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Uzbekistan(2014 Aug)

6-11 아미르 티미르 묘-구르에미르

봉들레르 2014. 8. 29. 21:39

 

구르에미르 (Мавзолей Гур-Эмир)

구르는 묘, ‘에미르는 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구르 에미르는 왕의 묘"라는 뜻으로, 아미르 티무르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 손자 등이 잠들어 있는 티무르 왕족의 묘이다.

푸른 도시라 불리는 사마르칸트에서도 한층 더 푸르름이 돋보이는 장대한 건축물이 아닐까 한다.

원래 이 장소는 티무르의 손자인 무하마드 술탄을 위해 건설된 메드레세와 하나카가 있었는데,

그러나 1405년 오트라르 원정에서 무하마드 술탄이 전사를 하자,

티무르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 장소에 묘를 건설했는데, 불과 10일만에 묘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묘는 1404년에 완성되었지만 1년 후 중국원정 중에 급사한 티무르 자신도 이곳에 묻히고 만다.

티무르는 원래 자신의 고향인 샤흐리샵스에 잠들길 원했고, 그곳에 묘도 조성을 했었다.

그러나 살아서는 세상을 호령했던 왕이었지만 죽어서는 자신의 뜻대로 이루질 못했다.

현재 티무르의 손자가 건립한 메드레세와 하나카는 그 터만 남아있으며, 묘만 화려한 모습으로 서있다.

묘 내부는 1996년 수리가 완료되었고 건설 당시의 아름다움도 돌아왔다.

내부를 둘러싼 문양에는 금 3Kg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티무르의 묘는 흑녹색의 연옥(중국산이라고 한다.)으로 만들어졌고 중앙에 놓여져 있다.

그 북쪽에는 티무르의 선생, 손자 한 명, 동쪽에는 무하마드 술탄, 남쪽에는 울루그벡,

서쪽에는 가까운 쪽부터 아들 샤루흐, 이름모를 손자, 아들 미란샤의 묘석이 나란히 있다.

이것은 모두 묘의 위치를 표시한 묘석으로 진짜 관은 이 지하 3m에 있는 묘실에 같은 순서로 묻혀있다.

그리고 항상 머리는 메카 방향으로 안치되어있다.

입구

 

 

 

 

푸른돔의 아름다운 모습

 

 

 

 

 

 

 

 1996년에 3kg의 금으로 문양을 장식하고 수리를 했다는 내부는 참으로 화려하다.

티무르의 관 뒤쪽에는 '내가 이 관으로부터 나갈 때 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는데,

 구소련 학자들이 1941년 관을 연 다음날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가장 큰 대리석관은 티무르 스승의 관인데 티무르는 스승을 너무 존중한 나머지

자신의 묘보다 더 크게 만들도록 유언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검은 색을 띤 이 돌은 1425년 몽골전투에서 승리한 울르그 벡에게 보내진 돌이라고 한다.

1740년 이란의 Nadir Shah가 부하라를 정복하고 Meshed로 가져가 성소에 쓰려고 했으나 티무르의 스승

Mir Said Baraka가 그의 꿈에 나타나 돌려주라고 하여 나디르샤가 겁을 먹고 돌려주었다.

이 돌은 그 후 사마르칸트로 운반 중에 강에 빠져 똑같이 2개로 갈라진 것을 무덤에 사용했다.

 

1941621, 구 소련의 사마르칸트에 있는 구르아미르에서

소련의 고고학자들이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 티무르(13361405)의 무덤을 발굴했다.

구르아미르는 원래 티무르가 자신이 아끼던 손자 무하메드 술탄의 죽음을 추도하기 위해 지은 사원으로,

티무르 자신도 중국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떠났다가 병사 후 이곳에 묻혔다.

티무르의 관은 흑갈색 연옥으로 만들어졌으며 그의 아들, 두 손자 그리고 스승의 관과 함께 사원 안에 안치돼 있다.

 

티무르가 사망한 해가 1405년이므로,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는 이 사원이 5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굴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이때 갑자기 발굴이 행해진 것은 스탈린의 명령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스탈린이 왜 티무르의 유골을 필요로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스탈린은 세계 정복을 꿈꿨던 티무르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티무르에 과도하게 집착했다고 한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상당히 엉뚱한 이유로 진행된 이 작업이 티무르 유골 발굴이란 뜻하지 않은 성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화려한 관은 당연히 도굴됐지만 그 관은 위장이었다. 티무르의 진짜 유해는 관 아래의 땅 4m 지하에 묻혀 있었다

티무르는 20대에 대상을 습격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오른쪽 다리와 오른 팔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 후유증으로 티무르는 절름발이가 됐다. 구르아미르에서 발견된 티무르의 유골을 살펴본 결과

유골의 오른쪽 다리가 불구(양쪽 다리 길이가 달랐음)였고 오른 팔에도 상처를 입은 흔적이 남아있었고

손자 울르그벡이 아들의 반란으로 목 잘려 살해되었다는 것 등이 증명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