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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노래-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봉들레르 2015. 9. 15. 14:28

 

박목월(朴木月, 본명은 영종 泳鐘, 1916~1978)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태어나 자랐다. 경북 경주군 서면 모량리가 고향이다.

그는 경주 동부금융조합에 재직중이던 1939년 선배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길처럼> <그것은 연륜(年輪)이다>가 <문장> 9월호에 추천 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가 시인으로서 본격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해방 후부터였다. 해방은 언어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다. 해방은 그의 시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아래 소개하는 <이별의 노래> 스토리도 그것이 일제 때의 작품이었다면 독자들이 받아들이는 감정이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렇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별의 노래

박목월 작시 김성태 작곡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목월의 제주행과 슬픈 이별

한 유명 시인이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대생과의 헤어짐의 아픔을 노래한 시가 <이별의 노래>라는 이야기는

1980년대에 나온 ‘박목월 평전·시선집’ <자하산 청노루> (이형기 편저, 문학세계사, 1986년>에서

이 스토리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세간에 기정 사실로 알려져왔다.

<자하산 청노루>에서는 이 연애 사건에 ‘이별의 노래’란 제목을 달아 평전(評傳)의 일부로 8쪽(65-72쪽)에 걸쳐 자세히 적어놓았다.

호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흥미진진한 러브 스토리이다.

신문, 잡지 등 워낙 여러 지면에서 이름있는 문인들이 대체로 이 책의 기록을 근거로

 ‘시인의 애틋한 사랑이 낳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라며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를 진지하게 설명해 놓았으므로 누구도 그 이야기를 의심치 않았다.

평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박목월이 피난시절 대구에서 알게 된 H씨 자매가 있었다. 자매가 모두 목월의 시를 좋아해 목월을 자주 찾아왔다.

처음에는 흔히 있는 팬과의 만남 정도로 대했다. 언니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러는 사이 휴전(1953년 7월)이 성립되었다.

목월은 가족보다 먼저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의 대학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그사이 자매도 상경했다.

자매의 아버지가 부유했으므로 흑석동에 집을 사 두고 자녀들을 공부시켰던 것이다.

언니가 서울에서 결혼을 하자 이번엔 동생이 혼자 목월을 찾았다.

동생의 가슴에 사랑의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목월도 그녀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1954년 초봄부터, 두 사람이 서울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날이 많아졌다.

목월은 4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자책감으로 괴로웠다.

어느 날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있는 가까운 시인 Y를 불러 H양을 만나 자신을 단념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Y씨를 만난 H양, Y씨의 말을 듣고 나서,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

저는 다만 박 선생님을 사랑할 뿐, 이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무상의 사랑은 누구도 막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그해 여름이 가고 가을 바람이 불어 왔을 때 목월은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와 함께 제주도로 떠난 것이다.

두 사람은 제주에서 넉달쯤 동거를 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극적이다. 편저자는 사건 이후 20년쯤 흐른 후 여류시인 K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면서 이렇게 옮겨놓았다.

그 제주 생활이 넉 달째 접어들어 겨울 날씨가 희끗 희끗 눈발을 뿌리던 어느날 부인 유익순이 제주에 나타났다.

목월과 H양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온 그녀는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 놓았다.

보퉁이에는 목월과 H양이 입고 겨울을 지낼 수 있는 한복 한 벌씩이, 그리고 봉투에는 생활비에 보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남편은 물론 H양에 대해서도 그녀는 전혀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고달픈 객지 생활을 위로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 앞에서 H양은, “사모님!” 하고 울었다. 목월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결국 목월은 가정으로 돌아왔다. 제주생활 넉 달을 치르면서 유익순 앞에서 울었던 H양은 목월을 단념하게 된 것이다.

널리 애창되고 있는 목월 작사의 <이별의 노래> 가사는 H양과의 이별의 심정을 읊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별의 노래의 주인공은 평전이 그럴듯하게 그려 놓은 것처럼

1954년 박목월 시인을 제주도에까지 찾아가 몇 달간 함께 지냈던 H양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랑과 인생을 걸었지만 박목월의 부인이 다녀간 며칠 후, 부산에서 여대생의 아버지가 찾아와 설득 했고,
사흘을 버티다 결국 이별을 선택한 목월의 여인은 부친의 손에 이끌려 제주항으로 떠나고,

망부(忘婦)를 태운 꽃상여를 뒤따르 듯 목월이 따르고 그 뒤를 목월이 제주에서 문학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양중해(당시 제주 제일중 국어 선생)가 이별의 장면을 동행하게 된다.
목월의 여인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뱃전에서 고개만 떨구었다 한다.
그날 저녁 동행한 양중해가 시를 쓰고 같은 학교 음악교사인 변훈 선생이 곡을 만들어 불후의 명곡 "떠나가는 배"가 탄생 하였다.

떠나가는 배 - 양중해 詩 / 변훈 曲

저 푸른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못할 님 실은 저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터져 나오라 애슬픔 물결위로 한된 바다
아담한 꿈이 푸른 물에 애끓이 사라져 내홀로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수심뜬 바다를 지키련다

저 수평선을 향하여 떠나가는 배 오 설움이여
임보내는 바다가를 덧없이 거닐던 미친듯이
울부짖는 고동소리 님이여 가고야 마느냐 ...

 

 

박목월이 털어놓은 <이별의 노래>의 주인공

<이별의 노래>가 여대생 H양과의 이별을 노래한 것이란 소문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목월도 그러한 소문에 대해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책 <구름에 달 가듯이> (1973년, 1979년 삼중당)에 <이별의 노래>를 짓게 된 동기를 써 놓았는데 다소 추상적이다.

그렇더라도 이 글을 통해 보건대, 이것이 완전한 픽션이 아니라면 노래의 주인공이 H양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이며, 전쟁 중에 우연히 재회해 그 후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병실에서 하룻밤을 간호하며 지낸 적도 있으며,

결국 세상을 떠났다’ 고 요약할 수 있다. <구름에 달 가듯이>의 몇 대목을 인용하면;

 

“물론 오래 전 일이다. --- 다만 내가 젊은 청년 시대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어느 날 오월 오후다. 나의 사무실로 한 여인이 찾아왔다.

내 생애에 결정적인 운명의 발길이 이처럼 우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연한 하늘빛 갑사치마 저고리를 입은 그녀와의 대면(對面)을 나는 극히 사무적으로 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와의 재회(再會)는 더욱 극적이었다. 화약 냄새가 감도는 거리의 모퉁이에서 나는 우연히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움과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갸름한 얼굴에 흰 이빨이 곱게 웃고 있었다.

“살아 계셨군요. 무척 염려했어요.”

그녀의 인사였다.

----- 전세(戰勢)는 우리에게 반드시 유리할 것만 같지 않았다. ----- 조그만 사건이 생겼다.

그녀가 중하게 앓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거처를 알 길이 없었다. 이듬해 봄이 되었다.“

----- 햇빛이 범람하는 아스팔트의 저편에서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얗게 소복한 여인은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불꽃에 싸여 있었다.

그녀였다. 세 번째의 우연한 해후(邂逅). 운명은 끝내 우리에게 그 신비스러운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 수척해 보였다.

-----“박 선생님 하룻밤만 제 병실을 지켜 주시지 않겠어요.” -----그녀의 병실에는 개나리가 꽂혀 있었다. 갑

자기 그녀는 불꽃처럼 명랑하고 생기가 타올랐다.

----- 나는 그녀의 머리맡에서 밤을 밝혔다. 고르고 편안한 그녀의 숨결을 조용히 지키며 밤을 새운 것이다.

새벽은 찬란했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새벽에 일어나 통곡할 줄은 깨닫지 못했다.”

나의 목마른 인생 역정의 이 쓰라린 경험은 나의 인생관을 변하게 하고, <나>라는 사람을 변하게 하였다.

그것은 홀로 울고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하얗게 재가 되어 삭아내리게 되었으며, 사실 나의 슬픔은 이별이 끝난 뒤부터 시작되었다.

---(후략)----

<구름에 달 가듯이> (1979년 판에서 발췌)

 

작곡가 김성태씨의 <이별의 노래>에 대한 회고

작곡가 김성태(金聖泰,1901~2012)씨는 <이별의 노래> 작곡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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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대구의 박목월 시인을 만나러 갔다. 학(鶴)과 같은 박 시인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여름이었다.

박 시인은 “기다리고 있었소.”하고 그를 반가이 맞았다. 박 시인은 전할 것이 있다고 했다.

<이별의 노래>였다.

예술은 감동이다. 김성태씨는 “그 시를 읽고 무척 감동했습니다.”하고 그때의 감동을 되새겼다. 그는 그날 밤 곧 작곡에 착수했다.

그런데 희맑고 쓸쓸한 이 아름다운 가곡은 몹시 산문적(散文的)인 상황 속에서 태어났다. 분지인 대구의 더위는 살인적이다.

그는 여관방 모기장에 드러누어 떠오르는 악상(樂想)을 다듬어 갔다. “모기장 빛깔은 핑크였죠.” 김씨는 쓴 웃음을 짓는다.

20년전 한 밤을 샌 여관방 모기장 빛깔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이별의 노래>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이 가곡의 작곡 과정은 그의 정신세계에 중요한 흔적을 남긴 것이다.

박목월씨는 “그 당시 우리 민족은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나는 김성태씨와 헤어졌습니다.

시대적인 분위기에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 오버랩 되어 이 시가 만들어졌죠.”라고 시가 쓰여진 동기를 이야기 한다.

이런 배경 아래 작곡된 <이별의 노래>가 처음 연주, 발표된 곳은 부산이다.

김씨가 지휘하던 해군 군악대와 대학생들로 만들어진 합창단이 이 가곡을 연주, 합창했다.

그 시대 감정을 표상하는 것 같아선지 이 가곡은 금방 사람들의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봉선화에서 무덤까지> (지철민, 심상곤 공저, 무궁화사, 1973)

 

김성태 작곡집(도서출판 예음, 1991)에는 물론 다른 음악관련 자료들에도 <이별의 노래>의 작곡 연도는 모두 1952년으로 나와있다.

그러니까 <이별의 노래>가 작곡된 것은 1952년 여름, 시가 쓰여진 것은 그 이전이 된다.

1954년의 H양 사건과는 시간적으로 불일치 한다고 할 수 있다.

 

목월 시집에 없는 <이별의 노래> 

우리가 노래로 부르는 목월의 <이별의 노래>는 목월의 시집에 없다.

앞서 말한 대로 <구름에 달 가듯이>란 제목의 목월의 산문집 속에 실려있을 뿐이다.

가곡 <이별의 노래>와 관련한 평전의 이야기는 누군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 낸 재미있는 창작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때 쓰여졌던 누구를 대상으로 썼건 무슨 상관이랴.

그 시와 음악이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 것은 모두가 그러한 상황과 그같은 심정에 공감하기 때문 아닌가?

목월은 19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길에서 돌아온 후 고혈압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 63세였다.

사랑하던 이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시(詩)속에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던 박목월도 어느날 그들처럼 저 하늘로 갔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했던 것처럼---.

‘너도 가고 나도 가는 것’, 그것은 그리움과 슬픔의 끝이며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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