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연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봉들레르 2017. 6. 30. 23:05




북한에서 마지막 모습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이며 조선을 사랑하고 일본 제국에 맞선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수기집이다.

이 옥중 수기는 재판에 참고가 될 만한 과거 경력을 써 내라는 예심판사 다테마쓰의 명령에 따라 가네코 후미코가 쓴 그녀의 일대기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재판이 모두 끝난 후 판사로부터 수기를 돌려받고, 이를 동지인 구리하라 가즈오에게 보내,

구리하라가 그녀의 사후 5주년을 맞아 출간함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가네코 후미코의 말대로, 단 한 점의 거짓도 없이 그녀의 모든 생활을, 전 생애를 있는 그대로 고백한 기록으로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선물이며 유작이다.

공부를 매우 잘했고 머리가 좋았던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수기 전체에 걸쳐서 비상한 기억력과

문재 넘치는 묘사력으로 20세기 초반의 일본과 조선의 다양한 풍경과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

이 수기를 편집한 구리하라는 서문에서 "아마 누구라도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들 이 수기를

전국의 뜻있는 독자들에게 보내고 싶다."라고 말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에게는 비교적 낯선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이며

조선을 사랑하고 일본 제국에 맞선 아나키스트로서 제법 알려져 있기도 하다.
1903년 일본 요코하마 시에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9살이 될 때까지 무적자였다.

말하자면 천황제 국가의 가족제도의 희생자로서 무적자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으로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억압과 고난은 유년시절과 조선의 고모 집에서 보낸 7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시간,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계속된다.
가네코 후미코는 열일곱 살 되던 1920년 봄에 도쿄로 혼자 올라와, 신문팔이, 가루비누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을 하며 공부를 한다.

가네코 후미코가 자신을 발견하고 사회주의사상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고학을 하며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만나면서부터였다.

특히 조선인 '주의자들'(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가 섞여 있었다)과의 만남이 그녀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선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그녀는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로서 고통 받는 식민지 조선인과 가족제도의 희생물로서

노예처럼 살아온 자신을 동일하게 파악하고 그 정점이 천황제라고 인식하며,

천황제와 대결하기 시작한다. 또한 그녀는 이때 베르그손, 스펜서, 헤겔 등을 읽고, 특히 슈티르너, 니체 등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봄부터 아나키스트 박열과 동거를 하며 함께 투쟁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박열과 함께 한인 사상 단체의 효시로 평가되는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 창간호와 2호를 1922년 7월과 8월에 발간하고,

이어 박열과 함께 아나키스 단체 흑우회를 결성한다. 11월에는 박열과 함께 『후데이센징』을 창간하고

1923년 6월까지 4호를 발간한다(3호와 4호는 『현사회』로 개제).

그리고 1923년 4월 박열과 함께 대중 단체 불령사를 조직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노예적인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국가와 사회의 모순,

기존의 제도와 대결하면서 치열한 투쟁을 계속한 것이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9월 3일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검속된다.

1924년 초 예심 심문 과정에서 폭탄 입수 계획이 드러나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대역죄'로 대심원으로 넘겨져 1926년 3월 25일 사형선고를 받는다.

열흘 뒤 '은사'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죽는다.

공식적으로는 '목매달아 죽었다'라고 하나 '타살 의혹'이 있으며 지금까지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해 11월 5일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가 박열의 선영(경북 문경)에 안장된다


1926년 3월25일 일본 대심원 법정은 천황 암살을 기도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순간 가네코는 소리높여 ‘만세’를 외쳤고, 박열 역시 “재판장, 자네도 수고했네”라며 한마디 던진다.

제국 재판정은 두 아나키스트의 신체를 구속했으나, 정신은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4월5일 둘은 ‘천황의 은사’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이들은 그것을 거부한다.

‘은사’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천황을 인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7월23일 가네코는 형무소에서 스스로 목을 맨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근대사상사에서 매우 기이한 존재다. ‘탈아입구’라는 말에서 나타나듯, 일본 근대정신의 모델은 서구였다.

일본은 동아시아 식민지화를 위해 아직 서구화되지 못한 동양을 자신들이 주도해 개화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가네코는 ‘식민지의 남자’인 박열에게 “나는 당신에게서 내가 찾는 것을 발견했다”고 선언한다.

단지 한 여인의 애절한 사랑고백이 아니라, 서구로만 향해있던 일본 정신의 물줄기를 반대 지점으로 바꾼 것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이리저리 떠돌던 가네코는 9세였던 1912년 조선에 있는 고모집에 온다.

당시 가네코가 다녔던 소학교 학적부에는 그가 구타당하며 살았다는 흔적이 남아있다.

이후 3·1운동을 목격한 가네코는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 약자에 대한 연대의지를 현장에서 배운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된 가네코는 박열을 만나 공동투쟁을 시작한다.

가네코가 자결로 생을 마감한 뒤, 박열은 조선에 있던 형을 불러 연인의 유해를 거두게 한다.

가네코는 조선의 박열 가계 선산에 묻힌다. 박열은 끝내 살아남았다.

수감 22년 만인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출옥한 박열은 한국전 당시 잠시 행적이 묘연했다가 이후 북한에서 모습을 나타낸다.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회 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였다.

가네코의 기일이 되면 하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먹지도 않은 채 명상에 잠겼다던 박열은 74년 북한에서 사망했다.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