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Spain(2015 Feb)

13-1 가우디의 초기작품 까사 비센스(Casa Vicens)

봉들레르 2015. 4. 25. 21:42

 

숙소에서 밥으로 아침 식사

 

9:15 L3Liceu역에서 투어 출발 장소인 Fontana역으로 출발

 

Fontana

 

9:40 투어 출발(가이드:김희연, 마이리얼트립 이메일: syhy1205@naver.com 카카오톡: vega0321) 일행 9

바로셀로나를 방문한다는 것은 가우디작품을 보러 온다는 것과 맥을 함께 한다.

지하철 출구에서 오른쪽 길로 140m 걸어 올라가면 사거리가 나온다. 

거기서 왼쪽의 골목길로 접어들면 100m 거리에 있다. (도보로 5분 정도)

 

 

까사 비센스

가우디의 초기작품으로 1878년부터 약 10년 동안 타일 공장을 운영하는 돈 마누엘 비센스의 부탁을 받고 지은 개인 저택이다.

 까롤리나스 거리에 만발한 꽃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하여 정원에는 종려나무 문양이 새겨진 분수대가,

바닥은 녹색과 백색 꽃 문양 타일이, 대문에는 종료나무와 나뭇잎을 형상화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타일 공장을 하는 비센스의 저택답게 건물 대부분이 오색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더욱 아름답다.  

마르띠네스가 증개축 공사를 진행하면서 만들어 놓은 이슬람풍의 전망대


비센스 저택

까롤리나스 거리에서 바라본 파사드는 확장 공사로 인해 왼쪽과 오른쪽의 높이가 약간 다르다.

이러한 차이는 가우디의 원작을 구별하는 동시에 거장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기 위한 마르띠네스의 의도적인 계획이었으리라 생각된다.

1927년, 그러니까 가우디가 세상을 뜨고 1년이 지난 뒤에 까사 비센스는 바르셀로나 시로부터 최우수 건축상을 받게 된다.

 

 

 

 

 

종려나무와 금잔화 꽃봉오리를 모티프 삼아 만든 철책의 제작자에 대해서는

 가우디를 연구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그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가우디와 함께 성가족 성당 공사에 참여했던 조각가

유렌스 마따말라가 주인공일 것이라는 라풀스의 주장이다.

라풀스는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뒤 구엘공원에 있던 그의 집과 성가족 성당에 산재해 있던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책으로 낸 초기 저술가 중 한 사람이다.

 

 

 

대문에는 종료나무와 나뭇잎을 형상화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창문을 보호하는 장식들은 용을 비롯한 상상 속의 동물로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까사 비센스에 사용된 주된 타일은 건축 부지에 흐드러졌던 금잔화를 모티프로 한 것이다.

가우디가 타일을 저택의 주요 외장재로 사용한 것은,

비센스가 타일과 벽돌 공장을 운영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한 일종의 ‘경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가우디의 이러한 배려는 다른 건물을 통해 집주인의 이니셜을 대문 근처에 새겨 넣는 형식으로 발전한다.

 

 

벽면을 장식한 금잔화 타일

현재 출입구로 사용되는 이곳은 본래 창문이 있던 곳이다. 바르셀로나 시가 벌인 거리 확장 공사로 인해 대문과 담장 사이의 공간이 도로에 편입되었고, 정원 일부와 분수도 사라졌다. 또한 산 제르바시 거리로 나있던 출입구의 위치도 지금의 방향으로 바뀌었다. 출입구 옆에 있는 장식용 도자기는 꽃의 정령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가우디는 같은 형식의 장식물을 다른 건물에 재사용하는 것을 꺼려했는데, 이 도자기와 해바라기 타일만은 예외였다. 가우디의 황금기로 불리는 시기에 건축된 까사 밧요에 들어서면 색상만 다를 뿐, 까사 비센스의 것과 똑같은 두 개의 도자기를 볼 수 있다.

 

 

회랑. 회랑 위편의 붉은 벽에는 “따뜻한 가정에 사랑이 넘친다.”는 글귀가 까딸루냐 어로 쓰여 있다.

이뿐만 아니라 가우디는 까사 비센스의 곳곳에 매우 서정적인 글귀들을 써넣었는데,

“사랑스런 태양이여. 추위에 떨고 있는 나를 보러 오세요.”라거나,

벽난로 부근에 “사랑의 불꽃을 피워 주오”라는 문장들이 바로 그것이다.

젊은 날의 섬세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이 글들은 고집스럽기만 했던 가우디의 또 다른 일면을 보게 하는 작은 선물과도 같다.

정원에서 흡연실로 통하는 출입구.

 

바르셀로나에 남아있는 가우디의 건축물 중 여행자의 접근이 어려운 곳을 꼽으라면 단연 까사 비센스다.

공식적으로 가우디 최초의 건축물로 기록되며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이곳은 일 년에 딱 하루만 대문을 연다.

성녀 리따 축일인 5월 22일이 그날이다. 그렇지만 문을 여는 이유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답게 내부를 공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뒤뜰의 예배당에서 이웃들과 미사를 올리기 위함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일부러 날짜를 맞춰 방문한다손 쳐도, 좋은 구경을 하겠다는 욕심은 품지 않는 것이 좋다.

가우디가 비센스(Manuel Vicens i Montaner)로 부터 여름별장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은 건축학교를 졸업하던 1878년 무렵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사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나서야 시작된다. 그때 가우디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비센스는 당시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신흥갑부로서 타일공장 사장이자 잘 나가는 증권 중개업자였다.

그런 그가 여타의 유명한 건축가들을 접어두고 하필 햇병아리 같은 가우디를 건축가로 선택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비센스는 가우디의 진면목을 알아봤던 것일까? 고작 건축학교 졸업반 학생 중 하나일 뿐인데. 사실을 말하자면 아마 그건 아닌 듯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지만 비센스의 이런 결정의 이면에는 평소 가까이 지냈던 구엘 백작의 추천이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구엘은 파리에서 열렸던 1978년의 만국박람회를 통해 가우디를 알게 되었고 곧바로 후원자를 자처하고 나선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구엘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고 해도 아직 한 채의 건물도 지어보지 않은 가우디를 건축가로 점찍은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건 비센스의 주사위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거다.

무슨 생각에선지 건축에 관한 전권을 가우디에게 일임하는 파격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비센스도 몰랐다.

자신의 호기로운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는지를.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바르셀로나의 사교계에 이상한 얘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비센스가 건축에 들어가는 자재비를 충당하느라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구체적인 소문이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이다.
대부분의 완벽주의자들이 그런 것처럼 가우디의 작업방식 또한 보통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대표적인 게 아무리 공들인 공사라도 문제가 발견되면 그 부분을 허물고 다시 작업한다는 점이었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함은 그에게 있어 자부심이었겠지만 주변 사람에겐 고통이기도 했다.

비센스의 파산 소문은 이런 가우디의 작업 스타일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가우디는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험담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재의 까사 비센스를 보면 완공 당시의 모습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우선 비센스의 미망인으로부터 까사 비센스를 사들인 호베르가 벌인 증축공사로 건물의 부피가 두 배로 커졌다.

(정면에서 건물을 수직으로 이등분 했을 때 오른 편이 추가된 부분이다)

또한 바르셀로나 시가 추진했던 도로확장 공사로 담장은 헐렸고, 건물의 다섯 배에 달했던 거대한 정원은 주인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팔려나갔다.

기묘한 장치로 항상 무지개가 떠올랐던 분수와 거대한 인공폭포가 사라지게 된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까사 비센스는 건물의 상당 부분이 타일로 마감됐는데 이는 비센스가 타일공장을 운영했다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

가우디가 만든 타일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금잔화를 그려 넣은 것과 해바라기와 잎사귀를 고부조로 조각한 것들이다.

금잔화 타일은 애초의 건축 부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꽃들에 대한 오마주이고,

해바라기와 잎사귀 타일은 같은 해에 건축을 시작한 엘 까쁘리쵸에도 재차 사용된 진귀한 기록의 주인공들이다.

혹자는 두 개의 건물에 똑 같은 타일을 사용한 것이 뭐 그리 대수냐 할 수 있지만 내용을 알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가우디의 건축 역사에 있어 동일한 재료나 형식이 되풀이되는 건 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건축물은 각각의 독립된 모습과 내용을 가진 구조물이어야만 했다. 적어도 가우디에 있어서만큼은 그게 그렇게도 중요했다.

가우디가 까사 비센스를 통하여 구현하고자 했던 정신은 ‘사랑과 온정이 넘치는 가정’으로 요약된다.

더불어 집안 곳곳에서 발견되는 잠언과도 같은 글귀들은 이런 해석에 힘을 보탠다.

“따뜻한 가정에 사랑이 넘친다”라거나 “사랑의 불꽃을 피워주오”등의 문장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글귀들도 “사랑스런 태양이여, 추위에 떨고 있는 나를 보러 오세요” 라는 대목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어찌나 낭만적인지 닭살이 다 돋을 지경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우디의 이미지는 괴팍하고 무뚝뚝한 고집불통쯤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오글거리는 연애편지투의 문장을 벽에 새겨 넣은 것이다.

가우디가 겉보기와 달리 매우 서정적이며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는 증명이다.

“신은 곡선을 창조했고 인간은 직선을 만들었다.”라는 말은 가우디의 건축물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어록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가우디가 만든 대부분의 건물들이 곡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때문이다.

그러나 까사 비센스는 예외였다. 적어도 이곳의 표면적 형식은 강렬한 수직선과 수평선의 반복에 있다.

직선들의 연속인 것이다. 가우디가 신의 선이 곡선이라는 통찰을 조금 더 일찍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면 아라비안 나이트에나 나올 법한 페르시아 풍의 까사 비센스가 과연 탄생이나 할 수 있었을까?

 

비센스 저택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메뜨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폰따나(Fontana) 역에서 천천히 걸어가도 5분 정도면 충분하다.

까사 비센스에 들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아쉬움으로 집약된다.

굳게 닫힌 채 꿈적 않는 육중한 철문은 외부의 호기심을 침묵으로 대신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장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고 집안의 공기를 살핀다. 그래봐야 변할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다.

사실 가우디 마니아들의 입장에선 까사 비센스의 굳건한 보안이 얄미울 수도 있다.

허나 입장 바꿔 생각하면 오히려 야속한 건 여행자들이다. 까사 비센스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엄연한 저택인 까닭이다.
약간 경사진 소로의 내리막에 있는 까사 비센스는 그냥 보기에도 주변 건물과 확연히 구분된다.

스페인을 정복했던 무어인들의 숨결이 깃든 아랍풍의 건물은 모서리에 달아낸 망루나 발코니에서 특히나 이국적 분위기를 발산한다.

하기야 건축 당시에는 그런 구조물들이 꼭 필요했을 만큼 주변의 전망이 좋았을 터였다.

 허나 지금은 아름다웠던 풍경이 사라진 그곳을 빽빽한 시멘트 건물들이 대신하고 있다.

‘가우디 코드’라는 것이 있다. 그냥 볼 땐 별게 아닌데 꼼꼼히 뜯어보면 특별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가우디는 재료나 형식을 선택할 때도 심사숙고하여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실례로 까사 비센스에 타일이 많이 사용된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비센스의 직업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의 사업적 성공을 축하하는 코드이기도 하다.
, 그러면 육중한 철문을 장식하고 있는 종려나무 이파리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가우디의 건물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종려나무에는 여러 상징들이 있지만 비센스 저택에 어울리는 의미는 ‘환대’, 혹은 ‘환영’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신자라면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든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았던 예수의 일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가우디 또한 평생을 독실한 신자로 살았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의 건물에 기독교적 상징들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진으로 전해지는 준공 당시의 까사 비센스는 호화로움의 결정판이다.

너른 정원과 분수는 그렇다고 쳐도 화가와 장인들이 꾸민 실내장식을 보노라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새들이 벽을 날고 플라밍고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

 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는 식물들은 천장에 가득하고, 비둘기들은 하늘로 날아오른다. 마치 자연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분위기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며 까사 비센스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떤 것들은 사라졌고, 또 어떤 것들은 새로이 들어섰다.

그럼에도 까사 비센스가 비교적 처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몇 차례에 걸친 복원 작업 덕분이다.

그리고 그런 원형을 향한 지속적인 노력은 이 건물의 가치를 현실적으로 가늠케 했다.

2013년 현재, 이 건물은 매각을 기다리고 있다. 집주인 측에서 제시하는 금액은 ‘이천칠백만 유로’. 우리 돈으로 치면 ‘사백억 원’ 쯤 되려나?

                                                                                                

대전 문화 타임즈

 

까사 비센스 내부 모습. (까사 비센스 제공)

까사 비센스 내부 모습. (까사 비센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