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연출

전설이 된 신비로운 스파이, 마타하리의 일생

봉들레르 2017. 6. 19. 15:51

 

 

전설이 신비로운 스파이, 마타하리의 일생

 마가레타 거트루드 젤르(Margaretha Geertruida Zelle) 검은 머리에 올리브 빛깔의 피부,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이국적인 미모의 신비로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네덜란드 사업가의 딸로 스무 즈음,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장교와 결혼했지만 1901 이혼하게 된다.

이혼 젤러는 마타하리라는 예명으로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댄서로 활약한다.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파리 물랑루즈에서 도발적인 밸리 댄스를 선보이면서다.

그녀의 고혹적이면서도 관능적인 춤은 유럽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프랑스 정계 재계의 고위층뿐만 아니라 유럽 사교계의 유력인사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매력에 빠져들었다. 

 1 세계 대전의 가능성을 품고 있던 유럽에서 각국의 최고 권력자들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언제라도 스파이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때문에 마타하리는 영국의 정보 기관으로부터 항상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세계 1 대전이 일어났을

베를린에 머무른 바람에 이런 의혹을 더욱 가중시켰다. 

 결국 그녀는 프랑스 거물급 인사들로부터 고급 정보를 빼돌려 독일 측에 팔아 넘겼다는 혐의로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서부전선에서 연이어 작전에 실패하였는데 이를 변명하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타하리에 대한 재판은 빠르고 간단하게 끝나 버렸다.

세계에서 모인 고위급 장교들은 만장일치로 마타하리가 독일군에게 매수된 스파이라고 판정했다.

결국 1917 10 15 새벽, 마타하리는 프랑스 뱅센의 사격장에서 사형 당한다.

1999 비밀 해제된 영국의 1 세계대전 관련 문서에는 마타하리가

군사 기밀을 독일에 넘기는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어떠한 결정적 증거도 없다고 밝히고 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는 없다.

다만 죽음과 함께 신화가 그녀는 지금가지도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웠던 스파이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스파이 마타하리, 어제 아침 뱅센에서 총살 당하다.

어제 아침, ‘스파이 불리는 무희 마타하리가 총살형에 처했다.

마타하리는 지난 7 24 파리의 3 전쟁 위원회에서 스파이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은 있다.

또한 그녀는 전쟁 전부터 독일군에게 금품을 받았고 베를린에서 정계 인사, 군인, 경찰들과 교제하며 독일의 스파이로 활동했다.

(중략) 1917 2 13, 마타하리는 프랑스 여행 중에 체포됐다.

 Le Petit Parisien 1917 10 16일자

 

마타하리는 1차대전 이전 파리에서 댄서로 일하면서 타고난 미모와 독특한 춤으로 사교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대중들 앞에서 옷을 벗는 일이 흔치 않던시절에 일곱겹의 베일을 하나씩 벗어가면서 알몸을 드러내는 도발적인 춤은

파격 그 자체였다. 이국적이며 관능적인 댄서로 이름을 날렸고 사교계의 꽃으로 거듭났다

1914년 마타하리는 암스테르담 독일 영사로부터 스파이로 활동할 것을 권유받았다.

마타하리는 일명 ‘첩보원 H21’이란 이름으로 프랑스 장교에 접근해 군사기밀 정보를 독일에 빼돌렸다.
이때 비밀통신에 사용된 암호가 악보였다. 일정한 형태의 음표에 알파벳 하나씩을 대응시킨 형태였다.

얼핏 보기에 평범한 악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연주하면 전혀 ‘음악’이 되지 않는다.

 

1917년 10 월15일 아침. 파리 교외 반센느 둑에 설치된 처형대에 오른 그녀는

 옷을 모두 벗어 던져 버리고 눈부신 알몸을 드러낸 채 찬란한 햇볕 아래 섰다.

제 3 군법 회의의 판결로 M.G.젤러를 스파이 혐의로 사형에 처한다 는 선고문이 낭독되고 12명의 사수가 마타 하리를 향해 정렬했다.

사형집행인이 그녀에게 나가가 눈가리개를 씌워주려 하자 그녀는 내게 손대지 마세요. 눈가리개도 필요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12자루의 소총에서 발사된 총탄을 맞고 세상을 등졌다.

이때 그녀의 나이 41세였다. 마타 하리의 주검은 해부용 시신으로 처리되었다.

 

 

사라예보에 울린 총성 비극이 시작되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 보니 어느새 더 이상 차지할 땅이 없어졌다.

이제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넘보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기운이 싹텄다.

독일 제국을 통일한 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에만 신경 쓰는 비스마르크를 해임한 빌헬름 2세는 범게르만주의를 주장하며 발칸 반도를 거쳐 서남아시아로 진출하려 했다.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의 팽창에 위기를 느낀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삼국 협상을 체결했다.

이제 유럽은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의 두 세력으로 나뉘어 팽팽히 맞서게 되었다.

날카롭게 대립하던 두 세력은 드디어 아프리카의 모로코에서 맞붙었다.

간신히 전쟁의 위기는 넘겼지만 발칸 반도에서 또다시 붙었다.

당시 세르비아 인들은 발칸 반도에 흩어져 있던 슬라브 족을 모아 하나의 큰 나라를 만들고 싶어 했다.

발칸 반도에 욕심을 내던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했지만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의 세력 확장에 대응하여 발칸 반도의 일부를 차지하면서 두 차례에 걸친 발칸 전쟁이 일어났고,

유럽은 점점 불안에 떨게 됐다.

1914년 6월 발칸반도의 사라예보에서 열아홉살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고

사라예보사건은 유럽의 화약고에 불을 붙였다.

황태자부부의 죽음으로 분노한 오스트리아가 곧바로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했으며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동맹관계에 따라 전선이 형성되고 각 나라들은 국가의 영광을 외치며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곧 유럽전체는 전쟁터였다

유럽이 전쟁터가 되면서는 스파이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특히 독일은 각국에 스파이들을 파견해 수 많은 정보를 수집했으며

연합국은 독일군의 암호를 제대로 해독하지 못해 무수한 전쟁에서 심각한 패배를 맛보았다.

하지만 이후 영국의 암호반에 의해 여러 비밀스러운 암호가 해독되었고

그 호중에는 독일군이 멕시코에 보내는 "멕시코가 미국에게 빼앗긴 땅을 찾는데 협력하겠다"는 내용이 있어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중립적인 위치에 있던 미국은 참전은 독일에 상당한 위협이 되었고

1차대전의 패배로 이어져 독일제국은 붕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