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이야기]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다 - 알폰스 무하, ‘지스몽다’
무명의 젊은 화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대형공연 포스터 의뢰
여배우 마음에 쏙 들어
순식간에 성공한
‘아르누보’의 대명사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인생이 확 바뀌는 경우가 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 궁색한 쪽방에서 얼마 안 되는 월세도 내지 못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젊은이가 있다고 하자. 그가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주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19세기말 체코 출신의 화가,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 1860~1939)의 이야기다.
사건은 프랑스 파리, 1894년의 크리스마스 연휴로 거슬러 올라간다. 먹을 것이 너무 없어 쥐도 사라진 텅 빈 작업실에 앉아 꽁꽁 언 손을 부비고 있던 무하에게 친구 하나가 급한 숨을 몰아쉬며 찾아왔다.
“내가 지금 바로 휴가를 떠나야 하는데 말이야. 좀만 도와주라, 응? 복 받을 거야.”
친구 대신 인쇄소로 가서 꼬박 이틀 걸려 최종 교정 작업을 하던 무하, 이번엔 인쇄소 매니저가 그를 보고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몰이 연극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주연하는 ‘지스몽다’의 공연 포스터를 그려달라는 것.
연휴 기간 동안 포스터를 인쇄해 새해 첫 날 아침부터 파리 거리에 도배하듯 붙여야 했지만, 그려놓은 포스터는 사라에게 퇴짜를 맞은 상태고 다른 후보 화가들은 모두 휴가 중이었다. 무명의 무하에게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감히 꿈도 못 꿀 사라 베르나르를 그릴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물론 기회가 주어진다고 누구나 그걸 잡는 것은 아니다. 무하가 펼쳐 보인 사라 베르나르를 본 인쇄소 사장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어렸을 때 포스터를 그리던 기억을 되살려보라. 포스터는 눈에 선명하게 잘 띄어야 한다. 강렬한 인상과 명확한 전달을 위해 선의 쓰임이 단순해야 하고, 원색이 주로 사용되며, 배색도 제한된다. 그런데 무하의 ‘지스몽다’는 포스터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고개를 푹 떨어뜨린 채 터덜터덜 집에 걸어 온 무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포스터의 주인공인 사라가 중세풍의 신비로운 이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니 당장 계약을 맺자는 소식이었다.
드디어 1895년의 새해 첫날이 밝았다. 시내 곳곳에 포스터가 걸리자 사라의 광팬들이 무하의 그림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심지어 어떤 이는 몰래 포스터를 뜯어가기까지 했다. 이렇듯 무하는 사라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순식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라는 무하가 제작한 이미지를 좋아한 나머지 무대 의상과 보석은 물론, 무대 디자인까지도 무하에게 맡겼다. 이미 오십대에 접어든 그녀는 결코 예쁘고 깜찍한 미모는 아니었으며, 그런 식으로 자신을 포장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사라는 극중에서 남자주인공 역할도 간혹 맡았고 진짜 남자보다 더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
물론 어렸을 때에는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에게 휘둘려 끊임없는 염문을 뿌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중년의 그녀는 혼자 우뚝 서서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지시하는 자신만만한 배우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무하는 한 눈에 파악한 것이었다. 사라를 무작정 젊고 예쁘게만 표현한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무하는 강하고 단호하며 프로다운 모습을 부각시켰다. 젊은 남자가 중년의 여자를 그토록 잘 읽어 냈다니 놀라운 일이다.
문화의 화려함이 극치에 달한 1900년 파리에서는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드레스자락의 주름,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 비비 꼬인 뱀들, 환각을 자아내는 꽃 장식 등 무하가 즐기는 모티프가 세라믹과 유리 공예품부터 철제 등에 이르기까지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주문을 받은 무하는 개막식 직전까지 밤샘 작업에 열중했다. 불과 몇 년 전 무작정 파리로 와 콩만 먹으며 난로도 없이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던 체코의 한 청년을 문득 생각한 그는 미소 지었다.
어둠이 사라지고 동이 터오는 가운데 포스터 맨들이 작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복잡한 패턴의 무하 스타일 그림들이 줄줄이 거리에 나붙고 있었다. 어느새 무하는 파리의 새 유행인 ‘아르누보’의 대명사가 된 것이었다.
*아르누보(Art Nouveau) :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으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유행한 미술 양식. 넝쿨식물을 연상시키는 구불구불한 선, 화려한 꽃무늬 등을 모티프로 꽃병, 카펫, 철제난간, 가구 등 다양한 공예작품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이주은 성신여대 교수·미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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