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스톤
상형 문자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원정하였다. 나폴레옹은 3만 8천의 군대말고도 학자 175명을 데리고 갔었는데 그들은 닥치는 대로 이집트의 유물들을 긁어 모았다. 그러나 1801년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영국군에 패하는 바람에 몽땅 빼앗겼지만, 복사된 자료만으로도 학자들이 연구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렇게 알려지기 시작한 이집트의 고대 문명에 대하여, 당시 유럽인들이 느낀 흥분과 감동은 참으로 엄청났다.
아주 짧은 유럽의 역사와 그보다 조금 앞선 로마 역사밖에 모르던 유럽 사람들에게 로마를 수천 년이나 앞선 이집트 문명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유럽이 아직 원시적인 사냥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집트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이집트의 수천 년 문화 유산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인 피라밋 하나도 2톤짜리 돌 250만개로 쌓여진 엄청난 것이며, 노예 10만명과 10년이란 세월이 걸린 것이었다.
이집트의 문명이 알려지면서 부터, 유럽 사람들은 이집트의 유물, 유적들을 눈으로 보게 되었지만, 거기에 담겨있는 속뜻은 알 수가 없었다. 글자로 보이는 이상한 부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무덤 안의 벽화나 탑에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잉크 스탠드나 지팡이에까지도 '상형문자'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단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유명한 동양학자 드 사시(De Sacy) 조차도 '과학의 힘만으로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풀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1799년 나폴레옹 원정군이 알렉산드리아 동쪽 60Km 로제타 (
※ 민용문자 : 상형 문자가 세속적, 종교적인 데에 두루 쓰인 승용 문자로 바뀌었다가, 더 단순한 흘림체로 변한 것. 민용 문자가 국민들에게 널리 쓰이자 승용 문자는 종교적인 데에만 쓰이게 되었다.
로제타스톤은 영국군에 빼앗긴 다른 유물들과 함께 대영 박물관으로 보내 졌지만, 석고로 뜬 사본은 파리로 갔다. 학자들이 연구해 보니 같은 내용을 세가지 글자로 써놓은 것이었다. 학자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스어를 아는 이상 나머지 두 가지 문자를 푸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므로, 이집트 문명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언어, 역사,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두 이 일에 매달렸다. 그들은 이집트의 부호가 한자와 같은 뜻글자라고 생각하고 해독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천재 언어학자 샹폴리옹이 나타나기 까지 어느 누구도 이것을 풀지 못하였다.
샹폴리옹 (Champollion)
샹폴리옹은 1790년 남프랑스 피지에끄에서 태어났다. 샹폴리옹이 7살 때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원정하고 있었다. 그 무렵 샹폴리옹은 여섯 살이 되기도 전에 읽고 쓰기를 마친 천재 소년으로서 책더미에 파묻혀 지내고 있었다.
그가 11살 때인 1801년. 맏형 쟈끄가 그를 그로노블로 데려가 사립학교에 입학 시켰다. 쟈끄는 훌륭한 언어학자였지만, 동생이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쉽게 익히는 것을 보고는 동생을 뒷바라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동생이 샹폴레옹 가문의 이름을 빛내도록 샹폴리옹이란 성으로 불리워지게 하고 자기는 피지에끄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도록 애썼다.
그해 어느날, 유명한 학자 푸리에가 학교에 왔다가 천재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의 뛰어난 지능에 탄복한 푸리에는 샹폴리옹을 집으로 초대하여 이집트 유물을 보여 주었다. 푸리에는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에 갔다 온 사람이었다. 어린 샹폴리옹은 파피루스와 돌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보자, 금새 거기에 빠져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로제타 스톤의 사본을 보자 보석처럼 빛났다. 소년은 그것을 해독하여 읽어 보기로 결심을 했다.
샹폴리옹의 머리는 너무 뛰어나 아무도 그를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그는 열두 살 때 첫 책을 썼다. 열세 살이 되자 아랍어, 시리아어, 칼데아어와 이집트의 콥트어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이런 공부를 위한 자료는 모두 그의 형이 마련해 주었다.
1822년 샹폴리옹은 마침내 상형문자를 푸는 기본원리를 발표했다. 그가 '상형문자가 소리글자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발표하자 학자들은 모두 놀랐다. 그때까지 모든 학자들은 이집트의 기호들을 그림문자로 보아 뜻글자로 해독하려 했다. 이 잘못은 기원 후 5세기 호라플론에서부터 시작되어 1300년간 그대로 되풀이되어 왔다. 학자들은 상형문자가 마지막으로 쓰여진 시대에 자기들 보다 더 가까이 살았던 호라플론의 풀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그림과 다름없는 부호들, 그것을 그림 문자로 보아, '굽이치는 선' 세 개가 '물'을 나타내고 '깃발'이 '신'을 나타낸다는 풀이를 누가 의심했겠는가?
샹폴리옹의 성공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호라플론에게서 등을 돌린 데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그의 천재적인 영감에서 나온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이집트의 기호들이 '그림'이 아니고 '발음기호'라는 생각이 떠오른 그 순간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커다란 수수께끼를 푸는 위대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의 글자들을 풀려면 왕의 이름부터 풀어 나가야 한다고 깨달았다. 그리스 말에 쓰여진 내용은 성직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칭송한다는 것이므로, 이집트 부호들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 있을 것이다. 어떤 부호가 '프톨레마이오스'를 나타내는지 알면 적어도 서너가지 발음기호는 알 수 있을 터였다. 샹폴리옹은 부호들 가운데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부호에 주목했다. 특별히 강조된 것이라면 왕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옳았다. 그는 1821년에 고고학자 뱅크스가 영국으로 가져간 필레 섬의 오벨리스크에 적힌 부호들과 견주어 보았다. 이 오벨리스크에도 상형문자와 그리스 문자가 함께 씌어 있어 제2의 로제타스톤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오벨리스크의 그리스 말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나왔는데, 상형문자에도 로제타스톤의 것과 똑같이 타원에 둘러 쌓인 부호가 있었다. 그 부호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나타내는 부호였다. 이발견은 상형문자 해독을 위한 첫 성공이었다.
위대한 발견은 계속된다. 펠레섬의 오벨리스크에는 프톨레마이오스왕 말고도 타원으로 둘러싸인 부호가 또 있었다. 그리스어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타원 부호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틀림없었다. 샹폴리옹은 프톨레마이오스를 나타내는 부호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샹폴리옹은 두 부호에 다 나오는 기호들을 찾았다. 그것들은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군데 다있는 발음기호이니, P, O, L 이고, 그 기호들이야 말로 P.O.L의 발음 기호임에 틀림없었다. 두번째 성공이었다.
얼마 뒤 샹폴리옹은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서 옛 이집트의 파라오 이름과 통치기간이 하나도 빠짐없이 적혀있는 파피루스를 찾았다. 다른 사람이 무심코 지나치던 것을 그는 알아 보았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이것을 자료삼아 이집트에 통일 왕조가 생긴 때를 기원전 5867년이라고 계산했다. 샹폴리옹은 1828년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이집트를 여행했다. 여기서 그는 자기의 풀이가 옳음을 확인하였다. 모든 신전.왕궁.무덤들의 비문이 그의 풀이와 딱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가 이집트에서 돌아오자 프랑스왕 샤를 10세는 칙령을 내려 이집트학 강좌를 열었다. 초대교수로 취임한 샹폴리옹은 그러나 얼마 안 가 죽고 말았다.
샹폴리옹이 죽자마자 곧 영국과 독일의 학자들이, 그가 단순한 상상력으로 어거지 풀이를 했다고 비방했다. 1866년이 되어서야 독일인 렙시우스가 샹폴리옹의 이론을 지지했다. 1896년에는 레어프가 영국 학사원에서 그를 찬양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연설을 했다. 그가 죽은지 64년만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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