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半程)이다. 반정은 시내에서 대관령 정상까지 대략 20㎞의 중간지점이라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반쟁이라고도 부른다. 웃반쟁이와 아랫반쟁이가 있으며, 상반정은 대관령의 중턱이다.
- 반정을 지나서 옛주막터까지는 계속해서 구불구불한 내리막이다.
- 대관령 길은 조선 초기 때만 해도 한 두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고 한다.
- 조선 중종 때에 강원 관찰사인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길을 넓혔다고 한다.
- 대관령을 강릉 지역 사람들은 '대굴령'이라고 부른다. '
-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고 할 정도로 험하기 때문이다. 이 대굴령을 한자로 적어서 대관령이 된 것이다
-
한국의 옛길엔 어디를 가나 돌무덤을 볼 수 있다.
돌무덤 있는 길엔 대개 서낭당도 같이 있으나 지금 서낭당은 흔적 없이 사라진 곳이 많다.
돌무덤은 과객들이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돌을 하나씩 쌓은 관습에서 비롯됐다.
그 돌에 무사귀환을 당부하고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산신에게 기원하는 형식인 것이다.
그래서 마을 어귀나 특히 고갯길에 돌무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대관령옛길도 예외는 아니다. 여러 개의 돌무덤을 지나친다. 대관령은 특히 험준한 산세여서 그 옛날 호랑이가 득세하던 시절,
개인의 안전을 기원하는 관습이 더욱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신사임당 시비도 나온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란 제목의 시(詩)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강릉)에 두고
외로이 한양으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해 저문 산에 흰구름만 날아 내리네.
’ 신사임당의 지극한 효심을 잘 표현한 시다.
대관령옛길을 얘기하면서 신사임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임당이 여섯 살 율곡과 막 세 살 된 동생을 데리고 오랜 친정생활을 마치고 시댁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이별이었다.
가마 타고 아흔아홉 굽이를 넘던 사임당은 고갯길에서 내리더니 산 아래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 바로 이 시가 나온 것이다.
멧돼지
길 중간 중간에 쉼터와 의자가 구비돼, 방문객이 힘들면 쉬어가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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