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천시내에 있다
조견당은 7대째 내려오는 고택으로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종손인 김씨는 조견당의 선조 중에는 높은 벼슬을 하거나 대단한 치적을 남긴 인물은 없었다고 말한다.
당파 싸움이 심했던 조선 숙종 때 노론의 대부인 송시열과 각을 세우다 반대파의 세력에 밀려
한양에서 숨어 내려온 그의 조상이 터를 잡은 곳이 이곳 주천강 인근이었다고 한다.
쇠락의 길을 걷던 집안이 어떻게 지방에서 1백20칸이나 되는 규모의 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당시에 이곳의 유일한 교통로는 수로였어요. 이곳 주천강 주변은 상류와 하류의 물산들이 오가는 물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서해안에서는 소금이나 새우젓, 경기도 광주에서는 옹기나 도자기가 올라왔고,
대신 이곳에서 나는 목재와 약재들이 배에 실려 다른 지방으로 내려갔죠.
저희 할아버지는 집 앞에 선착장을 만들어 모든 물류가 통과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렇게 상업으로 커다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조상의 재기로 큰 부를 얻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안채뿐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주천강가에 있던 소나무 숲을 벌목해 안정된 농토를 만들어준다는 미명 아래
강에 제방을 만들면서 조견당의 행랑과 별채, 정자도 사라지고 말았다.
또 강원도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한국전쟁 때는 국군과 인민군이 교대로 진주하며 조견당을 숙소로 쓰는 바람에 많은 소실이 있었다.
조견당은 종손의 재건과 복원 노력으로 풍요롭던 시절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그의 어머니인 고 김휘선 여사의 고택에 대한 사랑과 자식 교육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매년 농사가 시작되는 3월 삼짇날 고사를 지내셨어요.
흙을 건드리기 전에 땅의 신에게 농사를 보고하며 집안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거죠.
고사 때는 늘 소나무 가지에 명주실, 한지로 장식한 성주대를 손수 만드셨는데
이것 하나하나에 깊은 뜻이 담겨 있죠. 명주실은 무병장수를 뜻하고, 한지는 그 쓰임새가 끝도 없는 생활용품의 으뜸 소재죠.
가장 주목할 점은 소나무 가지인데, 어머니는 늘 상순을 꺾어 사용했어요. 후손들에게 남의 곁가지 노릇을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죠."
2000년 봄, 돌아가시던 해에도 어머니는 산에 올라가 직접 소나무를 골라 성주대를 만들었다.
현재 조견당에 걸려 있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솜씨다. '이리 정성을 쏟았는데 너희가 잘못될 것이냐.'
그것은 어머니의 무언의 교육이었다. 김씨는 늦게 낳은 귀한 딸에게 할머니의 이름자를 붙여 '휘영'이라고 지었다.
김씨 집안의 버팀목이 된 여성, 어머니를 본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레이디 경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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