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프러시아 군대에 의한 오스트리아의 패배 후 비셰흐라드 성채는 폐쇄되었고
1883년엔 프라하 시에 편입되었으며 보헤미아의 찬란했던 시절을 말없이 보여주는 유적지가 되었다.
포도밭
청포도가 탐스럽게 달렸다.
전망대
강에서 배가 길에서 승용차가 철교에서 트램이 지나간다
St. Peter and Paul Curch towers
가족단위의 체코인들의 쉼터
리부셰 공주와 남편 쁘제미슬
체코 왕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리부셰는크록왕의 세딸중 막내딸로 예지력이 있고 가장 총명하여
크록이 죽고 왕위를 계승받은 공주였다. 여자가 나라를 통치하는데 문제를 느낀 그녀는
예지력을 발휘해서 쁘제미슬이라는 쟁기질을 하고 있던 농부를 만나게 된다.
그는 후에 리부셰와 결혼하여 보헤미아 왕국의 설립자가 된다.
문헌을 보면 어느날 리부셰는 도시의 이름을 짓느라 고민하다가
신하에게서 몰다우 강이 흐르는 강기슭의 비셰흐라드를 지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제일 먼저 숲에서 문지방을 만드는 남자를 보았다고 얘기를 듣는다.
이 이야기를 들은 리부셰는 도시이름을 떠올리게 되고
문지방 ( Threshold = prah ) 이라 이름을 짓는다.
그 이유는 그 어떤 위대한 사람도 왕일 지라도 문지방을 드나들때는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프라하라는 도시를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은 고개를 숙일만큼
번영하게 될것이라는 ..... 그리고 진짜 그 이후로 프라하는 엄청난 번영을 하게 된다.
문지방이라는 단어 prah에서 PRAHA라는 이름이 바로 리부셰에 의해 탄생된것이다.
St. Peter and Paul Curch
1903년에 잔해가 발굴되어 유물로 보존되어 있는
성 로렌스 바실리카 sv. Lawrence's Basilica 이다.
하지만 비셰흐라드의 아크로 폴리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뭐니뭐니해도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 (chapel church of SS. Peter and Pau)l이다.
1070년에 브라티슬라브2세에 의해 건립된 이 성당은 그 기초를 세울 당시 대공 스스로가
돌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12번이나 손수 날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은 오랜 시간에 걸쳐 개축되다가 1885년에서1887년 사이 크게 재정비 되었는데
건축가인 요제프 모커 Josef Mocker가 이성당의 외부를 전체적으로 새롭게 단장 할 때
르네상스와 바로크식의 부분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성당의 본당과 측랑을 다채색의 장식들로 덮게 되었다.
요제프 모커는 프라하 시내의 화약탑과 꾸뜨나 호라와 쁠젠의 여러 고딕 건축을 맡았던 건축가이며
까를슈테인 성과 크지보끌라드 성, 꼬노삐슈떼 성의 개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성당의 가장 큰 변화는 1902년과 1903년의 대공사 때 일어나게 되었는데
모커조차도 존중하여 보존해 놓았던 바로크식 정문이 이 때 프란티쉑 믹슈 Frantisek Miks에의해
신고딕양식으로 바뀌게 되었고 지금의 종탑 두개도 이때 제작되었다.
성당의 정문은 1901년 슈떼빤 잘레샥 (Stepan Zalesak) 의 부조작품 " 최후의 심판"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프란티섹 (Fantisek)과 마리에 우르반 (Marie Urban)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좌우
본당 제단과 오른편 통로에 잇는 목판화들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본당 천정
이곳엔 1870년 에 새롭게 단장 된 국립묘지가 있는데 이것은 1660년부터 존재해 왔던 옛 묘지를 확장, 신축한 것이다.
개축사업은 당시 프라하 시장이었던 바츨라프 슈뚤쯔 Vaclav Stulc 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건축을 지휘 감독한 사람은 묘지의 남, 동쪽의 대리석 무덤을 만든 안토닌 바르비티우스 Antonin Barvitius와
1902년에 완성된 북, 남쪽의 아케이드를 디자인 한 안토닌 위흘 Antonin Wiehl이었다.
터스카닌 스타일의 기둥은 폼페이 벽화가 그려진 궁륭을 받치고 있다.
슬라빈 Slavin 이라고 이름 붙여진 묘지의 한 부분은 특별히 민족을 위해 살았던 인물들의 묘지이다.
이곳은 1889년에서 1893년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비셰흐라드의 사제장이었던 미꿀라쉬 까를라흐 Mikulas Karlach와
애국운동의 대표자였던 뻬뜨르 피셔 Petr Fischer 두 사람의 발의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관 위에 앉아있는 날개 달린 수호천사와
양쪽 아래의 흐느끼는 두 여인의 조각은
1892년에서 1893년에 조각가인 요제프 마우더 Josef Mauder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조각 아래에는 44개의 관이 있는 거대한 지하실이 있다.
그리고 이 안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세계적인 체코의 음악가 안톤 드보르작 Anton Dvorak 과 무하가 잠들고 있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Bedrilch Smetana 의 묘가 있으며
체코인들이 사랑했던 작가 까렐 챠뻬크 Karel Capek또한 고요히 잠들어 있다.
펜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슬라빈으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있는 0.8핵타르(00평)의 이 묘지는 체코의 중요한 예술인들과
과학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묘비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수수한 느낌을 준다.
교회의 오른편-북쪽에는 1872-1874년 사이 요제프 니클라스(Josef Niklas)에 의해 신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단층 짜리 신 사제장 관저(89번지)가 있다. 관저 내부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계단과 예배실인데
이곳은 현재 지역의회에서 관리하는 결혼 예식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요제프 헬리흐 (Josef Hellich)가 그린 체코의 수호성인들의 그림으로 장식되어있다.
니클라스는 또한 1874년에서 1877년 사이에 지어진, 끄 로툰뎨(K rotunde)거리의 90, 91
그리고 100번지 집인 전 사제 평의원집들도 역시 디자인했다.
이 집들은 현재 민족 유적지 비셰흐라드의 관리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비셰흐라드 성당 참사회의소는 또한 1848년과1849년에
얀 리뽀따 (Jan Ripota)에 의해 디자인된 81, 82번지 집들을 소유하고 있다.
프라하를 통치했던 왕조의 그 첫 번째 거주지였으며 지금은 국가적 유적지가 된 비셰흐라드는
국가의식이 고취되던 여러 시대와 또한 오늘날까지도 체코의 문화에 많은 영감을 주는 곳이다.
그래서 역사적 유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되었고 비셰흐라드가 바로크식 성채로 변모한 이후
심하게 파손된 부분과 또한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부분들이 더 이상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한 많은 주의가 기울여 졌다
성 베드로와 바울성당의 남쪽 정원 안에는 옛 병기고 건물과 1889년과 1897년 사이에
요제프 바츨라프 미슬벡(Josef Vaclav Myslbek) 에 의해 제작된 네 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들은 모두 체코 전설 속의 인물들인데 각각 루미르와 노래 (Lumir and the Song) ,
쯔띠라드와 샤르까( Ctirad and Sarka)
자보이와 슬라보이( Zaboj and Slavoj) ,
그리고 체코의 첫 왕조의 시조라고 알려져 있는 프제미슬과 리부셰 (Premysl and Libuse)이다.
지금의 비셰흐라드는 관광객의 발길도 많이 닿지 않는 체코인들의 아늑한 휴식처가 되었고
한때 체코 왕권을 상징하는 웅장한 성채였던 과거의 모습과는 다르게 몇 채의 작은 건물들의 자취만이 남아있는
쇠락한 유적지이지만 지금까지도 모든 체코인에게 자긍심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민족 성지임에는 틀림없다.
언젠가 별빛이 밝은 여름밤에 블타바 강변 위에 있는 비셰흐라드의 여름극장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체코 친구들과 스메타나의 '나의조국'을 들을 수 있다면 그건 무척 의미 있는 추억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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