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Georgia(2018 Jul)

7-3 죽기전에 꼭가봐야할 여행지 바르지아(Vardzia) 동굴도시

봉들레르 2018. 11. 22. 18:56


조지아의 외딴 시골 땅에, 소()카프카스 산맥의 육중한 절벽 표면을 파서 만든

복잡한 구멍들로 이루어진 벌집 같은 형상이 무크바리 강변으로부터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올라 있다.

이는 12세기에 이곳에 형성된 광대한 동굴 도시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흔적이다.

외부적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장관이지만, 바위투성이 표면 뒤에 숨겨진 도시의 야망과 구조에는 비교할 것이 못 된다.

바르지아(Vardzia) 동굴 도시는 조지아 남부의 아스핀자 근교 므트크바리 강의 좌측 제방이 있는

에루셸리 산의 측면에 동굴들을 내어 구축한 동굴 수도원이다.


무슬림 투르크인의 침입이 항상 골칫거리였을 때,

조지아의 기독교 왕 기오르기 3세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궁경 가까운 곳에 있는 바르드지아를 군사 요새로 삼고자 계획했다.

 '바르드지아'라는 이름은 기오르기 왕의 딸인 타마르가 동굴 안에서 길을 잃었을 때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자 외쳤던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기오르기가 1184년 죽자, 타마르가 이 계획을 이어받아 바르드지아를 요새화된 수도원으로 변모시켰다.

여왕이 된 그녀는 조지아가 강력하고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위대한 시기를 다스렸으며,

바르드지아는 그녀의 미래상을 표출하는 데 잘 어울리는 장소가 되었다.

바르드지아는 그 동굴 건축으로 알려진 가장 뛰어난 장소였다.





하우스와인이 가득 담아서 나온다






바르지아 동굴도시

-카프카스 산맥의 육중한 절벽 표면을 파서 만든 복잡한 구멍들로 이루어

진 형태로 무크바리 강변으로부터 웅장하게 솟아 올라 있다.

조지아는 러시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터키 등 여러 나라의 국경으로 둘러싸인 나라다.

그래서 오랫동안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온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터키 국경 근처에 위치한 동굴 수도원 바르지아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무려 40년간 바위를 뚫어 건설했다.

바르지아 내부는 3000개가 넘는 방들이 미로처럼 연결돼있는 요새다.

지진에 의해 많은 부분이 무너져 내렸지만, 신비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수많은 여행객이 찾는다.







Vardzia - the gate




몽골족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므트크바리 강 근처의 비밀 통로들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13개 층에 6천 개가 넘는 방이 있으며, 교회, 왕실, 고지대 농업용수 설비가 마련되어 있다.

1283년 경, 삼츠헤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도시의 2/3 가량이 파괴되어 동굴의 외관이 드러났으며 관수 설비가 붕괴되었다.

13세기에 베카 자켈리의 통치 기간 중, 도시의 교회가 보강되어 재건축 되었고 외관을 드러낸 종탑이 증축되었다.

1551년에 타흐마습 1세 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가 그 수도원을 습격했으며, 중요한 모든 성상들을 약탈하면서 사실상의 모든 기능을 상실하였다.

바르지아의 전경과 므트크바리의 계곡(아래)

Vardzia - one of the dining rooms

가운데 큰 구멍은 와인을 짜기위해 만든 것같다

와인저장소


벽쪽으로 마주보고 앉고 바로 앞에 돌들은 테이블 역활을 했을 것이고 앞쪽에는 우두머리 수도사가 앉는 자리가 있다

절벽에 지은 새집

100여개의 동굴들이 펼쳐지는 동굴도시. 조지아의 르네상스 시기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다.

중세 시대에 수도승들이 생활하던 수도원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700여 명의 수도승이 이 곳에 거주했다고 하니 그 규모를 대강 가늠할 수 있겠다.

이 동굴들 안에는 3000여개의 방이 있었으며,

지금 보는 것은 13세기에 지진으로 인해 2/3 가량이 무너진 나머지 1/3 정도에 불과하다.

이 곳 이름이 '바르지아'라고 붙여진 이유는, 과거 타마르 왕이 어릴 때 암굴 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삼촌이 타마르를 찾아 부르자 "아크, 바르지아!(아저씨, 저 여기 있어요!)"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재밌는 설도 있다.

교회문 앞에 종이 달렸다


Bells at the Church of the Dormition

수도사들이 매일 아침 7시에 종을 친다


교회를  장식한 벽화들








 조지 3세, 타마르 왕비, 에리스타비 라티 수라멜리의 이미지는 1180년 기오르기 대령이 만든 것으로 추정.


바르지아의 설립자인 타마르 여왕Tamar (left) and George III (right).

 The earliest surviving portrait of Tamar from the church of the Dormition at Vardzia, c. 1184–1186.


타마르 여왕









 교회에서 멀지 않은 산속에 있는 샘에서 끌어와 탱크에는 약 8㎥의 신선한 냉수가 들어 있었으며 11℃를 유지했다.

하지만, 마을에 샘물을 공급하기 위해 특별한 물 공급이 이루어졌다.

 매일 166,000리터의 물 제공했는데, 그것은 50,000명의 마을사람들이 먹을 만큼 충분했다.

630,000리터가 들어 있는 탱크는 물을 저장하기 위해 단지 서쪽에 있는 바위를 절단해서 만들었다

"Tamar의 눈물"으로도 알려진 우물













배관

배관

미로

소위 '타마 방'은 홀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전설에 따르면, 타마르 여왕은 바르지아에 366개의 방이 있어서

적들이 그녀의 침실이 어디 있는지 절대 알아낼 수 없었다고 한다.








The gate to church of the Dormition





현재 5명의 수도사가 거주하고 있는 거처

삭막한 돌로 된 정원에도 꽃을 가꾸었다



 13개의 병들이 묻혀있는 또 다른 큰 와인 지하실도 있었다.

바르지아에는 총 28개의 와인 저장소가 있었다 

복도가 6개, 창고 22개, 90973리터짜리 235개의 병과 함께.

15세기 바르지아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바이탈 농장과 와인 제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wine celler

 1283년에 지진이 그것을 파괴할 때까지 2,000명의 수도승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바르지아 동굴 단지는 총 3천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바위에 잘라져 있고, 5층, 6층, 7층 그리고 때로는 12층이었다.
 

각 주거지는 세 개의 인접한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방은 얼굴에서 북쪽 축을 따라 암석의 깊이로 연속적으로 절단해서 만들었다.

바닥은 비밀 통로와 부티코 천장에 뚫린 구멍과 나무 사다리가 달려 있었다.



The pharmacy is located on VI floor (15-20 m2 room).

Its walls have 265 niches of the same size with horizontal bottom and crescent arches. Presumably each niche was designated for one healing solution. It seems that together with such a big pharmacy Vardzia also had a hospital. The opinion is verified by the big number (thousands) of monks and support personnel who lived on the nearby territory. The pharmacy equipment of this period is very diverse and include: Dishes, cups of various shapes, crushing bowls, double-bottom ceramic vessels, a clay pots with snake images, various crushers, copper boilers, scales of different sizes and so on. The pharmacy retained medicine in different forms: pills, powders, ointments, tablets, antidotes, activated charcoal and etc.













타마르
현명하고 외교적 군주 또는 예술에 대해 미래 지향적인 후원자나 왕국의 굳건한 수호자인 군주 등 그 표준에 부합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황금기의 정점에 있는 조지아의 통치자인 타마르를 이상적인 군주로 꼽을 수 있다.

타마르는 1160년경 태어났으며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조지 3세와 부르두칸 사이에서 태어난 타마르는 왕좌를 지키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싸워야 했다.

왕궁 귀족은 그녀의 사촌인 뎀나 왕자가 왕권을 승계하기를 선호했고,

타마르가 17세가 됐을 때 사소한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런 귀족들은 조지 3세에 의해 즉시 척결됐다.

조지 3세는 그 반란 직후 타마르를 왕세녀 겸 공동 섭정으로 선포했다.

조지 3세가 1184년에 사망하자, 타마르는 분열 상태에 있던 조지아의 왕좌에 올랐다.

복잡한 정치적 문제로 인해 타마르는 귀족들이 지목한 루시의 유리 왕자를 배우자로 맞이해야 했다.

둘은 1185년에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혼 생활은 영원하지 못했다.

유리는 조지아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무뚝뚝하고 다정다감하지 못했으며, 왕궁 귀족과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따라서 그녀는 그의 주사와 부도덕성을 이유로 이혼을 신청했다.

이 사건은 독실한 기독교 국가의 여군주가 남편과 이혼하고 재혼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교회로부터 얻어낸 기념비적인 것이다.

당시에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이 이혼 후 조지아의 영토가 크게 확장된다. 이제부터 조지아의 가장 위대한 영토 확장 전쟁이 시작된다.

조지아는 새로운 부군인 다비드 소슬란을 비롯한 뛰어난 사령관을 등에 업고 주변의 무슬림 술탄왕국을 정복해 나갔으며,

주변의 왕국들은 조지아의 종속국과 피보호국으로 예속되었다.

조지아의 귀족들은 타마르 왕권의 전복이나 약화를 위한 시도를 멈추고 지지했다.

심지어 조지아인들은 트레비존드 제국을 건국하여 중동의 강대국을 자처했다.

유리와 이혼 후 타마르에게는 결혼 제안이 빗발쳤다. 결국 그녀는 번영한 왕국의 여왕이 됐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조지아에 전쟁을 선포한 룸의 술탄 일화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타마르를 ‘무슬림 신부 혹은 기독교 첩’으로 맞이하겠다고 말했다.

조지아의 조신은 이 메시지를 전하러 찾아온 사절의 얼굴을 그 자리에서 가격했다.

언제나 독실했던 타마르는 바르지아의 동굴 도시와 수도원에서 기도를 드린 다음 교회 계단 위에서 병사들에게 연설했다고 한다.

그녀의 경건함에 고무된 조지아 군대는 술탄의 침략자를 박살냈다. 또한, 타마르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녀는 교역과 상업을 강화했고 자신의 모노그램과 직함이 새겨진 주화를 주조했다. 그리고 법률을 성문화했고 교회와 대성당을 건축했다.

조지아의 문화는 비잔티움 기독교와 페르시아 사상이 결합된 강력하고 뚜렷한 혼합주의로 발전했다.

타마르는 1213년에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녀의 무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혹자는 묘지 훼손을 염려한 그녀가 수도원에서 비밀리에 화장됐다고 주장하는 반면,

그녀의 유해가 성지로 운구돼 성묘 근처에 안장됐다는 설도 있다.

분열된 왕국의 권좌에 오른 타마라는 자신의 왕국을 더욱 크고 강대하게 만들었으며,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시켰다.

그녀는 동방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됐고, 오늘날까지도 조지아의 상징적인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