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Czech(2013.Aug)

3-11 재앙의 도시-성모마리아교회(Church of Our Lady)

봉들레르 2013. 9. 16. 08:57

 

 

 

가운데 위치한 광장에 교회

 

독일 작센 주의 주도 드레스덴에 위치한 루터교회 드레스덴 프라우엔키르헤 (Frauenkirche; Church of Our Lady; 성모 마리아 교회

독일 작센 주의 주도 드레스덴에 위치한 루터교회로, 독일어로 '성모 교회'를 의미한다.

모양의 석조 이 인상적인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잔해는 그대로 방치되어 공습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평화 운동을 상징하다가

독일이 통일된 후 본격적으로 재건 프로젝트가 가동되어 2005년 10월 30일 재축성식을 거행하고

 과거의 모습을 되찾아 60여년만에 드레스덴 시민 곁으로 돌아왔다.

프라우엔키르헤는 재건 과정에서 전쟁 때 적대했던 국가들이 서로 힘을 합쳐 복구를 도운 화해의 상징이기도 하다.[

폭격으로 검게 탄 부분과 새로 보수한 흰부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13일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이 개시되었다.

 

프라우엔키르헤는 이틀 밤낮 동안 공습을 견뎠지만 65만발의 방화폭탄이 투하되어 교회 내부의 온도가 1,000도를 넘어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돔이 폭발하면서 붕괴했다.

무너진 시각은 1945년 2월 15일 오전 10시. 고온으로 녹아내리고 검게 그을린 수천 조각의 돌무더기가 폐허를 뒤덮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동독 정부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드레스덴 시민들은 폐허에서 파편을 골라내 번호를 매겨 보관하면서

언젠가 프라우엔키르헤의 재건이 시작되는 날 파편을 재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고,

잔해를 밀고 그 자리에 주차장을 만들려던 당국에 항의해 계획을 철회시켰다.

교회 자리에 남은 시커먼 돌들은 평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동독의 다른 큰 교회들은 그에 가세하여 공산주의의 붕괴와 동서독의 통일로 가는 한 걸음이 되었던 인권 저항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최초의 프라우엔키르헤는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마이센 교구의 주교좌가 설치된 가톨릭 성당이었으나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바뀌었다.

1727년 낡은 교회를 허물고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교회를 짓자는 의견이 대두했다.

신교도였던 드레스덴 시민들의 성원으로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폴란드 왕이 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도 교회 건축을 지원했다.

 

바로크 양식의 프라우엔키르헤 설계는 건축가 게오르게 베어(George Bähr, 1666.3.15~1738.3.16)가 맡아

 1726~1743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었다. 베어의 설계는 기존의 교회와는 달리 정면을 생략하고

제대, 성단소, 세례반, 파이프 오르간을 신도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배치한 파격적인 평면 구성을 취했다.

베어는 교회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38년에 세상을 떠나 프라우엔키르헤의 지하묘실에 안장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요한 게오르그 슈미트가 나머지 공사를 마무리지었다.

유명한 오르간 제작자 고트프리트 질버만(Gottfried Silbermann, 1684.1.14~1753.8.4)가 설치한

파이프 오르간은 1736년 11월 25일에 봉헌되었으며 같은해

12월 1일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이곳에서 오르간 연주회를 가졌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프라우엔키르헤의 독창적인 석조 은 그 모양에서 기인해

 슈타이네르네 글로케(Steinerne Glocke), 돌 종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에 필적하는 공학적 성과인 베어의 돔은

8개의 기둥이 12,000톤 무게의 사암 돔 구조를 지탱하도록 되어 있었다.

여지껏 보지 못한 구조라서 안전성을 문제삼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완공 후 약 20년이 지난 1760년,

 7년 전쟁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대가 프라우엔키르헤를 향해

100여발의 포탄을 쐈음에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아 안전성을 입증했다.

 종 모양의 돔이 만드는 우아한 윤곽은 200년간 드레스덴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했다.

1747년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의 궁정화가로 초빙되어 드레스덴으로 온 베네치아 출신 화가 베르나르도 벨로토가

드레스덴을 배경으로 그린 13점의 풍경화 중에도 프라우엔키르헤의 돔이 등장한다. 

 

 
 

재건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된 사람은 건축가인 에버하르트 부르거(Eberhard Burger, 1943.7.26~)였다.

 그는 베어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1993년부터 공사에 들어가 1994년 첫 번째 돌을 놓고

1996년 지하교회, 2000년 내부 돔을 완성했다.

재건에 사용되는 자재는 가급적 폐허에서 찾아낸 잔해를 재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3차원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도움으로 파편의 원래 위치를 파악해 제자리에 맞물리도록 했다.

드레스덴 시민들이 보관하던 잔해 중 실제로 건축에 재사용된 잔해는 약 3,800여개로,

불에 타서 어둡게 바랜 색깔 때문에 위의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자재와 비교했을 때 금방 눈에 띈다.

 
프로젝트 관계자들은 교회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과 수천 장의 고사진,

 교회 건설 때 사용된 모르타르와 도료의 주문서 등을 토대로 원형을 되살리려 했다.

참나무로 만든 교회 정문을 복원할 때는 문에 새겨진 조각에 대한 막연한 묘사만 남아 있었지만,

프라우엔키르헤를 구경한 관광객이나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교회 정문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에 착안해

 정문이 찍힌 사진을 공모했고 결혼사진첩을 통째로 보내준 것을 포함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에 정문의 원래 모습을 재현할 수 있었다.

지붕 꼭대기에 있는 종루에 얹혀진 금박 십자가는 영국의 그랜트 맥도널드 사가

 18세기 기술과 최대한 유사하게 만들었으며, 런던 출신의 금세공사 앨런 스미스가 조립했다.

완성된 십자가는 영국 본토 항공전 때 공습 피해를 입었던 코번트리 대성당, 리버풀 대성당,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세인트 폴 대성당 등을 거쳐

2000년에 켄트 공작 에드워드가 프라우엔키르헤에 전달했다.

 이 십자가는 2004년 6월 22일 종루 위에 세워지면서 외관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1885년 교회 앞에 세워졌다가 공습 때 한쪽으로 쓰러진 채 그대로 방치되었던 마르틴 루터의 동상도 다시 원위치에 세워졌다.

다만 파이프 오르간은 질버만의 원설계도가 남아 있음에도 복제품 대신 새것을 설치하기로 결정해 2005년 4월에 작업이 끝났다.


 

마침내 2005년 10월 30일, 완공 예정일보다 1년 앞서 공사가 끝난 프라우엔키르헤의 재축성식이 거행되었다.

 드레스덴 창건 800주년인 2006년을 한 해 앞둔 시점이었다.

부활한 프라우엔키르헤는 드레스덴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아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명소이자

전쟁으로 소실된 역사적 건축물이 성공적으로 재건된 사례가 되었다.

Kuppelfragment vor der Frauenkirche

 

 

 

 

교회앞에 마르틴 루터 동상

   

 

 

 

                    

 

아우구스트 거리의 슈탈호프 벽 '군주의 행렬' 벽화로 웅장하면서 장관을 이룬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작품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데... 높이 8m에 길이 약 100m 정도이다.
1870년대 그려진 이 벽화는 세계 3대 도자기 브랜드로 꼽히는 마이센 자기 타일(약 25,000개)에

 그라피토(sgraffito)기법으로 그려 넣은 벽화이다. 

총 등장 인물 93명 중 33명이 왕자를 비롯한 귀족으로 드레스덴에서만 볼 수 있는 자기 벽화이다.

 

 

 

길거리 연주를 들으면서

드레스덴의 여정을 마무리 한다.

저녁 5시30분에 프라하로 출발했다.

8시 숙소에 도착하여 체크인

. 독일 차량 맞춤투어 300€, 프라하 신기식(드레스덴 Dresden, 작센스위스의 바슈타이, Bastei)

투어비 추가 (신기식) 50

드레스덴의 악몽

독일의 드레스덴은 슬라브어로 '숲 속의 사람'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도시이다.

또한 옛 작센 왕국의 수도로서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인 츠빙어 궁 등

역사적인 건축물과 문화재가 많아 "엘베의 피렌체"라고 불리워졌을만큼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리하여 드레스덴만은 연합국의 폭격을 끝까지 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피난민들에 의해

60만이던 도시 인구는 1945년 초 100만 혹은 120만까지 늘어났다고 추정된다.

이에 독일 정부는 짙어지는 패색을 지우기 위해 성 발렌타인 데이를 앞두고 13일에는 대규모의 시민 축제를 벌리기도 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연합군이 승리하면 전후 독일 수도를 드레스덴으로 옮긴다는 이야기와

처칠의 친척이 드레스덴에 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폭격에 대해 안일했다.

 

  

그러나 피난민들의 기대와 달리 1945년 2월 13일과 14일 이틀간 연합군은 드레스덴에 폭격을 가한다. 

영국폭격기 244대와 미국 폭격기 450대가 동원되었고, 13일 밤의 1차 공습에서는 46만개의 폭탄이,

다음 날 새벽 3시의 2차 공습에서는 단 20분 동안 28만개의 소이탄과 1만 1천개의 지뢰가 집중적으로 투하되었다.

소이탄은 불붙은 인이 넓은 범위로 퍼져나가 오랫동안 타도록 만들어진 폭탄으로,

폭격을 당해 파괴당한 건물과 시가지는 불바다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14일 아침 11시 30분, 3차 공습이 30분간 더 이어졌다.

드레스덴 폭격 사건의 경우 3차례의 공습에 쏟아부어진 폭탄은 약 7천톤이었고, 공식적인 사망자는 약 3만 5천명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신원 확인 없이 매몰시킨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하고,

잿더미가 된 건물의 경우 아예 시체 발굴 작업이 포기되었다고 한다. 피난민의 신원 파악이 어려웠던 점,

주거 지역의 반과 산업지대의 4분의 1이 화재로 소실된 점 등을 고려하여

역사학자에 따라서는 사망자의 수를 13만 명에서 25만명까지 거론하기도 한다.

 

폭격의 명분은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 저항을 방해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드레스덴이 지역 폭격 전술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역 폭격 전술이란 전략적 목표물을 공격하려다 독일 군의 대공 방위망에 의해 폭격기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에,

폭격기들이 고도 비행을 하며 목표물은 물론 그 일대의 모든 지역을 파괴하기 위해 대량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다.

즉 지역 폭격 전술은 민간인까지 전쟁의 희생자가 되는 반인륜적 전술이라 하겠다.

게다가 드레스덴 폭격은 전략적 판단이 아니라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런던 공습에 대한 보복성 공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동원된 폭격기나 폭탄은 미국이 훨씬 많았으나, 작전을 계획하고 지역 전술을 선택하여

소이탄 사용을 불사한 것은 영국측 입장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 영국 내에서도 피난민이 집결된 드레스덴 폭격을 반대한 참모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의 전쟁영웅 해리스 원수가 처칠의 지지를 등에 엎고 작전을 강행한 것이다.

 

전 후 동독의 치하가 된 드레스덴의 별명은 '영원한 공사장'이다. 츠빙어 궁을 복원하는 데 20년이 걸렸고,

아직도 드레스덴의 전후 복구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드레스덴의 폭격의 폐허 속에서 재건한 궁전, 성당, 박물관은 복원했다. 

마치 현무암 덩어리처럼 시커먼 이유는 불에 타서 그을린 잔존물로 복원했기 때문이다.

하기에 '드레스덴 지역 폭격'의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쿄 대공습이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에 버금가는 비극으로 오늘날 평가된다. 

또한 드레스덴 폭격은 독일 내 극우파의 득세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2월 폭격 60주년을 맞아 드레스덴에서 열린 추모 행사는 전후 최대 규모의 극우파 시위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나치를 추종하는 5천여 명의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이날 드레스덴 곳곳에서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미 2004년 가을 드레스덴이 속한 작센주는 사실상 히틀러를 추종하는 국가민주당(NPD)에게 10% 가까운 지지율을 보여 

국가민주당을 처음으로 주의회에 진출시킨 바 있다. 이대로 드레스덴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의 비극의 현장이 될런지 두고 볼 일이다.

또 다른 비극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서 전쟁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제 지역 폭격 전술은 미국이 벌이는 전쟁의 기본 전술이 된 것이다.

지금은 세종시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독일설명 http://reisende.tistory.com/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