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Latvia(2016 Jul)

발트족와 핀족이 만나 라트비아인이 되다

봉들레르 2016. 7. 4. 18:18

라트비아인은 발트해 연안의 나라 라트비아의 주요 민족이다. 라트비아인은 발트족에 속하며 레트족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의 라트비아 민족이 형성되기 전까지 ‘라티시(라트비아인)’라는 말은 러시아인에게는 좁게는 라트갈레인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넓게는 라트갈레인과의 친족관계에 있는 모든 발트 민족을 일컫는 말이었다.

라트비아 민족은 13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라트갈레인, 젬갈인, 쿠로니아인, 셀로니아인과 같은

고대 발트 민족과 함께 리보니아인라고 불리던 핀 우그르족과의 연합으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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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는 초기 다섯 개의 지역, 쿠로니아인의 정착지(쿠제메), 젬갈인의 정착지(젬갈레), 셀로니아인의 정착지(셀로니아), 라트갈레인과 리보니아인의 정착지(비제메), 라트갈레인의 정착지(라트갈레)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 셀로니아는 13세기 초반 이미 라트비아 내의 다른 민족들과 동화되어 사라졌다. <출처: https://ru.wikipedia.org>

라트비아는 역사·문화적으로 네 개 지역으로 나뉜다. 왼쪽부터 쿠제메, 젬갈레(이상 노랑색), 비제메(주황색), 라트갈레(녹색). 젬갈레 지역은 13세기 말 정복된 곳으로 16세기 쿠를란트 공국 시절 쿠제메에 속해 있다가 후에 분리되었다. 노랑색 표시 하단의 아우그시제메는 셀로니아라고 알려진 곳으로 19세기 말부터 이미 라트갈레라고 불리고 있었다.<출처: http://ko.wikipedia.org>

라트비아인의 종교는 다양하다.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리고 정교국가인 러시아가 이웃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기준 인구의 34.2%가 개신교도이고, 24.1%의 인구가 가톨릭도이며, 정교도들도 17.8%에 달한다.

알록달록 화려함의 극치, 전통의상

 

라트비아의 전통의상. 여성의상은 상의와 치마, 조끼가 기본이며, 남성의상은 조끼와 바지, 길거나 또는 짧은 카프탄(겉옷)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제메 지역에서는 주로 줄무늬 스커트 또는 체크 스커트에 흰색의 빌라이네와 자수 장식을 선호했다. 젬갈레 지역에서는 머리에는 실크스카프를 두르는데, 미혼여성은 매듭을 머리 뒤에서 묶고, 기혼여성은 턱 밑으로 묶었다. 또는 미혼여성은 금속화관, 기혼여성은 견 레이스 두건을 쓰기도 했다. 전통 케이프인 빌라이네(villajne)는 커다란 브로치 삭타(sakta)로 고정시켰다. <출처: http://detym.samddn.ru>

라트비아 민족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전통문화를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다. 라트비아의 문화는 농경문화이다.

그들의 전통적인 주거 형태는 마당이 딸려있고 개방된 아궁이가 있는 목조가옥이다.

전통 의상은 사제복처럼 생긴 긴 상의인 루바하이다. 여성은 털실로 짠 흰색 머리쓰개를 쓰고서 전통 장신구 삭타(sakta)로 고정시켰다.

장신구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해서 가족의 여러 의식에서도 사용하였다.

장신구는 종족이나 가문, 지역 또는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혼인한 여성은 남편 가문의 장신구를 지녔다.

주거 또는 의복, 가족과 달력에도 가문을 상징하는 장신구가 사용되었다.

여성의 의복은 긴 루바하에 줄무늬 또는 체크무늬 치마, 케이프로 이루어져 있고, 지역마다 재봉법이나 배색, 장신구가 약간씩 달랐다.

머리쓰개를 묶는 위치에 따라, 천이나 레이스, 또는 비즈장식으로 화관을 만드느냐에 따라 기혼 여성과 미혼 여성이 구별되었고

명절이나 외출 시에는 앞치마를 입는 것이 예의였다. 남성의 의복은 여성의 의상에 비해 단조로웠다.

셔츠와 허리띠, 목도리와, 털모자, 장갑 차림에 흰색이나 회색 또는 청색의 옷자락이 긴 겉옷 카프탄을 입으며,

하의는 카프탄과 같은 색깔로 맞춰 입거나 또는 체크무늬의 바지를 입는다.

바지는 알록달록한 양말 안에 집어넣어 입고, 신발은 장화 또는 짚신을 신는다.

명절에는 반드시 검은색 또는 회색의 챙이 넓은 모자를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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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제메 지역의 전통의상. 금속 허리장식과 금속 장식이 달린 밝은 청색 케이프, 삭타로 잠그개를 삼았다. 머리에는 나무로 만든 단단한 틀에 금속 또는 천을 덧댄 비즈로 수놓은 화관을 썼다. <출처: http://detym.samddn.ru>

라트갈레 지역의 전통의상. 루바하와 아마로 된 어깨걸이 스나테네(snatene) 차림의 여성과 카프탄을 입은 남성. 미혼여성은 비즈로 수를 놓은 붉은 화관을 썼다. <출처: http://detym.samddn.ru>

전통적으로 라트비아는 부계적 소가족 제도로 이루어져 있다.

라트비아인은 오래 전부터 축산업과 아마재배, 채소밭 경작, 수공업으로 유명했으며, 가내수공업이 이들의 생계수단이었다.

가장인 남편이 모든 재산권을 소유했다. 대장장이 일부터 목공 일, 직물 짜기와 뜨개질 등 일상적인 집안일은 여인의 몫이었다.

습기가 많고 차가운 기후 탓에 여전히 털실로 짠 물건들을 만들어 사용하는 옛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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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갈레와 아우그시갈레의 전통 외출복 차림. 동부 지역에서는 명절에 남성들은 라테네(ratene)라고 하는 검은색 또는 회색의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여성은 흰색 머리쓰개와 앞치마를 둘렀다. 동부지역의 남성복은 단색과 장식이 거의 없는 것을 선호한다. 기혼 여성은 두건모양의 흰 모자를 쓴다. <출처: http://nacekomie.ru>

비제메와 라트갈레의 겨울 전통 의상. 남녀의 겉옷의 모양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며 카프탄의 길이와 장식으로만 구분되었다. 남성과 여성는 모두 양모피 외투를 입었다. <출처: http://peterstamps.ru>

유기농 청정 재료의 라트비아 식탁

라트비아 식탁의 전통적인 식재료는 밀가루와 곡물, 완두콩, 콩이다.

빵을 좋아하는 라트비아인은 주로 호밀가루를 사용한 신맛의 빵을 즐긴다.

라트비아인은 곱게 빻은 삼씨에서 감자와 죽에 곁들일 소스를 얻는다.

라트비아의 음식은 주로 유제품과 허브 식품, 돼지고기로 이루어진다.

전통 음식으로는 보리, 소금, 단맛 우유와 산유()를 첨가한 야채수프 ‘푸트라’와

 ‘카포스티’라고 불리는 야채수프, 우유죽, 완두콩이나 콩으로 만든 경단이 있다.

명절에는 비계가 들어간 파이와 쿠키, 육류 요리를 즐긴다.

성탄절이나 새해에는 발효시킨 양배추를 곁들인 돼지 머리를 내놓고 부활절에는 달걀과 육즙으로 만든 젤리를 먹는다.

하지() 축제인 이바노프 날에는 응유로 만든 ‘야노프 치즈’를 먹는다.

전통 음료로는 호밀가루로 만든 따뜻한 꿀물과 보리 맥주, 자작나무 수액과 단풍나무 수액이 있다.

청어와 가자미를 특히 좋아하며, 이러한 생선은 리보니아 해안과 쿠를란드 해안으로부터 신선하게 공급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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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콩 요리 <출처: http://www.oneoflady.com>

야채 수프 푸트라 <http://fudz.ru>

1752년에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리가 블랙 발삼은 라트비아를 대표하는 전통 리큐르이다.

24가지 이상의 허브를 섞은 리가 블랙 발삼은 45도의 독주로 칵테일로도 이용되고 커피나 차, 아이스크림에도 곁들여 먹는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가 리가를 방문하였을 때 심한 감기와 소화불량을 앓았는데

리가 블랙 발삼을 먹고 치료되었다고 전해지면서 의약적 효과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중동의 멋과 흥을 아는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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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Ligo, 하지 축제)에 라트비아인들은 전통원무를 춘다. <출처: http://xape.fond72.ru>

1873년부터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라트비아의 <가무 축제>. 라트비아의 <가무 축제>는 200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재에 등재되었다. <출처: http://www.latvia.travel>

라트비아인은 조용하고 서두르지 않으며 근면하다. 라트비아인은 힘든 어려움을 잘 견디며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한다.

아이가 많지 않은 가정에서 독립적으로 자라고, 성인이 되어서는 보통 부모와 떨어져 살기 때문에

라트비아인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다보니 부모에 대한 애착이 거의 없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적은 수에 만족한다.

상대적으로 사교성이 떨어지지만, 타인과의 상호관계에서는 상당히 신중한 편이다.

라트비아인은 간혹 무뚝뚝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것은 심리와 문화, 민족의 생활양식에서 형성된 것이다.

라트비아인은 수세기 동안 농가에서 고립돼 살아와서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특징적이다.

라트비아인은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정직과 근면함, 노동능력과 솜씨를 강조하며,

심지어 동향사람이라 할지라도 게으른 사람과는 친해지려 들지 않는다.

충돌을 좋아하지 않는 라트비아인은 상호관계에서 대체로 인내하는 편이지만, 전체에 해를 끼치는 타인의 단점을 용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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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돈 크레머 <출처: http://www.youtube.com>

이네사 갈란테 <출처: http://www.mucast.com>

안드리스 넬슨스 <출처: http://news.sbs.co.kr>

라트비아인은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 우리나라의 강강술래처럼 손을 맞잡고 둥그런 원을 만들어 돌며 민요를 부른다.

라트비아를 대표하는 유명 인물들 가운데에는 이사야 벌린같은 철학자와 소련시절 유명했던 혁명가나 정치위원도 많이 있지만,

유달리 예술가들이 많다는 점이 이러한 민족성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멋진 점프 장면을 찍은 유명 사진작가 필립 할스먼과 성악가 이네사 갈란테,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지휘계의 신성 안드리스 넬슨스 등이 라트비아 출신이다.

한자동맹의 중심지에서 외세 지배의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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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의 문장. 13세기 전반기 리가의 상징이던 두 열쇠가 교차된 모양 아래로 두 개의 탑이 달린 도시의 주홍빛 외벽,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황금사자, 맨 위부분의 왕관과 십자가와 주홍빛 혀를 내민 양옆의 수호 사자를 추가하여
1925년 오늘날의 리가 문장이 만들어졌다. <출처: http://pribalt.info>

13세기 말 한자동맹에 가입하면서 리가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당시 독일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구 시가지의 석조건물. <출처: http://atury.ru>

BC 9000년부터 라트비아 땅에는 사냥꾼들과 어부들, 그리고 인종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남쪽으로부터 와서 거주하기 시작했다.

BC 3000년에는 빗살무늬 토기 문화를 지녔던 종족이 동부 유럽에서 라트비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백인종이었지만 몽골 인종의 특징도 있었다. 이들이 바로 발트 핀의 조상이었다.

BC 2000~3000년 말에 비슬라 강과 오데르 강, 드네프르 강 사이의 영토에서 라트비아로 발트족이 줄무늬 토기 문화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들은 주로 농업과 축산업에 종사했다. 이로부터 약 천년 뒤 라트갈레인, 쿠로니아인, 젬갈인, 셀로니아인,

리보니아인을 비롯하여 또 다른 핀 우그르 족의 후손들이 라트비아에 터전을 잡았다.

‘라트’라는 말은 라트갈레인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말은 그들이 라트비아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원래 살고 있었던 다우가브가 강(유럽에서 드비나 강으로 알려져 있음) 상류에서 기원한 말이다.

오늘날의 벨라루스와 러시아가 인접한 국경지역에 당시 라트 문화를 따르는 민족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스스로를 ‘라티시(라트비아인)’라고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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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시내 전경 <출처: http://peopleandcountries.ru>

상인조합 검은머리길드의 활동지였던 ‘검은머리전당’ <출처: http://www.votpusk.ru>

1201년 독일 브레멘의 대주교 알베르트는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여러 지역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독일의 영토인 리보니아를 건설하였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이때부터 한자동맹의 주역도시로서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13세기 초 라트비아에는 쿠로니아인, 라트갈레인 등 여러 민족이 지역별로 흩어져 살고 있었고,

 리가 주변에는 어업과 목축에 종사하던 리보니아인(리브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리보니아인은 현재 리투아니아나 라트비아인 같은 발트족이 아니라 핀란드나 에스토니아인과 혈통이 비슷한 핀 우그르족이었다.

리보니아인은 지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해안지역에 살고 있었다.

당시 리보니아인의 숫자는 발트인에 비해 현저하게 적었지만 독일인과 접촉이 많은 해안지대에 거주했던 이유로,

‘리브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리보니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리보니아인은 정작 독일인과 동화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 사라졌지만,

리보니아인과 관련이 없는 발트인의 지역까지 리보니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올려주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역사가 바로 이 리보니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510년 리가의 시청광장에 한 상인이 나무를 쌓아올려 만든 세계 최초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졌다.

2010년 라트비아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행사를 펼쳐졌지만,

이웃 나라 에스토니아가 발끈하며 크리스마스 트리의 원조는 자신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1441년 탈린 시 청사 앞에 트리를 설치해 미혼여성과 상인들이 주위를 돌며 춤춘 것이 최초라는 것이다.

여하튼 크리스마스 트리는 라트비아에서 시작되어 독일로 널리 퍼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원조 논쟁을 떠나서 크리스마스 트리는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이 두 나라를 품고 있었던 리보니아 공국과 이곳을 오가던 상인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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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트리 탄생 500주년 기념에 세운 리가 시청 광장의 크리스마스 트리 <출처: http://nptravel.kz>

크리스마스 트리 탄생 500주년 기념에 세운 바론 거리와 아스파지야스 가로수길 교차로에 세운 분수 트리 <출처:
http://forum.awd.ru>

독일의 지배하에 놓여있던 리보니아는 이후 스웨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558년 러시아가 일으킨 리보니아 전쟁으로 리투아니아의 보호를 받는 리보란드 공국과 쿠를란트 공국이 세워졌다.

17세기 초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의 전쟁 결과, 스웨덴이 리가와 리보란드 공국을 차지하고,

쿠를란트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향 하에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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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리가의 모습 <출처: http://www.votpusk.ru>

한자동맹의 도시들 <출처: http://www.feetgroup.ru>

17세기 중반부터 쿠를란트 공국은 동방의 네덜란드를 표방하며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당시 쿠를란트 공국의 선단이 대서양을 누비고 다녔으며, 서인도 제도의 토바고와 아프리카의 감비아에 해외식민지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18세기 초 스웨덴과 러시아와의 전쟁 결과 리보란드 지역이 러시아의 지배에 들어갔고,

18세기 말 폴란드 영토가 분할되면서 쿠를란트 역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독일에 패하자,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라트비아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1939년 또 다시 소련과 나치 독일이 밀약을 맺으면서 소련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련은 라트비아를 병합했고, 이후 1991년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독립하게 되었다.

줄어가는 인구, 늘어가는 근심

라트비아인에게 20세기는 그야말로 굴곡의 역사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대가 국경을 넘어오자 50만 명 이상의 라트비아인이 러시아로 피난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인구의 1/3이 죽거나 독일로 끌려갔다.

소련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약 13만 명의 라트비아인이 해외로 망명하였고,

1953년까지 약 12만 명의 라트비아인이 죽거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한편 약 75만 명의 러시아인이 러시아보다 산업 환경이 좋은 라트비아로 이주하면서,

정작 라트비아인의 비율은 총인구의 52% 선으로 줄어들었다.

이민자 통계표 <출처: http://russiancouncil.ru>

라트비아인의 러시아로의 이주는 총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시기는 19세기 중반 라트비아를 버리고 떠나온 사람들이었고,

2차시기는 라트비아레서 행해진 스탈린의 탄압을 피해 온 5만 명에 이르는 이주민들이었으며,

3차시기는 소련 시절 자발적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1920~30년대에는 레닌그라드 지역에 라트비아 학교와 라트비아어 교육이 늘어나고 라디오 방송국에 라트비아어 분과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30년대 말부터 시작된 탄압과 전쟁으로 라트비아인의 수는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게다가 러시아인과 자연스레 섞이면서 스스로를 라트비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2005년 통계에 따르면 라트비아인의 수는 160만 명으로, 100년 전에 비해 훨씬 줄어든 수치를 보였고,

소련으로부터 독립되고 난 이후에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다.

라트비아가 EU에 가입한 이후 서유럽으로의 대량 이민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현재 라트비아인은 라트비아 이외에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스웨덴, 영국, 독일, 미국, 캐나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남아메리카, 카자흐스탄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1935년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

손에 들고 있는 세 개의 별은 라트비아의 세 문화권인 쿠제메, 비제메, 라트갈레를 상징한다.

동상이 세워질 당시 젬갈레 지역은 독립된 행정구역이 아니어서 별이 세 개만 있다.

 

 

 

라트비아는 1991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후 친미, 친서방 정책을 펴고 있다.

독립 직후부터 라트비아어 사용을 의무화하는 민족주의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인구가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지정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어가 능통한 사람이 인구의 81.2%를 차지하고,

37.5%가 모국어로 러시아어를 사용할 만큼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상당해서, 러시아인과 갈등을 겪고 있다.

수도 리가만 하더라도 라트비아인보다 러시아인이 훨씬 많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라트비아 내의 여러 다른 민족이 라트비아어와 라트비아의 문화와 전통을 배우지 않으려하는 것도 문제가 되고 있다.

라트비아인이 가진 예민한 민족문제에는 미묘한 감정의 차이가 있다.

지식층과 젊은이들 사이에는 일부 다른 민족을 무시하는 태도가 형성되어있다.

어떤 이들은 과거 소련에 속해 있을 때 겪었던 민족적 설움으로 인해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고 보기도 한다.

 라트비아인은 국제관계라는 미묘한 상황 속에 라트비아에 사는 상당수의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폴란드인과 복잡한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라트비아의 민족성이라면 이러한 문제들은 차츰 좋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은경 |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초빙연구원

참고문헌
·http://otvetila.ru/laboratornye/latyshi/
·http://www.gumer.info/bibliotek_Buks/Psihol/krusko/03.php
·http://www.hrono.ru/etnosy/baltika/latyshi.php
·http://www.etnolog.ru/people.php?id=LATY
·http://en.wikipedia.org/wiki/Latv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