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Egypt(2007.Feb.)

[스크랩] 1922.11.26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 발굴

봉들레르 2010. 2. 17. 09:52

<!-BY_DAUM->1922.11.26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 발굴

 

1922년 11월 26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이집트 룩소르 지역 왕들의 계곡에서 투탕카멘 왕(기원전 1333∼기원전 1323 재위)의 무덤을 발견했다.


카터는 10년 동안이나 투탕카멘 무덤의 유물 운반작업을 감독했는데 투탕카멘 왕의 무덤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굴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무덤이 극성스러운 도굴꾼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람세스 1세의 무덤 덕분이었다.


투탕카멘의 무덤 바로 위에 람세스 1세의 무덤을 만들 때 많은 돌 부스러기가 골짜기의 비탈을 따라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투탕카멘의 무덤이 두꺼운 토사층에 덮여 버린 것이다. 투탕카멘 왕의 미라는 3중 관 속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제일 안쪽의 관은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왕의 머리에는 찬란한 황금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투탕카멘[ Tutankhamen ] 본명은 Tutankhaten. ?~?

BC 14세기에 활동한 이집트의 왕(BC 1333~1323 재위).

 

이집트 신왕국 때의 왕실 복식:길고 넉넉한 더블 스커트를 입은 투탕카멘(BC 1333~1323 재위)과 가슴 부위에 아름답게 주름을 잡은 로브(robe)를 입은 왕비 앙케세나멘, 투탕카멘의 옥좌 뒷면(부분), 카이로에 있는 Egyptian Museum 소장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장의용 황금 마스크(BC 14세기), 카이로에 있는 Egyptian Museum 소장

 

 

1922년에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굴된 무덤으로 유명하다. '아마르나 혁명'을 이끈 아크나톤 왕이 죽은 뒤 즉위했으며, 그의 유력한 조언자들은 전통 종교와 예술 양식을 되살렸다.

 

그의 미라를 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투탕카텐은 바로 전에 이집트 왕을 지낸 스멘크카레의 동생인 것으로 여겨진다. 스멘크카레는 위대한 왕 아크나톤의 사위로, 아크나톤과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텔엘아마르나(아크나톤의 수도인 아크타톤)에서 발굴된 적요서와 그밖의 상황 증거로 미루어볼 때, 투탕카텐은 아크나톤과 스멘크카레가 죽은 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것 같다. 텔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옥새는 투탕카텐이 즉위한 후 1~2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음을 암시한다. 그는 왕위 계승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아크나톤의 셋째 딸과 결혼했는데, 이 딸은 아마 왕가에서 살아남은 공주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을 것이다. 즉위할 때 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고위 관리이자 섭정이며 왕가와 유대를 갖고 있는 아이와, 장군인 호렘헤브가 그의 주요조언자가 되었다.

 

이들의 지도에 따라 투탕카텐은 오늘날의 카이로 근처에 있는 행정 수도 멤피스로 거처를 옮기고, 테베에 있는 아버지의 궁전을 복구했다. 또한 즉위한 지 늦어도 4년 뒤에는 이름을 투탕카멘으로 바꾸고, 옛날 신들의 신전·조상·특권 및 그들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부활하는 한편 아크나톤의 방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는 아몬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이처럼 굴복했지만, 아크나톤이 유일신으로 섬긴 태양신 아텐을 금지하거나 박해하지는 않았다. 왕실 포도밭과 군대는 여전히 아텐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해 호렘헤브가 이끄는 이집트군이 이집트의 옛 동맹국인 시리아 북부의 미탄니 왕국을 돕기 위해 시리아로 진격했다. 미탄니 왕국은 히타이트 왕국의 봉신들과 전쟁에 말려들어 있었다. 히타이트 왕이 보낸 증원군이 봉신들을 돕기 위해 서둘러 전쟁터로 달려가고 있을 때 투탕카멘이 18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식들은 모두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아이가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왕위를 이었다.

 

투탕카멘이 죽은 지 얼마 후 테베 서부에 있는 그의 무덤(그가 원래 만들어둔 무덤은 아이가 자신의 무덤으로 삼았음)에 2차례에 걸쳐 도굴꾼이 침입했다. 그러나 이들은 무덤에 사소한 손상만 입힌 뒤 곧 체포되었다. 그후 이 무덤은 1922년 영국의 이집트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발굴될 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제19왕조 시대에 '아마르나 왕들'(아크나톤·스멘크카레·투탕카멘·아이)이 왕의 명단에서 삭제되고 공공연히 비난을 받으면서 투탕카멘의 무덤이 있는 위치는 잊혀지고, 많지 않은 그의 기념비는 나중에 파라오가 된 호렘헤브에게 대부분 강탈당했다. 제20왕조 시대에 람세스 6세의 무덤이 투탕카멘의 무덤 바로 위에 만들어졌을 때 돌 부스러기가 골짜기 비탈을 따라 흘러내려 젊은 왕의 무덤을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렸다. 제20왕조의 일꾼들은 투탕카멘의 무덤에 가까이 갔지만 그 장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이 무덤은 제20왕조말에 대규모로 자행된 약탈을 모면했고, 후대 사람들이 왕들의 계곡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그 위치를 발견할 때까지 그대로 보존되었다.

 

왕의 미라는 작은 묘실 속에 안치된 3중 관 속에 누워 있었다. 가장 안에 있는 관은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밖에 있는 2개의 관은 나무틀에 금을 망치로 두드려 박아넣은 것이었다. 왕의 머리에는 찬란한 황금 가면이 씌워져 있었고, 수많은 보석과 부적이 미라 위와 그 미라를 휘감은 싸개 속에 놓여 있었다. 관과 관석은 글을 가득 적은 나무판에 금박을 입힌 4개의 제단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런 글은 사실상 묘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다른 방들은 가구·조상·옷·전차·무기·지팡이와 그밖의 수많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무덤이 없었다면 투탕카멘은 지금과 같은 명성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무덤 덕분에 투탕카멘은 그보다 오래 살았거나 훌륭한 치적을 남긴 어떤 전임자나 후임자보다도 유명해졌다.

 

이와 관련된 책으로는 하워드 카터의 〈투탕카문의 무덤 The Tomb of Tutankhamūn〉(1923~33)과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의 〈투탕카멘 Tutankhamen〉(1963)이 있다. 1977년에는 무덤에서 나온 유물의 순회 전시회와 관련하여, I. E. S. 에드워즈가 쓴 글 및 리 볼틴과 해리 버턴이 찍은 사진이 실린 〈투탕카문 : 무덤과 보물 Tutankhamun : The Tomb and its Treasures〉이 출판되었다.

 

 

투탕카멘왕의 무덤

 

 

 

 

 

 

 

 

 

 

 

 

 

     

Tutankhamun's Tomb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이 투탕카멘의 박물관이라고 표현될 만큼 그의 유물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집트 초기의 카이로와 그 주변에 피라미드로 만들어진 왕들의 무덤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었기에 우리는 파라오의 무덤이 화려하다는 사실을 듣기만 하였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이런 면에 있어서 투탕카멘의 무덤발견은 세계 고고학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22년 하워드 카트에 의해 발견된 무덤으로 BC 1565년에 태어나 종교와 정치적 갈등 속에서 9세의 나이에 파라오로 등극하여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죽은 투탕카멘왕의 묘이다.


투탕카멘은 재위기간이나 그 영향력에 있어서 다른 파라오보다 못하지만, 그 무덤이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당시의 장례문화를 한눈에 확인시켜준것으로 유명하다.


보다 화려하고 거대한 피라미드는 모두 도굴 당했고, 8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보낸 보잘 것 없는 어린 왕의 무덤이라 세인의 눈을 피해 숨겨져 있다가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트의 끈질긴 추적에 의해 오늘에야 발견된 것이다.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이 그토록 다양하고 화려하다면 다른 왕들의 무덤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의 무덤은 계곡 깊은 곳에 바위를 뚫고 만든 묘이다. 밖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함정을 지나 전실 등을 지나 석관이 놓여 있는 현실에 이른다.왕가의 계곡에서 개장하고 있는 무덤은 투트모스 3세, 아멘호테프 2세, 투탕카멘, 하르엠헤브왕, 세티 2세, 메르엔프타흐, 람세스 3세, 람세스 6세, 람세스 9세의 묘다. 어느 무덤에서나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벽화가 아름다운 곳은 혼잡하고 항상 감시인이 있으므로 몰래 찍는 것은 무리이다. 특히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입구에 카메라를 맡기도록 되어 있다.

모든 유물은 이집트 박물관으로 옮겨져 무덤안에서는 더이상 발굴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수천년동안 잠들어 있던 투탕카멘의 무덤이 열리던 그 순간을 상상하면서 무덤속으로 들어가 보자!  

 

투탕카멘의 얼굴 공개

 

황금가면으로 유명한 투탕카멘..3300년 전 사망한 고대 이집트 왕국 소년 파라오‘투탕카멘’의 맨 언굴이 4일 룩소르 ‘왕가의 계곡' 에 있는 무덤 전시실에서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고 현지 언론이 5일 보도했다.

 

 

지난 1922년 11월 4일..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나일강 상류 룩소르의 '왕들의 계곡'에서 찾아낸 투탕카멘은 불투명한 관에 안치되어 있었다. 발견 후 수백만명은 투탕카멘이 안치된 '왕가의 계곡'을 방문했다. 그러나 관 내부 투탕카멘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50여명으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발굴된 후 지금까지 전문가들에게만 공개되었단 얘기다.

 

미라는 맨얼굴과 발만 드러내고 나머지 부위는 아마포에 싸인 채 공개됐다.  관광객이 내쉬는 호흡으로 미라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유리상자에 안치됐다.일반 관광객들은 5일부터 흰색 아마포로 싸인 투탕카멘의 몸과 맨 얼굴을 볼 수 있다.  

 

 

최고유물위원회는 지난 2년 동안 투탕카멘 미라를 연구, 복원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미라의 몸은 발견 당시 18곳이나 부러져 있었는데 (투탕카멘 발견 당시 카터는 몸속에 숨겨진 부장품과 부적 등을 찾기 위해 미라를 18조각으로 분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투탕카멘이 착용하고 있던 황금가면을 벗겨내는 도중 얼굴이 훼손되기도 했으나 전문가들에 의해 모두 복원된 것으로 전한다.) 과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뼈를 맞추고 CT스캔으로 두개골 안쪽과 치아 구조 등을 조사해 복원했다. 투탕카멘이 속해있던 고대 이집트 18왕조 왕실의 유전인 치아 부정교합도 확인했다.

 

최고유물위원회는 미라가 “완벽한 상태로 보존될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다. 당국은 다음달 영국 런던 전시회를 시작으로 미국 댈러스미술관 등에 미라를 순회전시할 예정이다. 알자지라는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당국이 투탕카멘의 가면으로는 모자라 미라까지 외국으로 돌리며 돈벌이를 하려 한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고 전했다. 당국은 미라가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면 룩소르의 무덤에 전시해 관광수입을 배가시킬 계획도 세우고 있다.

 

최고유물위원회는 화려한 유물들을 세계 각국 박물관과 미술관들에 대여해주면서 막대한 국고 수입을 올리고 있다. 2년 전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를 미국 측에 대여하면서 수억달러의 대여료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액수는 공개되지 않았다. 황금마스크를 전시하려는 외국 박물관들은 유치 비용으로만 최소 300만~500만 달러를 내고 그 몇배의 대여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양의 유명 박물관들도 하와스 위원장의 눈치를 봐야할 때가 많다. 일례로 2003년 독일의 한 박물관이 투탕카멘의 양어머니였던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을 여성 누드와 결합시킨 전시를 기획했다가 하와스 위원장의 항의로 철회한 바 있다.

 

투탕카멘은 BC 1343년 10살의 나이로 이집트 18왕조의 파로오에 즉위한 왕이다.고대 이집트 제18왕조(기원전 14세기)의 12대 파라오로, 10세 때 즉위해 19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죽음을 놓고 암살설 등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자히 하와스 이집트 고유물최고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투탕카멘이 사냥 중 전차에서 떨어져 부상했고, 이로 인해 결국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투탕카멘은 발굴 참여자들의 잇따른 사망으로 인해 '파라오의 저주'로 유명하다. 발굴을 후원했던 영국인 카나번 경이 미라의 얼굴 상처와 똑같은 부위를 모기에 물려 세상을 뜨고, 발굴 참여 고고학자들도 돌연사했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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