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Georgia(2018 Jul)

10-2 조지아의 인간 백정 스탈린

봉들레르 2018. 12. 11. 00:02



‘조지아의 인간 백정’ 스탈린에 대한 분노와 향수

조지아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블라디미르 레닌에 이어 제2대 공산당 서기장에 올라 30여년간 소련을 통치했다.

그는 유독 조지아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굴어 그가 조지아 태생인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스탈린의 본명은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로, 조지아의 작은 소도시 ‘고리’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직자를 꿈꿨고, 이를 위해 신학교에 진학했었다.

하지만 심각한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의 지속적인 폭력 탓에 그의 가슴은 서서히 분노로 차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신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마르크스의 폭력 혁명론에 빠져든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면서 혁명가로 거듭났다.

스탈린은 레닌의 총애를 받았고, 1912년 레닌의 도움으로 볼셰비키 중앙위원에 위촉됐다.

이 때부터 본명을 버리고 러시아어로 강철인이란 뜻의 필명 ‘스탈린’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스스로를 조지아인이 아닌 러시아인이라 불렀다.

스탈린의 잔혹함이 수면 위로 드러난 건 그가 1922년 제2대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면서부터다.

소련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그는 자신의 혁명을 반대했던 조지아인들은 물론, 1인 지배를 공고히 하는데 방해되는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1934년부터 3년 넘게 이어진 대숙청 시기엔 친인척들까지도 없애버리며 철권통치를 본격화했다.

이 시기엔 산업화와 경제개발계획을 실시하며 근대화를 주도하기도 했는데, 극심한 착취로 수백만 농민들이 굶어 죽었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또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버지는 상대방을 인민의 적으로 판단하면 어떤 인연이든 소멸한다”라고 했을 정도로

당시 그의 폭력성은 극에 달했다. 스탈린의 지나친 광기에 무수한 사람들이 숙청당하자 조지아 사람들은 그를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박해를 당했는데도 조지아인들은 스탈린을 그다지 미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리어 스탈린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도 많다.

매년 스탈린의 생일이 돌아오면 그의 동상엔 그를 추모하는 꽃이 수북이 쌓이고, 도심에선 집회행렬이 이어진다.

이 동상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때 ‘독재자의 동상’이란 이유로 철거됐지만, 2012년 그를 추억하는 여론에 밀려 다시 세워졌다.


러시아식 ‘그루지야’ 대신 영어식 ‘조지아’

스탈린의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고 영원할 것 같았던 소련의 지배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자

조지아는 1991년 4월9일 가까스로 독립을 이뤘다.

당시 조지아는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하나로 흡수돼 있었다.

독립 직후 조지아 정부는 국제사회에 그루지야(러시아식 명칭) 대신 조지아(영어식 명칭)로 불러달라 요청했다.

미국에 동명의 주(州)가 있어 혼선이 예상됨에도,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워낙 컸던 탓에 러시아식 명칭을 꺼렸던 것이다.

하지만 독립 후에도 조지아는 러시아의 간섭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 지역이 인종ㆍ문화적 이유로 ‘친러시아’ 노선을 택하며 분리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소련 해체 후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등과 함께 반(反)러시아 벨트를 형성해 온 조지아 입장에선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다.

게다가 러시아를 등에 업은 두 지역은 기세 등등하기까지 했다.

이에 조지아는 1991년 남오세티아에서 내전을 벌인데 이어 1992년엔 압하지아에서 대대적인 반군 소탕작전을 벌이며 무력진압을 시도했다.

그러자 러시아가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전면에 나섰고, 조지아의 수출길을 옥죄며 전쟁을 중단할 것을 강하게 압박했다.



러시아의 강경 대응으로 중단되는 듯 했던 전쟁은 2008년 8월 남오세티아 대 조지아로 또 한 번 화염이 일었다.

조지아 정부가 남오세티아 내 분리독립주의자들을 색출하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고 무력진압을 시도한 것.

그러자 러시아가 남오세티아 내 자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또 한 번 맞불을 놓았고, 전쟁은 극으로 치달았다.

 이 전쟁이 조지아 대 러시아 전쟁으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조지아 정부군은 러시아에서 몰려온 대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러시아가 남오세티아 자치주의 수도인 츠한빌리에서 조지아 정부군을 밀어내며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지아가 휴전을 요청했으나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군사적 압박을 계속 가했다.

그 결과 순식간에 2,000여명에 달하는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조지아의 사회ㆍ경제 시스템 또한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 조지아와 러시아가 평화협정에 동의하면서 전쟁은 중단됐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의 분리독립 요구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러시아 역시 이 두 지역을 지원하고 있다.

러시아가 두 지역에 집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에너지 자원이다.

조지아는 카스피해의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공급하는 길목에 위치해 각종 송유관이 지나가는 전략적 요충지다.

문제는 해당 송유관들이 러시아를 지나지 않는다는 점.

이에 러시아는 분리독립을 원하는 조지아 내 두 지역을 꾀어내 송유관이 지나는 길을 확보하고,

동시에 구소련이 지배했던 이곳에서 꾸준히 영향권을 행사하려 하고 있다.

한국일보






































스탈린은 한반도의 비극을 설계했다. 조선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그의 첫 연출이다.
분단, 공산 위성국 북한 수립, 한국전쟁에도 스탈린의 기획과 음모가 들어있다. 전시 홀은 7개다. 전시품은 800여 점(4만7000여 점 보유).
진열장 속에 한글이 보인다. ‘이·쓰딸린 저작집 1’-. ‘이’는 이오시프. 스탈린 전집의 번역책이다.
북한 관련 전시품은 그것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시품은 드물다.



































Stalin’s death mask resides in the museum








The Stalin Museum has a series of rooms containing encased memorabilia




Stalin’s last cigars






스탈린이 그때 모스크바에 온 마오쩌둥과 집무실에서 얘기하고 있다.
스탈린 왼손가락에 담배, 마오쩌둥은 왼손에 책을 쥐었다.
1949년 12월 스탈린 70회(실제 71세) 생일 기념행사가 모스크바에서 있었다.
중국 주석 마오쩌둥(毛澤東)도 참석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에서 보낸 축하 휘호가 선물 전시실을 장식한다.
‘萬壽無疆 慶賀 斯大林同志七十壽辰’(만수무강 경하 사대림동지칠십수진)-.
사대림은 스탈린. 제2야전군 정치위원은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스탈린과 마오가 함께 있는 자수 그림은 흥미롭다. 마오는 중·소 우호조약 체결에 매달렸다.
 그림은 서열을 드러낸다. 안내원은 "스탈린은 냉전시대 공산세계 대부였다”고 했다.

스탈린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중국의 만수무강 휘호 선물















Stalin statue in front of the Museum

박물관 밖에 열차 객실이 전시돼 있다. 스탈린이 얄타, 테헤란 회담장에 갈 때 탔던 전용객실이다.
초록색 객차 번호는 ФД 3878. 소련 국가 휘장이 붙어 있다. 무게 83t의 방탄객차. 집무실, 서재, 화장실, 부엌이 있다.
움직이는 크렘린이다. 객차에 스탈린 체취가 남은듯하다. 그 체취에 우리 민족의 고통과 절망이 담겨있다.
그 순간 스탈린 유품은 심하게 거슬린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해외 열차 방문은 스탈린 벤치마킹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6·25 남침 계획을 수락했다. 마오는 중국 군대를 한반도에 진입시켰다.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의 싸움을 부추겼다. 그 사이 그는 동유럽의 지배권을 강화한다.
동족상잔의 참혹함은 계속됐다. 그가 숨진 4개월여 뒤 한국전쟁은 종료됐다.
 그의 그림자는 한반도에 질기게 남아 있다. 북한체제의 강압과 공포는 스탈린 방식이다.
대회장에 끝없는 박수 소리는 그 잔재다. 한국의 남남갈등 속 극렬좌파 행태에 그 잔영이 있다.
계층 가르기, 증오심 키우기, 거짓 선동, 진실 왜곡은 볼셰비키 투쟁 전략이다.
중앙일보



















스탈린 생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은 1878년 구두수선공인 아버지와 재봉사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다

지하가 구두수선공인 아버지의 작업실







스탈린은 한반도의 비극을 설계했다. 조선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그의 첫 연출이다.
분단, 공산 위성국 북한 수립, 한국전쟁에도 스탈린의 기획과 음모가 들어있다.
전시 홀은 7개다. 전시품은 800여 점(4만7000여 점 보유).
진열장 속에 한글이 보인다. ‘이·쓰딸린 저작집 1’-. ‘이’는 이오시프. 스탈린 전집의 번역책이다.
북한 관련 전시품은 그것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시품은 드물다.
스탈린은 2차 대전 승자다. 그는 히틀러를 궤멸시켰다. ‘대조국수호 전쟁’ 홀은 승전 신화로 장식된다.
크렘린 붉은 광장 승리 퍼레이드 사진, 수훈갑 주코프 원수가 기증한 T-34 탱크 전기 스텐드, 병사들의 비장한 결의,
대원수 스탈린의 득의의 미소-. 옆 전시실에 스탈린 데스 마스크가 있다. 그것은 승전 홀과 어울려진다.
박물관은 스탈린 성지(聖地)가 된다.( 전시공간 규모는 1,550)
얄타회담 사진들도 붙어 있다. 1945년 2월 흑해 휴양지 얄타에서 빅 3(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영국 처칠 총리)는 외교 게임을 했다.
나는 2010년에 가봤던 얄타회담 장소인 리바디아궁을 떠올렸다.
루스벨트의 병색은 박물관 사진에서 뚜렷하다(두 달 뒤 사망). 얄타회담은 한반도 분단의 뿌리다.
그의 야심은 동북아에서 영향력 확장이었다. 루스벨트는 그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