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m의 까를교는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15개의 입상이 있다.
사암으로 제작되어 진품은 국립박물관 리피다리움에 보관중이다.
양쪽 옆에 장식하는 방식은 로마의 "산탄젤로다리"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프라하 구시가에서 카를교로 가다보면, 카를교 직전 오른편에 바로크양식의 '성 프란시스 천사교회'가 있고
그 앞에 카를4세의 동상이 우뚝 서 있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카를황제는 프라하를 중부유럽의 중심지로 성장시키는 업적을 쌓았으며 블타바강에 돌다리 카를교를 세웠다.
(1) the Madonna and St. Bernard - the first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모 마리아와 성 베르나르드(1709년)
구시가 쪽에서 걸어 들어왔을 때 오른편으로 제일 먼저 나오는 조각상으로 ‘열정’을 상징한다.
열정에 가득 찬 천사와 백부장의 표정, 악마를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전해지는 수탉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 the Madonna, St. Dominic and St.Thomas Aquinas - the second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모 마리아와 성 도미니코, 성 토마스(1708년)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 그리고 ‘신의 개들’이라는 조롱 섞인 별칭이 붙어 있는
충성스런 개 한 마리(도미니코 수도회의 상징)가 조각되어 있다.
(3) the St. Cross with Calvary - the third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예수 수난 십자가
최초의 장식물로 신성 모독죄로 처형된 유대인과 그 지지자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히브리어로 "거룩 거룩 거룩한 주여" 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1708년
(4) St. Anne - the four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 안나 1707
(5) St. Cyril and St. Methodius - the fif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 치릴과 성 메토드 1938
(6) St. John the Baptist - the six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 세례 요한 1855
(7) St. Norbert, St. Wenceslas and St. Sigismund - the seven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 노르베르트, 성 바출라프, 성 지기스문트 1855
(8) St. John of Nepomuk - the eigh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때에 따라서는 비밀을 지키는 의미로 왼손으로 입을 막고 있다. 후광의 별이 다섯 개인 이유는
그가 죽고 난 뒤 다섯 개의 별 모양의 빛이 강 위에 떠올라 사람들이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는 전설에서 기인하기도 하고,
'나는 침묵했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tacui의 5개의 문자에서 비롯된다고도 한다.
프라하의 카를교에 제일 먼저 세워진 동상이 바로 1683년에 제작된 요한 네포무크의 성상이며
요한 네포무크는 로마왕 바츨라프의 두 번째 부인인 소피 왕비의 고해신부였다.
어느 날 국왕이 왕비가 저지른 잘못을 알아내기 위해 요한 네포무크를 불러
그녀가 무슨 고해를 했는지 말해보라고 했는데, 신부는 하느님이 금하는 것을 할 수 없다며 단호히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왕비가 자신에게 정부가 있었음을 고해하던 것을 신하가 엿듣고 왕에게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왕이 요한 네포무크에게 정부의 이름을 대라고 캐물었지만 거절했다는 이야기였다.
왕은 그에게 자신에게 그 내용을 말할 수 없다면 누구 하나의 생명에게 말해 보라고 했고,
그는 옆에 있던 개에게 뭔가 귓속말을 했다. 확실히 하나의 생명에게 뭔가 말하긴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왕은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요한 네포무크가 클라드루비(Kladruby) 베네딕토 수도원의 원장 선거에 참석하여
상관인 프라하 대주교 쪽이 내세운 후보에 한 표 던지자, 빡침이 극도에 달한 바츨라프 4세는
그 즉시 병사들로 하여금 그를 체포하게 하여 고문하고 죽였다.
프라하 대주교 요한 젠슈타인은 교황 보니파시오 9세에게 왕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하는 동시에
아직 시성되지 않은 요한 네포무크를 '순교성인'이라 칭하는 등 존경을 표시했다.
요한 네포무크
그 아래에는 성인의 발자취를 새긴 두 개의 부조가 있다
오른편에는 거꾸로 매달려 바다에 떨어지려 하는 네포무크와
그를 지켜보기를 강요받으면서도 고개를 돌리고 마는 왕비가 조각되어 있다.
매달린 네포무크 신부 부분이 금빛으로 빤딱빤딱한데, 이 부분에 손을 대고 소원을 하나만 빌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왼편에는 네포무크에게 고해하는 왕비를 뒤로 바츨라프 4세와 그의 개가 조각되어 있고,
개부분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개에 손을 대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네포무크의 상 앞에는 카를교를 건너던 관광객들이 이곳에 한 번이라도 손을 대기 위해 줄을 선다
쉬몬 부드늬가 그린 성 요한 네포묵의 순교. 1750년대 작품.
(9) St. Anthony of Padua with baby Jesus - the nin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파도바의 성 안토니 1710
(10) St. Judas Thaddeus - the ten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 유다 타다에우스 1708
(11) St. Augustine - the eleven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 아우구스티누스 1708
(12) St. Cajetan - the twelf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 차예탄 1709
(13) St. Philip Benitius - the thirteen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 필립베네지 1714
(14) St. Vitus - the fourteen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 비타(1714년)
성 비타 또는 성 비투스로 불리는 이 여자 성인은 15세기경의 인물로, 무희들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15) Christ the Saviour with St. Cosmas and St. Damian - the fifteenth one on the right looking from the Old Town Bridge Tower
성 스마스와 성 다미안과 함께 있는 예수 1709
강을 끼고 있는 다른 여러 도시들처럼 프라하에도 많은 다리들이 있다.
그러나 프라하의 까렐교와 교탑들과 같은 훌륭한 중세시대의 구조물을 가지고 있는 유럽도시는 그리 많지 않다.
처음엔 `프라하교', 혹은 그냥 `돌다리' 라고 불리우다가 1870년 이후엔 `까렐교'라고 재 명명된 이 석조 다리는
옛 로마네스크 양식의 `유디스다리Judith Bridge' (1170년경 세워졌으며 1342년의 대홍수로 인해 파손)의 잔해가 있던 자리 옆에
1357년 7월 9일 까렐 4세의 명령으로 만들어졌다.
이 새롭고 멋진 고딕스타일의 다리는 그 후 1496년, 1784년, 1890년에 일어났던 대 홍수를 거뜬히 견디어 낼 수 있을 만큼 견고했다.
페터 파를러 Peter Parler 라는 독일인 건축가에 의해 축조되기 시작한 이 다리는 15세기 초에 그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1170년경 블라디슬라브 1세때 축조되고 그의 왕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유디스 교는 까렐 4세 통치 첫 해까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 다리는 까렐 4세 통치하에서 큰 발전의 기회를 맞이한 프라하의 주요한 다리로서 기능을 발휘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유디스교는 지금의 까렐교보다 약간 북쪽에 놓여 있었으며 그 양 끝엔 교탑이 있었는데 그 부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유디스다리의 구시가쪽 교탑은 십자기사단 광장의 조성계획의 일환으로 철거되었으나 소지구쪽의 교탑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새로 지어진 까렐교는 중부 유럽에서는 독일 레겐스부르크 Regensburg 다리 다음으로 오래되었으며 독특한 공법으로 축조된 것이기도 했다.
또한 그 길이가 500m 정도로서 중유럽에선 가장 긴 것이었다.
1373년경 뻬뜨르 빠를레르는 다리의 접근을 통제하는 기능을 했던 구시가 쪽의 교탑건설을 마쳤다.
길이 520미터에 9.6미터의 폭을 가진 이 새로운 다리는 기존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다리보다 4~5미터 정도 더 높았고
사암을 깎아 만든 벽돌로 이루어진 16개의 교각 역시 더 거대했다.
또한 성과 구시가를 연결하고 유명한 `왕의 길'의 한 부분이기도 했던 이 다리는 전략적인 중요성도 갖고 있어서
1648년에 스웨덴 군대는 프라하를 공격하가기 위해 다리를 이용하기도 하였고
그 과정에서 구시가 교탑의 외관과 다리의 몇몇 장식이 파괴되기도 했다.
1723년엔 기름등이 새로 설치되었다가 1866년엔 다시 가스등으로 교체되었다.
다리는 30개의 바로크 조각상들의 훌륭한 오픈갤러리로서의 역할도 한다.
다리의 북쪽 오른편 세번째조각상인 `예수 수난십자가상'은 다리의 건축과 함께 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십자가 주위에 금박으로 입혀진 히브리어 `거룩 거룩 거룩한 주' 라는 글귀는
십자가상을 모독한 유태인에게 법원이 내린 처벌로서 1696년에 첨가된 것이다.
다리를 장식한 두번째 조각은 성 요한네포무크상(1683년에 제작되었고 그의 순교장면을 담은 청동부조화 속의
그 모습이 행운을 기원하는 관광객들의 손길에 닳아 반들반들 빛나는 바로 그 조각상)이었는데
30년 전쟁 후 이 지역을 잠식했던 제수이트교단에 의해 성자로 추앙되고 선전된 그의 조각상은
후에 중부유럽 여러 지역의 교각에서 모방되고 있다.
그 외의 다른 21개의 조각상들은 1698년에서 1713년 사이에 제작된 것들이었는데 당대의 위대한 조각가였던
마띠아스 베른하드 브라운 (Matthias Bernhard Braun) 요한 브로코우프 (Johann Brokoff )
그리고 그의 아들 미카엘 요한(Michael Johan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Ferdinand Maxmilian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나머지 7개의 작품들은 다소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로서19세기 중반에 채워 넣어진 것들이다).
첫번째 교각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중세시대의 교탑을 통해 다리는 구시가와 연결된다.
교탑은 십자기사단 광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축물이다.
구시가 교탑의 동쪽면은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고 교탑 자체로도 매우 흥미있는 건축물이다.
이 교탑은 미술적 가치가 높은 조각과 건물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모습을 하고 있는데
입구의 바로 윗부분인 교탑의 하단부는 까렐 4세의 통치하에 있었던 이 지역의 문장과
바츨라프 4세의 상징이었던 물총새의 모양이 장식되어 있으며
이렇게 장식적인 요소들이 강조되어 있는 첫번째 층에는 까렐교의 수호 성인인 성 비투스와 까렐 4세, 바츨라프 4세의 모습이,
그리고 그 위쪽으로는 보헤미아의 수호성인들인 성 아달베르트와 성 지그문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성을 마주하고 있는 교탑의 서쪽 부분 역시 원래는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1648년 프라하를 포위공격했던 스웨덴 군대의 포탄 세례로 파괴되었다.
1373년에 만들어진 높은 출입구의 그물 모양 천장은 성 비투스성당 성가대석의 그것보다 앞선 것이다.
교탑이 완성된 것은 1380년경이다. 1621년 백산전투에서 패배한 개신교 지도자 27명이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된 후
(구시청사 앞 마차들이 서 있는 그 옆 바닥에 27개의 하얀 십자가들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그 중 12명의 잘려진 머리가 이 교탑 위에 10년 동안 매달려 전시되었던 끔찍한 일도 있었다.
다리의 반대편인 소지구 쪽으로는 다리의 출입문 양쪽으로 바츨라프4세 통치하의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는
소박한 모습의 교탑 두 개가 서 있다. 둘 중 키가 더 큰 것이 후에 세워진 것으로서
-뽀뎨브라디가의 조지왕때-기존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탑이 있던 자리에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이 교탑은 빠를레르의 스타일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사실은 지금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조각을 위해 마련해 놓은 외벽의 니치(niche 벽감:벽면을 파내어 조각품이나 장식을 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키가 작은 교탑은 1591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된 것이다.
원래의 교탑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것이었으며 블타바 강의 왼편 방어벽 시스템의 한 부분이었다.
교탑이 완성된 것은 1166년이며 그래서 유디스다리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프라하 보존회 The 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Old Prague>라는 단체가 지금 이곳에 위치해 있다.
국가적인 보물이며 문화와 기술의 상징인, 또한 바로크시대의 조각과 그림들, 몇몇 19세기의 작품들의 전시장이기도 한 까렐교는
새롭게 탄생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왕의 길' 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던
까렐교 보호계획의 첫번째 단계는 모든 교통수단을 통제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도보를 제외한 전차나 자동차의 출입이 전면 금지되었다.
전체적인 구조검사를 마치고 근본적인 보수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였다.
단계적으로 임시 지지대가 설치되었고 각 교각들과 아치가 보수되었다. 교각 중심부의 점토가 제거되었고
기초부분이 강재 pile로써 강화되었으며 석재 또한 보강되었다.
파괴되고 상처난 벽돌들을 떼어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으며 같은 모양과 색깔의 벽돌들이 새롭게 교체되었다.
조각장식의 보수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풍화작용과 대기오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던
가장 가치있던 조각품들은 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전 공사의 기술적인 준비는 <역사적 도시와 건축물 재건을 위한 국립 재단 State Institute for the Renovation of Historic Towns and Buildings>의
레오니드 마르나우토프 Leonid Arnautov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 재단에서는 다리를 재포장하는 일련의 기술적, 건축학적 계획을 구상하고 실행하였는데 그
계획에 따라 다리 중심부의 차도가 보도로 바뀌었으며 그 결과 역사적 유물로서,
그리고 보행자를 위한 쾌적한 환경의 통행로로서의 역할이 한층 강화될 수 있었다.
'My travel abroad. > Czech(2013.Aug)'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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