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India(2012,Jan)

4-1 산치(Sanchi) 가는 길

봉들레르 2012. 1. 29. 11:49

 

산치는 마디아 쁘라데쉬주의 중앙, 주도인 보팔의 북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석가모니가 직접 이곳을 방문한 적은 없었지만,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이 세운 불탑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호텔에서 바라 본 보팔시내

사암으로 된 산등성이의 사면을 따라 자리잡은 도시로, 남쪽에는 커다란 호수가 2개 있고

호수 주위로 여러 개의 궁전과 1728년경에 세운 요새가 있다

 

가는 호텔마다 환영의 뜻으로 꽃을 같은 방식으로 장식했다

 

호텔의 야외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아래쪽에서 기도중인 사람

보팔은 1984년 12월 역사상 최악의 산업재해가 일어났던 곳이다.

이 사건은 유니언카바이드사라는 미국 기업의 인도 지사가 소유한 살충제 공장에서

메틸이소시안산염이라는 유독 가스가 45t이나 새어나감으로써 발생했다.

공장 주변의 인구밀집지역이 가스로 뒤덮이면서 수많은 주민이 즉사했고,

공포에 질린 수만 명의 주민들이 도시를 탈출하려고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최종 사망자는 2,500명으로 추산되었고, 5만 명이 독가스에 노출되어 호흡기질환과 눈병에 걸렸다

 대 참변을 상징하는 포스터

사고 후 버려진 공장

20세기에 발생한 세계 3대 환경참사의 하나로 평가되는 가스중독사고가 났던 도시 보팔

보팔에서 산치로 간다.

 

 

 

땔감을 이고 가는 두여인네가 박자를 맞추면서 간다.

 

버스앞 유리창에 국화에 둘러쌓인 작은 상을 보니 버스기사도 힌두교 신자

 

 

 

 

 

작은 마을 산치에 도착했다.

 

15곳의 유적지의 입장권의 디자인이 같다

 

산치 유적도(구릉 위의 중요 부분)

산치대탑 입구에 노점상

산치는 비데하(Videha)라는 강력한 국가에 인접한 마을이었는데, 그 곳에서 아쇼카 태자는 한 마을 처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처녀와 결혼을 약속하였고, 언젠가 제왕이 되면 꼭 약속을 이행하리라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아쇼카 왕은 제왕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전쟁에만 골몰하였고, 그 때의 언약에 죄책감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이 여인은 아쇼카 왕과의 하룻밤 인연으로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리지도 않은 채 온갖 멸시와 수모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갔다.

어느날 그녀는 이제 세상이 싸움 없는 날로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아쇼카 대왕에 의한 결정이라는 것도 들었다.

그녀는 아들을 불러 말하였다. "네 아버지는 바로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 대왕이시다." 그리고 아들에게 아버지를 만나러 가라고 재촉하였다.

그들의 사랑을 증명했던 아쇼카 대왕의 신표를 아들에게 쥐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아쇼카 대왕은 인도의 전역에 구호소․보시원 등을 세우고,

전몰가족․상이가족 등 전쟁피해자들을 직접 보살폈기 때문에 큰 제재를 받지 않고도 만나볼 수 있었다.

왕은 아들과 함께 서둘러 산치로 갔다. 그러나 그 때 이미 그녀는 숨을 거운 뒤였다.

아쇼카 대왕은 아들과 함께 무엇이 이 여인을 위한 최선의 길일까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 때 아들의 소원대로 이 어머니의 유해 위에 불탑을 세울 것을 허락하였다. 산치대탑은 이렇게 하여 세워졌다.

 

아쇼카왕은 인도를 통일한 왕이다.

아쇼카왕은 불교미술사에서 불탑(佛塔)의 조성을 진작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불탑은 붓다의 유골을 봉안한 반구형의 기념물을 말한다. 산스크리트어(Sanskrit)로는 스투파(stūpa)라고 하는데,

이 말이 중국에 들어와 한자로 옮겨지면서 ‘탑파(塔婆)’, ‘탑(塔)’ 이라는 말이 생겼다.

붓다가 열반에 든 후 불교도들은 그의 시신을 다비(화장)하여 그 유골을 인도 각지의 8개 스투파에 모셨다.

아쇼카는 이 8개의 스투파 가운데 7개를 열어(하나는 그곳을 지키던 코브라 뱀들 때문에 열 수 없었다고 한다)

8만4천 개의 스투파를 세웠다고 한다. ‘8만4천’ 이라는 수는 인도인들이 많다는 뜻으로 쓴 상징적인 숫자로,

이것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아쇼카가 세운 스투파는 적어도 수백 개에 달한 듯하다.

오늘날 인도에 남아 있는 대규모 스투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쇼카 때까지 기원이 올라간다.

아쇼카가 이렇게 많은 스투파를 만든 것은 인도같이 광대한 땅에서

불교도들이 손쉽게 붓다에게 참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멀리 서북쪽 변방의 아프가니스탄까지,

북쪽의 네팔까지, 남쪽의 스리랑카까지 포교승을 보내고 스투파를 만들게 했다.

이 뒤 스투파는 인도를 넘어 불교권 전역에서 교조인 붓다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조형물로 자리잡았다.

아쇼카왕을 주재로 한 영화 "아쇼카 왕과 카우르와키 공주"

산치대탑은 언덕을 올라가야한다.

 

 

 

 

산치는 인도의 불교 유적지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며, 대스투파 등 많은 불교 건조물은 1989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무슬림에 의한 파괴를 모면해서 여러 유구가 다수 잔존해 있으며, 불교미술의 지속성을 여시히 말해주는 점에서 귀중하다.

19세기에 발견되어 이후 많은 주목을 모았던 이 유적은 고대 상업도시로서 번영했던 비디샤(베스나갈)에서

그다지 멀리 않은 나지막한 언덕 위에 스투파 ․ 사당 ․ 승원 등이 다수 산재되어 있다.

산치대탑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