 26일, 파리 6구 투르농 거리가 시끌벅적했다.
이브 생 로랑의 프레타 포르테((pret-a-porter기성복) 부티크 ‘리브 고슈’의 개장 행사를 보기 위해 모두가 몰려왔던 것이다.
‘리브 고슈’는 건너편 왼쪽 물가라는 뜻으로 기존 파리 문화의 중심지인 센 강 우안에 맞선다는 뜻이기에 그것은 곧 저항을 의미했다.
이브 생 로랑은 고급 브랜드의 대안으로 저렴한 가격의 패션, 누구나 입을 수 있는 부티크 패션을 만들고자 했다.
1966년 첫선을 보인 남성의 턱시도 정장을 여성화한 ‘르 스모킹’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독립과 자결을 향한 여성들의 욕구를 상징하는 의상이었다. 생 로랑은 르 스모킹을 생애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불렀고,
2002년 은퇴할 때까지 매 시즌 새로운 스타일을 소개하며 이브 생 로랑 디자인 하우스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았다.
마약을 먹으며 일하다
이브 생 로랑은 미친 듯 일했고, 해마다 더욱 파격적인 패션쇼를 선보였다. 컬렉션이 막을 열기 전까지 수백 개의 초안과 수많은 불면의 밤이 있었다.
“고통스럽다. 옷을 디자인할 때면 두려움을 느낀다. 공포가 나를 덮친다.” 디자이너는 항우울제와 마약으로 두려움을 달랬고 늘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결국 2002년, 중병이 든 몸으로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2008년 6월 1일, 이브 생 로랑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파리 패션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생로슈 성당에서 열린 장례 미사에서는 초대받은 수백 명의 조문객들이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프랑스의 삼색기가 그의 관을 덮었고 성당에는 온통 재스민과 흰 백합이 가득했다. 그날, 전 세계의 이브 생 로랑 부티크는 문을 닫았다.
그의 유골은 마라케시의 그의 집 장미 정원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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