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의 해변을 둘러보기 위해서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것도 시도해 볼만한 일이다.
고아 G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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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여행을 떠나며
justinKIM
고아는 16세기 초 포르투갈군에 점령되어 리스본을 본뜬 새로운 식민시로 재건되었다.
고아 Goa
고아가 수상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는 역사적 오명에 시달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고아에는 태양과 모래, 환각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고아의 매력은 이 지역에 인도의 다른 지역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남아 있으며, 다른 인도 주들과는 다르게 쉽게 익숙해지고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작다는 점이다. 고아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익숙한 유럽 식민주의의 흔적이나 그림같은 이국적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라 서구인들이 자신들과 관련있다고 느끼는 로마 카톨릭과 일종의 사회적, 정치적 진보주의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힌두교도 숫자가 로마 카톨릭 신자의 숫자보다 많기는 하지만, 고아에서는 사리보다는 스커트를 입는 이들이 많고 사람들은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힘든 관대함과 정중함을 보여준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아라비아해와 약 100km의 해안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을 지니고 있는 고아는 야자수를 비롯한 시원한 숲을 아울러 끼고있어 가히 지상의 낙원이라 할 만큼 아름다운 휴양도시이다. 일찍이 포루투칼의 영향을 받아서 인도와는 또 다른 느낌을 풍기며 거리 곳곳마다 하얀색의 성당들이 이국적 분위기를 더해 준다. 60년대에 세계 각국의 히피들이 이곳으로 찾아 들어와 자유를 발산한 이곳 해변에서는 아직도 그때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는 듯 하다.
고아의 초기 역사는 전설과 뒤얽혀 있다. 힌두 서사시 〈마하바라타 Mahābhārata〉에는 고만타크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힌두 경전인 푸라나에서는 '인도의 낙원'을 뜻하는 바푸리 또는 고베라고 부르고 있다. 고아는 계속 힌두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1472년 이슬람 왕조에 넘어갔다. 1510년 아폰수 달부케르케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에게 정복당했으며 잇달아 프란체스코 수도회 선교사들과 프란시스 사비에르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어와 많은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식민지가 된 구고아는 곧 동방에 있는 전(全)포르투갈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1575~1600년에는 무역을 통한 번영과 건축의 화려함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뒤 네덜란드가 고아를 봉쇄하고 마라타족이 쳐들어오면서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해 포르투갈령 인도정부는 1759년 마침내 파나지로 옮겨갔다. 콜레라를 비롯한 여러 유행성 질병이 퍼져 구고아에 사는 사람들 수는 계속 줄었고, 1835년 무렵에는 몇 명 안 되는 사제와 수도승, 수녀들만 남아 있었다.
고아 시장에서 향신료 가게
보통 고아를 도시이름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1987년에 인도의 25번째의 주로 승격되었고 판짐PANJIM이 수도로 있다. 크게 바가토르, 차포라, 바가, 안주나해등의 북부해변과 꼴바와 베나울림등의 남부해변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아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숍
1947년 독립한 인도정부는 포르투갈에 고아를 넘겨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국경에서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게릴라전이 있은 다음 1961년 12월 인도 군대는 고아로 쳐들어가 마침내 그곳을 차지했다. 고아는 1962년 인도에 합병되었다. 면적 3,702㎢, 인구 1,343,998(2001 추계).
코치(Kochi), 코친(Cochin))_고아 가는 길
항구도시인 코치는 섬들이 밀집해 있고 좁은 반도가 펼쳐진 지역에 있다. 도시의 오래된 부분은 드물게도 중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시골 마을이 열대의 말라바르(Malabar) 해안에 펼쳐진 모양이다. 이곳에서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500년전 세워진 포르투갈식 주택이 꽉 차 있는 구불구불한 거리, 외팔보식 중국 고기잡이 그물,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 분산)까지 그 근원이 올라가는 유대인 공동체, 16세기에 세워진 유대 교회,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벽화가 있는 궁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타칼리(Kathakali) 댄스-드라마 공연 등을 볼 수 있다. 페리가 코치의 여러 지역 사이를 왕래하며 항구에서는 가끔 돌고래도 보인다. 역사 유적 대부분은 코친 요새나 마탄체리(Mattancherry)에 있다. 싼 숙소는 본토의 에르나쿨룸(Ernakulam)에서 찾을 수 있다.
인디안 에어라인이 방가로르, 뭄바이, 델리, 고아, 체나이로 매일 운행한다. 비용 때문에 비행기를 탈 수 없다면 코치에서 바다쪽만 빼고 어디로든 이어지는 버스가 많다. 주(州) 버스이건 개인 버스이건 잡아타고 쉽게 다른 도시로 갈 수 있지만 예약 시스템은 없다. 버스에 올라타 스크럼 안으로 밀고 들어가 운좋게 자리가 있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싫다면 기차역으로 가 해안을 따라 달려 주요 목적지까지 가는 기차를 타면 된다. 매일 출발한다.
인도 고아에서 생긴일 고아 Goa
인도여행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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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고아는 포르투칼의 식민지령의 수도역할을 했다.
고아의 길거리에서 파는 포르투칼식 인도 롤빵이 그 식민지가 남긴 유산이다.
인도 인구 전체를 통털어서 2% 미만인 기독교가 상당수 이 고아에 있다.
뱃머리에 카톨릭 성자 성 프란시스가 그려져 있다.
올드 고아의 무덤의 돌에 아직도 역사의 흉터, 포르투칼 문양과 글씨가 적혀있다.
고아를 이해하는 것은 인도 이전에 기독교를 들고 들어온 포르투칼을 이해해야 한다.
고아 지역의 벨라고하에 있는 봄 제수스 성당에 크리스마스 불빛이 반짝거린다.
1510년 고아지역은 아폰수 달부케르케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에게 정복당했으며
잇달아 프란체스코 수도회 선교사들과 프란시스 사비에르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어와
많은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위의 사진의 다른 방향 모습 벨라고하에 있는 봄 제수스 성당(1594~1605)
고아는 해안선길이 100㎞인 앞바다에 있다, 고아 섬에는 길고긴 해변이 있다.
밤이 다된 해변에서 떼거리로 관광을 온 남녀들이 비치볼을 하고 있다.
Goa는 유럽인들의 새로운 휴양지로 떠오르고 있다. 그곳에서의 집 한채 값은 우리나라돈 2400만원 정도이다.
그러니 돈 많은 유럽이들 그곳에 집 세워놓고 일년의 반쯤은 그곳에서 놀만하다.
바닷가에서 요가의 연꽃자세를 취하며 수행중인 사람이 있다.
아무래도 이 요가는 참선에서 득도에 성공 할것 같지 않은게, 성스러운 소가 그의 코앞에서
수행중인 그를 조금 한심한 듯이 바라보고 있다.
고아의 인도 점쟁이가 사람보다 더 잘 꾸며 입은 성스러운 소를 끌고 나팔을 불며 손님을 끌고 있다.
인도 고아에서 생긴일 고아 G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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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교통 숙소정보
버스로 오게 되는 경우 뭄바이 역 맞은편 장거리버스 터미널이나 관광버스를 이용해서 올 수 있다. 주로 저녁에 출발하여 아침에 판짐에 도착한다. 보통 15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판짐에 도착해서 릭샤나 마루티 합승봉고를 타고 인근 바가해변이나 바가토르 해변까지 20루피에 이동할 수 있다.
숙소정보
다양한 종류와 가격대의 방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으며 성수기와 비수기에 따라 방 값 또한 차이가 많이 난다. 주로 11월에서 1월 사이가 가장 비싼 편이다. 해변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숙소가 많이 모여 있는 해변(칼랑굿 해변)에 방을 잡은 후 다른 해변들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여럿이 있는 경우에는 민박집을 대여하는 것이 경제적일 수가 있다.
Shruti Resort
주소: gaura Waddo, Next to little Italy Calangute Goa. TEL: 275612
칼랑굿 해변에서 내려 해변들어가는 길목으로 들어가다가 왼편으로 리틀 이태리 호텔 들어가는 길로 15m 가량 걸어 들어가면 3층의 아담하고 깨끗한 숙소가 있다. 2000년 1월에 새로 지은 건물이므로 실내가 깨끗할 뿐만 아니라 넓은 침실공간과 샤워실, 그리고 발코니까지 달려있다.
요금: 더블 250루피, 세명이서 300루피까지 잘 수 있다.
인도 고아에서 생긴일 고아 G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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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베이에서 남쪽으로 400㎞ 떨어진 서해안에 위치한다. 주도는 파나지(옛 이름은 판짐)이다. 마하라슈트라·카르나타카 주와 접하고 있다. 해안선길이는 100㎞이고 내륙으로 64㎞ 뻗어 있으며, 앞바다에 있는 고아 섬을 포함한다. 주요도시로 파나지, 구(舊)고아(벨라고아), 마르가오(옛 이름은 모르무가오)가 있다. 고아 동부에는 서(西)고츠 산맥의 사히아드리 구릉지대가 솟아 있는데, 이 구릉지대는 손사가르에서 1,034m 높이에 이른다. 서쪽으로 가면 지대는 파상을 그리며 낮아지고 곳곳에 강물이 흐르며, 야자수로 둘러싸인 해안평야가 나타난다. 기후는 열대성이며 강수량이 많다. 고아에서 가장 큰 만다비 강과 주아리 강이 앞바다에 있는 고아 섬을 감돌아 흐른다. 이 섬의 곶으로 불리는 정상부는 고아 항을 2개의 정박지로 나누는 큰 돌출암이다.
고아는 이전에 포르투갈령 인도의 수도였고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다만·디우와 함께 총독이 다스리는 단일 행정단위이자 대주교 관구였다. 1987년 고아는 따로 분리되어 하나의 주가 되었고, 나머지 두 지역인 다만과 디우는 새로이 다만디우 연방직할주로 합쳐졌다. 고아의 초기 역사는 전설과 뒤얽혀 있다. 힌두 서사시 〈마하바라타 Mahābhārata〉에는 고만타크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힌두 경전인 푸라나에서는 '인도의 낙원'을 뜻하는 바푸리 또는 고베라고 부르고 있다. 고아는 계속 힌두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1472년 이슬람 왕조에 넘어갔다. 1510년 아폰수 달부케르케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에게 정복당했으며 잇달아 프란체스코 수도회 선교사들과 프란시스 사비에르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어와 많은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식민지가 된 구고아는 곧 동방에 있는 전(全)포르투갈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1575~1600년에는 무역을 통한 번영과 건축의 화려함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뒤 네덜란드가 고아를 봉쇄하고 마라타족이 쳐들어오면서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해 포르투갈령 인도정부는 1759년 마침내 파나지로 옮겨갔다. 콜레라를 비롯한 여러 유행성 질병이 퍼져 구고아에 사는 사람들 수는 계속 줄었고, 1835년 무렵에는 몇 명 안 되는 사제와 수도승, 수녀들만 남아 있었다.
1947년 독립한 인도정부는 포르투갈에 고아를 넘겨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국경에서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게릴라전이 있은 다음 1961년 12월 인도 군대는 고아로 쳐들어가 마침내 그곳을 차지했다. 고아는 1962년 인도에 합병되었다. 면적 3,702㎢, 인구 1,343,998(2001 추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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