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동안 잎과 마주하지 못하는 꽃이 있다. ‘꽃무릇’이다.
한 몸 한 뿌리에 났지만 꽃과 잎이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설움이 있다.
이 때문인지 화려함이 극에 달해 오히려 처연하게 느껴지는 꽃이다.
전남 영광군과 함평군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불갑사(영광군)와 용천사(함평군)주변에는
매년 한가위를 전후로 새빨간 꽃무릇이 피어난다.
꽃무릇
상사화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있을 때는 잎이 없는 꽃이 ‘상사화’이다. 꽃무릇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꽃무릇은 상사화와 엄연히 다르다. 상사화는 우리나라가 원산지이고 봄에 잎이 난다.
상사화는 잎이 진 후 7~8월에 노란색과 분홍색 꽃을 피운다.
반면 꽃무릇은 9~10월에 붉은색 꽃을 피우며 꽃이 떨어진 후에야 잎이 피어난다. 원산지는 중국. 일본을 통해 유입됐다.
꽃무릇은 예로부터 흉년이 들어 굶주릴 때 농작물 대신 먹어온 식물(구황식물)이었다.
뿌리 즙을 내어 물감을 푼 후 탱화나 단청을 그려 넣으면 색이 바래거나 좀이 쓸지 않는다. 사찰 부근에 많이 심어진 이유다.
불갑사와 용천사가 위치한 불갑산 및 모악산 일대에는 음력 8월만 되면 온 산이 불타오르듯 꽃무릇이 피어나는 절경이 연출된다.
꽃무릇 꽃불길은 용천사 저수지 옆 꽃무릇 공원에서 시작된다.
용천사가 가까워질수록 연녹색 꽃대와 붉은 꽃의 꽃무릇이 지천에 보이기 시작한다.
1000여 년을 내려온 고승들의 부도탑지 앞 낡은 황토 담장 아래에도 꽃무릇이 줄지어 피어난다.
벡제 무왕(600년) 때 창건된 용천사, 사찰로 들어서는 실개천가와 산기슭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 곳곳이 온통 붉은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 하다.
앙증맞은 석불사이에도 꽃무릇이 피어나 있다.
용천사의 푸른 하늘에 맞서 붉게 피어난 꽃들은 가파른 구수재를 넘어 불갑산 그늘진 숲 속으로 숨어든다. 불갑사로 가는 계곡이다.
오솔길옆 단풍나무와 참식나무 아래에 2~3포기씩 피어 있다.
하늘을 덮은 나무 그늘 아래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가을 야생화가 핀 산 자락을 꽃무릇이 운치있는 화원으로 바꿔놓는다.
숲을 나온 꽃무릇은 불갑사 저수지에서 또 다시 변신한다. 푸른 물 위로 꽃무릇의 붉은 그림자가 흐른다.
호수가 오솔길을 걷노라면 물결 위로 잠시 바람이 일고 스러진 붉은 꽃잎이 무심히 흘러간다.
불갑사 일주문에서 해불암까지 약 3만평의 꽃무릇 군락지가 형성돼 있다.
불갑사 일주문에서 해불암까지 약 3만평의 꽃무릇 군락지가 형성돼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이다. 용천사에서의 꽃무릇은 야생화와 어우러져 작은 화원을 이루고
저수지 옆에선 잔잔한 잔상을 남기더니 불갑사에서 새빨간 불꽃을 피운다.
푸른 가을하늘 아래 더욱 붉게 빛나는 꽃무릇 짙은 가을색으로 물들어가는
산사의 오솔길을 걸으며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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