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Peru(2014 Dec)

신비의 나라 잉카제국

봉들레르 2014. 11. 3. 00:38

 

 

태양을 으뜸신으로 섬긴 잉카족.‘잉카’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황제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잉카제국은 안데스 지방에 있었던 여러 국가 가운데 제일 늦게 세워진 왕국이었다.

그런데 13세기에 망코 카파크라는 왕이 쿠스코에 도읍을 정한 뒤부터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망코는 태양신전을 쌓았고, 태양의 아들로 숭앙되었다.

15세기 중반 제9대 황제 파차쿠티 때에 잉카는 둘레의 여러 종족을 정복해 오늘날의 페루·콜롬비아·칠레를 아우르는 큰 나라를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는 아마존 강이 시작되는 밀림 깊숙한 곳까지 군대를 이끌고 갔다.

원정군은 그곳에서 금광을 찾았는데 흙을 한움큼 쥐면 금가루가 잔뜩 섞여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잉카는 황금시대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잉카제국이 본격적으로 번성을 누리기 시작했던 시기는 1483년 즈음이다.

이때는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자리를 옮겨 르네상스를 꽃 피우던 시기였다.

우리나라는 조선의 성종이 집정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시간상으로 보면 가까운 과거인 것이다.

 

뒷날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군인 180명을 이끌고 쿠스코를 점령했을 때

태양의 신전 돌벽에는 황금덩어리가 여기저기 박혀 있었고

해·달·별의 제단에는 황금이 두껍게 입혀 있었다. 또 황금으로 만든 황제 상(像)이 18개나 되었다고 한다.

 잉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무너졌다.

아타왈파 황제의 근위대 5,000명이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짐승(말)과 천둥소리를 내는 막대기(총)에 놀라

180명밖에 안되는 스페인 군인과 말 27마리에게 전멸한 것이다.

1531년 11월16일,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스페인 왕의 사절로 왔다고 속이자 아타왈파 황제는 방심하고 그를 만났다.

황제의 근위병들은 무기를 들지 않은 맨손이었다.

스페인 종군 신부가 성경을 건네며 “여기에 손을 얹고 하나님과 스페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말하자 황제는 성경을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페인군의 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창기병이 말을 몰고 짓쳐 나왔다.

사로잡힌 아타왈파 황제는 자기가 갇힌 방을 가득 채울 만큼 황금을 줄 테니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그 방은 높이가 7m, 너비가 6m나 되었다.피사로가 허락하자 두 달 만에 황금 200상자, 은 20상자, 보석 60상자가 모였다.

피사로는 그것들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가 황제를 불태워 죽이려고 하자 황제는 기독교도가 되겠다고 애원해 겨우 화형을 면하고 목 졸려 죽었다.

처형 직전 아타우알파 황제는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와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지금도 페루 산악지방에는 머리가 땅 밑에서 솟아나는 잉카리(Incari, 일종의 메시아)가 돌아올 날이 임박했으며

잉카리의 부활과 함께 잉카제국의 영화가 부활된다는 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흔히 잉카문명의 잃어버린 도시라 불리는 마추픽추는 500년 전에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우루밤바 계곡(Urub-amba Valley)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고 해수면 위로 2,430m 올라가 있으며

잉카인들의 수도인 쿠스코(Cuzco)라는 곳에서 북동 방향으로 90~100km 떨어져 있다.

주변 환경으로 자리한 어마어마한 숲이 이같이 외진 곳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수백 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수많은 잉카 유적들도 스페인(Spain)군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1911년, 미국 예일대의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 1875~1956) 교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도 처음부터 이 도시의 존재를 알고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잉카의 마지막 수도를 헤매던 끝에 정착민들에게 정보를 얻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 마추픽추를 발견하는 성과를 이룬다.

그는 1908년 처음 안데스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잉카문명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3대 독립 영웅 중 한 사람인 시몬 볼리바르의 발자취를 찾기 위함이었다.

곁들여 콜럼버스가 그랬듯 빙엄도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에서 황금을 찾겠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1911년 7월 24일, 원주민 멜초르 아르테아가(Melchor Arteaga)의 도움으로 첩첩산중에서 도시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멜초르의 11살짜리 아들의 안내로 이 도시를 발견하고, 처음에 그곳이 황금의 땅 ‘빌카밤바’라고 여겼다.

그러나 황금은 없었다. 실망한 그는 마추픽추보다 더 깊은 곳에 빌카밤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우선 미국으로 돌아갔다.

3년이 지난 1914년, 예일대와 내셔널지오그래픽사의 지원을 받아 다시 안데스로 왔고 잉카문명의 유물들을 본격적으로 발견하면서,

미스테리한 도시 마추픽추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마추픽추(Machu Picchu)가 잉카인들의 탄생지이거나 혹은 처녀 태양(Virgins of the Sun)의 정신적인 중심지로 추측하였다.

이곳을 잉카인들이 선택하게 된 것은 아마도 성스러운 산들이 보이는 곳을 잉카 지배자들이 종교적인 피난처로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짐작된다.

잉카인들은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지으면서 태양의 가치를 인지하고, 일종의 해시계인 인티와타나를 만들었다.

와이나픽추 가까이 높직한 곳에 위치한 자연석을 깎아 춘·추분과 동·하지에 태양이 뜨는 곳을 알았고, 그림자의 길이와 위치로 씨를 뿌렸다.

추수할 때와 절기를 알았기에 이를 응용해 해시계를 만든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마추픽추(Machu Picchu)가 잉카인들의 탄생지이거나 혹은 처녀 태양(Virgins of the Sun)의 정신적인 중심지로 추측하였다.

이곳을 잉카인들이 선택하게 된 것은 아마도 성스러운 산들이 보이는 곳을 잉카 지배자들이 종교적인 피난처로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짐작된다.

잉카인들은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지으면서 태양의 가치를 인지하고, 일종의 해시계인 인티와타나를 만들었다.

와이나픽추 가까이 높직한 곳에 위치한 자연석을 깎아 춘·추분과 동·하지에 태양이 뜨는 곳을 알았고,

그림자의 길이와 위치로 씨를 뿌렸다. 추수할 때와 절기를 알았기에 이를 응용해 해시계를 만든 것이다

 

 

페루 마추피추 (1)

 

누구나 한 번쯤은 복권에 당첨되는 꿈을 꾸어봤을 것이다.

단 몇 장의 복권으로 순식간에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복권의 매력이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약 3천600억 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상금이 13명의 노동자들에게 돌아간 적이 있다.

이렇게 엄청난 상금을 받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당첨될 확률은 적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복권 구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복권보다 수백 배, 수천 배의 재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누구든 관심을 갖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것은 복권보다 경쟁률도 훨씬 낮다. 바로 이점이 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엘도라도를 찾고자 한 이유이다.

신대륙이 발견된 지 얼마 안 되던 1511년 파나마에 정착한 스페인인들 사이에 굉장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전설적인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에 대한 이야기로 남쪽으로 며칠만 항해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유한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멕시코 아스텍의 왕인 목테수마(Moctezuma) 왕이 금 위를 걷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보다 부유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바로 잉카 제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신비의 나라는 황금이 너무 흔해서 말 그대로 황금 보기를 돌처럼 한다고 했다.

금은 지금도 부(富)의 궁극적인 기준이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땅 밑에 금을 가지고 있으며

더욱이 바닷물에도 금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금은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물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금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은 금을 찾아내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점이다.

땅속에 있더라도 지각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양질의 금광이라 하더라도 순금은 잡석의 총량에 1 : 300,000 정도이다.

바닷물의 경우 금의 농도가 짙은 곳이라 하더라도 바닷물 1톤에 금 10밀리그램밖에 들어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금 1그램을 생산하려면 바닷물 100톤을 걸러내야 하므로 금을 채취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금이 고대인들로부터 주목을 받은 것은 시간이 가더라도 부식이 되지 않으며 몇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녹일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1그램의 금은 약 2천 미터의 가느다란 선으로 늘일 수도 있다. 또한 망치로 두들기면 두께 0.1미크론의 금박을 만들수도 있다.

금을 채취하는 방법은 땅 속에서 광맥을 찾는 것과 사금으로 채취하는 것이다.

금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광맥은 석영으로 대개 200만~100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

사금은 원래 바위 속에 갇혀 있었으나 침식작용으로 바위에서 떨어져 나와 냇물에 밀려 바다로 가는 사이에 알갱이로 바뀐 것이다.

잉카보다 선진 문명 모체(Moche)

이 장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및 2007년 ’세계 7대 걸작품’에 선정된

페루 잉카의 마추피추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페루의 고대사를 간략히 설명한다.

사실 페루의 역사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잉카의 전(前) 문명은 초기 농경기(기원전 2500~기원전 900년경),

페루 북부에 있었던 차빈문명(기원전 900~ 기원후 200년)을 문명 형성기, 기원후 200~600년을 고전기로 부른다.

‘고전기’라는 표현은 미국의 일부 학자들이 멕시코와 페루 원주민 문명의 문화 및 물질적 발전의 절정기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데

일부 학자는 ‘만개기(滿開期)’라고도 부른다.

이들의 중심으로는 페루 북부 해안을 따라 약 600킬로미터에 걸친 모체(Moche) 문명이 있는데

놀랍게도 모체는 후술하는 잉카보다 앞서 나타났지만 어떤 면에서는 잉카보다 뛰어난 문명이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특히 이들은 민족학적 관점에서 볼 때 마야와 같은 중앙아메리카의 민족들과 관련이 있다기보다

 오히려 안데스지역 자체에서 발달한 독자적인 문명이라고 인식한다.

모체는 차빈문명의 계승자로 진정한 도시와 조직화된 국가를 창출했던 최초의 페루문명이다.

권력이 종교적 믿음에 근거한 신정사회였던 모체는 약 2,000년 전에 탄생해

서기 300~600년 사이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수도는 페루 북쪽 해안인 모체이다.

모체족이 거주한 지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비가 내리지 않는 지대에 속하는데 주민이 적어도 1백만 명이었던 모체는

안데스산맥에서 사막 계곡으로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놀라운 관개수로기술을 터득해 곡물을 풍족하게 생산하며 번영을 누렸다.

모체는 1890~1900년 독일의 고고학자 막스 울레에 의해 처음 전 세계에 알려졌지만 잉카 문명에 비해 각광을 받지 못했다.

모체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1987년 도굴업자들이 페루 북부 시판 근처의 유적을 파헤쳐

금·은으로 도굴된 대량의 유물을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하면서 시판에 주목했다.

곧바로 한 고분에서 금으로 장식된 장신구들이 발견되었고

주인공의 주위로 9명의 부인들이 매장되었는데 학자들은 이를 순장 풍습으로 인식한다.

잉카가 모체의 계승자임은 분명하지만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이 보인다. 모체는 신정사회였던 반면 잉카는 시민사회라 볼 수 있다.

즉 모체에서 왕이 신을 대신해 통치한 반면 잉카에서는 정치적 권력이 왕에게 있고 종교적 권력은 제사장인 빌락 우모에 있었다.

종교적 체계도 같은 점과 다른 점이 발견된다. 태양과 달을 동시에 섬겼다는 양면성은 같지만 중요시했던 신은 달랐다.

모체는 달이나 은하수와 관련된 신을 중요시한 반면 잉카는 태양과 관련된 신을 받들며 자신들이 태양신의 후예라고 믿었다.

일반적으로 고전기는 멕시코와 페루가 거의 같은 시기에 발달했다고 인식하나 멕시코가 페루보다 약 200년 정도 앞섰다는 주장도 있다.

황금의 제국 잉카

고전후기는 기원 600년부터 1532년으로 추정하는데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잉카는

바로 이 시기로 학자들은 11세기경부터 비로소 페루의 여러 문명이 잉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고 추정한다.

잉카는 전형적인 고산(高山) 부족국가로 꾸스코(Cusco)를 수도로 한 후 계속 정복 전쟁을 벌여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언어 및 종교적 통일을 이룩했다.

잉카란 제국의 최고 지도자를 뜻하는데 어원은 황실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카 전설에 의하면 ‘띠띠까까 호수(Lago Titicaca)’로부터 이주해온 백성들을 태양신이 불쌍히 여겨

그의 아들 망코 카팍과 딸 마마 오끄요에게 왕권의 상징인 황금봉을 주고

약속의 땅에서 인간의 문명을 깨우치고 이끌어 가도록 했다고 한다.

이후 망코 카팍의 아들인 신치 로카가 그의 누이동생 마마쿠라를 왕비로 맞으면서 잉카는 신화가 아닌 역사시대로 들어간다.

잉카제국은 원래 ‘따우안띤수요(Tahuantinsuyo)’라 하였는데 그 뜻은 ’태양이 빛나는 세계의 네 부분‘이다.

잉카는 수도인 꾸스코가 세계의 중심이자 성도(聖都)로 생각하면서 국토를 친차수요, 꼬야수요, 안띠수요, 꼰띠수요로 4등분했다.

안데스 원주민들은 잉카를 ‘태양의 후손’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태양을 최고의 신이요 창조주로 숭배하였으므로 황제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무한하며 신성시되었다.

그러므로 잉카는 순수한 황실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그들의 자매끼리 결혼했다.

잉카의 통치를 돕는 사람은 귀족 계급으로 황실과 상당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 밑에 ‘꾸라까스(curacas)’라는 주지사가 있고 사회의 최하층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은 거의 자유가 없이 임무만 부여받았고 노력의 결과도 황실의 소유였다.

로카 왕의 손자 마이타 카팍(1195~1230) 시대에 지배 면적이 확대되었고

제9대 파차 쿠텍(1438~1471) 시대에는 인구가 1천100만 명이나 되었다. 당시의 수도는 꾸스꼬(Cusco)였다.

16세기 초에는 잉카 제국이 대륙 서부의 안데스 산맥과 태평양 사이의 해안에 남북으로 3천200킬로미터 이상 뻗어 있고

 면적도 1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대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잉카인들은 읽고 쓰지를 못했고 형식적인 수학 체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물론 그들에게도 의사를 소통하는 방법은 있었다.

‘키이프(quipu)’라는 결승문자(結繩文字)로 노끈의 빛깔이나 매듭짓는 방법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뜻을 표시했다.

놀라운 것은 다른 문명에서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동물이나 바퀴를 사용한 도구를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 계곡을 잇는 적교(吊橋), 농업용수로, 거대한 성채를 비롯하여

궁전과 신전을 건설하였으므로 현대인들이 놀라는 것이다.

의학과 식물학 지식 수준 놀라워

잉카의 신비성은 의학과 식물학에 대한 지식수준이다.

잉카에 의사와 외과 의사 계급이 있었고 국가가 고용한 약초 채집자들도 있었다.

잉카 의사들은 절단 수술을 했으며 응급상황에서는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수술도 감행했다.

두개골 수술은 아마도 뇌가 부풀어 오르는 치명적인 증상에 대한 처방으로 인식하지만

현대인들도 어렵다는 두개골 수술을 원시적 기구로 했다는 것에 놀라는 것이다.

잉카 문명을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미라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라가 현대인들을 놀라게 하는 요인 중에 하나인데

잉카인들도 이집트에 버금갈 정도로 미라 제작술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동시대의 여타 문명과 다른 것은 제국 안에서 나오는 금으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마치 구리나 놋쇠를 쓰듯이 금을 사용했다.

잉카인의 종교는 태양숭배였으므로 종교적인 건물에는 태양신의 상징으로 황금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런데 잉카인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돌발 사고가 일어났다.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200여 명의 군사들이 잉카제국에 들이닥치더니

급기야는 그들의 왕인 와타알파를 죽이고 잉카 제국 전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세계상식백과』, 리더스다이제스트, 1983
「남아메리카 지배한 신비의 황금문명 모체」, 이충환, 과학동아, 2001년 9월
「모체족 무덤 베일을 벗고 그 진수를 드러내다」, 크리스토퍼 B. 도넌, 내셔널지오그래픽, 2001년 9월
「페루의 고대 문명이 남긴 죽음의 사원」, 피터 그윈, 내셔널지오그래픽, 2004년 7월
『페루』, 심국웅, 송산출판사, 2001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제임스 E. 매클렐란 3세 외, 모티브, 2006

 

페루 마추피추 (2)

 

잉카인들은 그들의 세계에 하얀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한 스페인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자

스페인인들이야말로 태고의 전설로 전수되어 내려온 신들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전설에는 하얀 얼굴의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들을 지배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1530년대 초에 하얀 얼굴의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오늘날 페루인 잉카제국에 알려졌고,

잉카들은 스페인인들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므로 황금을 찾아 이곳에 도착한 피사로가 이끄는 200여 명의 군사들에 의해

잉카제국이 멸망시킬 때조차 스페인들의 점령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곧바로 멸망시킨 것은 아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인들이 벌떼와 같이 이들 지역으로 몰려들었는데

피사로는 원래부터 황금을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아메리카 연안을 탐사했다.

그러나 잉카제국에 어마어마한 황금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잉카제국을 공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므로 피사로는 귀국하여 황금의 땅 엘도라도에 대해 스페인 왕에게 설명하고

잉카 제국 정복에 필요한 후원을 요청했다. 피사로의 요청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 승낙되어 당시로서는 최첨단 대포와 화기,

정예병 180명을 데리고 1532년 페루에 상륙했다.

피사로가 작은 인원으로 잉카제국을 정복할 수 있다고 스페인 왕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멕시코의 아즈텍 왕국을 정복한 코르테스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코르테스는 ‘일단 왕을 사로잡으시오’라는 말을 해주었다.

나라의 존재가 왕의 신권에 달려 있는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얀 신의 얼굴이 지배하다

그가 도착할 당시 강력한 황제 와이나 카파크 왕은 에콰도르 원정 중에 열병으로 죽고

그의 장남 와스카르가 제1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와스카르는 인망이 없었으므로 카파크 왕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 난 아들인 아타왈파가 반기를 들어 제13대 왕이 되었다.

피사로가 등장할 때 마침 와타왈파는 당시의 수도였던 쿠스코로 입성하기 전에

전쟁에서 얻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안데스 산 속의 카하마르카 온천에 머물고 있었다.

피사로는 꾀를 내어 카하마르카에서 치료하고 있는 아타왈파 왕에 접근한 다음 전격적으로 왕을 체포했다.

왕이 포로로 잡히자 잉카는 어떠한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다.

내전이 막 끝나고 이제부터 국가를 재건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이 아타왈파 왕이 포로로 잡히자 잉카 제국은 왕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7×5×3미터 크기의 방 안에 피사로가 올린 손 높이만큼의 보물을 채워주겠다고 약속했다.

잉카인들은 약속대로 피사로에게 보물을 주었다. 문제는 그 후의 처리 방법이었다.

피사로는 보물을 확보했으니 아타왈파를 살려주자고 하였지만 부하들은 왕을 살려두면 무사히 귀환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하였다.

수많은 인디언들에게 포위된 상태이므로 약속대로 왕을 석방한다면 그들이 곧바로 공격해 올 것이라며 절묘한 대안을 제시했다.

아타왈파를 살해하는 대신 다른 왕을 옹립하자는 것이다.

아타왈파의 동생인 망코 2세를 새 왕으로 옹립하면서 아타왈파와 왕권 경쟁에서 패배한 와스카르 일족과도 손을 잡게 하는 것이다.

피사로를 이용하여 권력을 갖겠다는 야심으로 와스카르 파는 피사로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왕으로 추대될 것을 통보받은 망코 2세도 피사로를 단순한 황금 야욕에 눈이 먼 약탈자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스페인인과의 동맹을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는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피사로는 잉카인들보다 한 수 위였다. 피사로는 우선 망코 2세의 야심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피사로의 지원을 업은 망코 2세는 쿠스코에서 요란한 대관식을 벌리며 황제가 되었고 소수인 스페인 병력의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나 황제가 된 것도 잠시 피사로가 예의 마각을 드러내 망코 2세를 감금하고 궁전을 약탈했다.

피사로는 황금으로 만든 황제들의 미라를 갖고 갔고 성소에 있던 황금접시와 황금 용기들,

신상(神像)들을 모두 녹여 금덩이로 만들었다.

잉카의 저항

망코 2세는 피사로에게 자유를 찾기 위해 협상을 제의했다.

그는 피사로에게 한 개당 200킬로그램이 넘는 죽은 황제와 황후들의 실물대 황금 조상들이 성스러운 계곡에 있는데

그 위치는 자신만이 알고 있다고 했다.

망코 2세는 자기와 자신의 추종자 3천명을 풀어주면 그 조상들을 갖고 오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피사로가 망코 2세의 꾀에 넘어갔다.

망코 2세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안데스의 수많은 협곡 중 하나로 들어가더니 사라졌다.

망코 2세는 재기의 칼을 갈고 수도였던 쿠스코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쿠스코를 공격했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의 저항은 완강했고 이 싸움에서 패한 망코 2세는 또 다시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스페인인들이 망코 2세를 찾아 그들이 머물던 요새를 완전히 파괴했다.

다행히 망코 2세는 스페인인들로부터 도망갈 수 있었고 새로운 요새 즉 그들의 새로운 수도 빌카밤바(성스러운 계곡)를 건설했다.

이것이 황금의 도시 빌카밤바라는 전설이 생겨난 이유이다.

망코 2세는 잉카인들을 동원하여 스페인에 대항했으나 1546년 갑자기 사망했고

아들인 티투 쿠시가 황제를 이었으나 11년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망코 2세의 또 다른 왕자 투파크 아마루가 황제가 되었다. 그가 잉카의 마지막 황제였다.

1572년 페루의 총독 프란시스코 데톨레도는 아마루가 은거하고 있던 빌카밤바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불탄 폐허뿐이었고 잉카인들은 모두 사라졌다.

아마루와 그의 마지막 추종자들은 이미 아마존의 깊은 밀림 속으로 도망간 뒤였다.

그러나 밀고자에 의해 아마루는 사로잡혔고 쇠사슬로 목이 묶인 채 쿠스코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처형되었다.

잉카제국이 영원히 멸망한 것이다.

황금 인간

엘도라도의 꿈, 즉 황금의 열풍은 스페인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아타왈파 황제를 살해하는 사건 때문에 더욱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타왈파 황제의 몸값으로 잉카 제국 전체에서 수집되어 이동 중이던 황금의 상당수가

스페인인들의 배신을 알고 되돌려져 어딘가에 숨겨졌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정복자들이나 황금광들에게는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뿐만 아니라 숨겨진 보물을 찾는다는 두 개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곧바로 수백 가지의 이야기가 뒤섞여 하나의 그럴듯한 전설이 탄생했다.

울창한 열대림을 지나 어딘가에 엄청난 재화가 그들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먼저 찾는 사람이 이 모든 재보의 주인이었다. 바야흐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엘도라도의 대탐험이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황금의 나라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피사로가 쿠스코를 점령하였을 때 태양의 신전 돌 벽에는 황금 덩어리들이 박혀 있었고

해, 달, 별의 제단들에는 황금이 두텁게 입혀져 있었다. 또 황금으로 만든 황제들의 황금 동상만도 18개나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엘도라도가 발견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많은 황금과 재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침략자들이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결국 잉카의 비극은 스페인 사람들이 잉카 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스페인인들에게 있어서 잉카 제국의 정복은 엄청난 황금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엘도라도 발견’이란 꿈을 이루기 전에는 어느 것도 정복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엘도라도의 마술에 걸린 케사다는 1536년 악전 고투 끝에 콜롬비아 보고타 고원에 살고 있는 무이스카(칩차족)족의 나라에 도착했다.

그 후 스페인에 엄청난 부를 갖다주는 소몬도코 에메랄드 광산을 발견하였고 소가모소라는 사원이 황금으로 입혀져 있는 것도 발견하였다.

그는 우선 소가모소 사원을 불태우고 황금을 모두 약탈하였다.

다음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원주민들이 어디에서 황금을 캐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케사다는 잉카 제국의 원주민들을 너무나 과소평가하였다.

원주민들이 황금을 약탈하려는 정복자들에게 비협조적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사다는 원주민들을 아무리 고문해도 금의 생산지를 알아낼 수 없었다.

다만 가까운 거리에 구아타비타라는 호수가 있는데 그곳에서 매년 황금인간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상한 의식이 있다고 했다.

인디언들은 그곳의 왕은 황금장식을 걸치고 온몸에 금가루를 뿌린 채 호수가에서 뗏목을 타고 나타난다고 했다.

장대한 의식이 진행되고 왕이 물 속으로 들어가 몸에 붙은 금가루를 씻어내면

승려와 귀족들도 값비싼 장식품들을 호수에 내던진다는 것이다.

케사다와 그 일행은 곧바로 이 호수를 찾으러 떠났고 마침내 해발 2천700미터에 있는 깊은 호수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곳 주위에는 인디언들의 촌락만 있었을 뿐 황금인간과 그의 신하들은 보이지 않았다.

금가루를 바르는 풍습

실제로 칩차 인디언은 1년에 한 번씩 왕의 몸에 금가루를 바르는 풍습이 있었다.

왕은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의식이 열리기 전까지 일정 기간을 정하여 여자를 멀리 하고

소금과 고추가 들어 있지 않은 음식만 먹는다.

그렇게 몸을 정결하게 한 다음 구아타비타 호수에서의 의식을 벌이기 전날 밤에

동굴을 나와 바쉬 여신에게 희생물을 바친다. 전설의 의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잉카인들이 숭배하는 바쉬 여신은 병적으로 질투심이 강한 왕자와 결혼하였는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자

그녀의 딸과 함께 구아타비타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그녀의 비극적인 자살 후에 바쉬는 여신으로 추앙되었다.

신관들이 바쉬 여신의 사당을 구아타비타 호수 옆에 건설하였고 새로 선출된 왕은 희생물을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의식이 열리는 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성스러운 밤을 지낸 후 새벽에 축제에 쓰이는 옷을 입고 호수가의 절벽 위에 모인다.

그동안 인디언들은 정성을 다하여 만든 각종 문양으로 치장된 갈대의 뗏목을 만든다.

그런 후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불며 여신을 부를 때 신관들이 도착한다.

모든 사람들이 머리에 깃털을 꼽았고 금으로 된 귀걸이와 장식물을 패용한다.

뗏목에 불이 켜지면 군중들이 향로를 피운다. 하루 종일 이들이 피운 향기가 호수를 채운다.

이때 추장이 옷을 벗고 기름을 바른 후 황금가루를 온몸에 바른다.

그는 금으로 된 커다란 가슴막이와 코걸이, 팔지 등 화력한 장신구로 치장한다.

그는 천천히 뗏목으로 인도되는데 그의 몸은 에메랄드와 금으로 온통 치장되어 있어서 걸음을 걷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뗏목의 상석에 앉으면 가장 중요한 부족장 네 명이 사방을 지킨다.

부족장 역시 머리에 깃털을 꽂고 금으로 만든 왕관과 팔찌, 목걸이 등을 하고 있다.

뗏목이 호수 중앙으로 떠날 때 음악이 울리며 노래를 부르고 호수의 중앙에 다다르면 깃발이 오른다.

 황금인간은 성스러운 의식을 뗏목 위에서 치른 후 그들이 갖고 온 물건들을 모두 물 속에 던지고 호수 물로 금가루를 씻어낸다.

절벽 위에 있던 군중들도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패물들을 호수 안으로 던진다.

그런 장중한 의식을 치룬 후에야 왕은 자신들의 국민 앞에 매년 새로운 힘을 가진 왕으로서 건재함을 보여준다.

호수를 발견한 케사다는 결국 호수 속에 있는 황금을 건질 수 있는 묘법이 없었으므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전설의 시작

엘도라도의 꿈은 또 다른 전설도 만들었다.

그것은 잉카의 마지막 황제가 엄청난 보물을 마지막 수도인 빌카밤마 어디엔가에 숨겨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잉카의 최후의 수도였던 빌카밤마가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스페인인에 사로잡힌 잉카인들은 빌카밤마가 어디인지 밝히지 않았다.

잉카의 수도가 어디였는지 두 부류의 사람들이 추적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고대 문명의 자취를 찾으려는 학자들이고 둘째는 잉카의 황금을 쫓는 탐험가들이다.

고고학자들의 탐사도 황금을 쫓는 탐험가와 다름없다는 설명도 있지만 이 부분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빌카밤마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빌카밤마는 잉카가 멸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났음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워낙 안데스 산맥이 험준하고 도로가 없기 때문에 정보 없이 사라진 도시를 찾는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768년 초케퀴라오가 잉카 제국의 마지막 수도인 빌카밤마란 소문이 퍼졌다.

초케퀴라오는 푸리마 항구에서 가까운 험준한 산속의 유적이다.

1909년 미국의 하이럼 빙엄이 아푸리마크 강 유역을 조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행정 책임자가 빙엄에게 ‘이 성채야 말로 잉카 제국 최후의 비밀 수도였으며 방대한 재보가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빙험은 위험을 무릅쓰고 밀림 속으로 들어갔고 드디어 초케퀴라오의 유적을 발견했다.

낭떠러지 위에 우뚝 솟은 궁전과 방형의 제의(祭儀) 광장, 약탈자들에게 짓밟힌 신전들이 있었다.

빙험은 처음에 초케퀴라오가 망코의 빌카밤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케퀴라오의 지형이 빌카밤바를 묘사한 자료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초케퀴라오는 빌카밤바가 아니었다.

빌카밤바의 발견에 실패한 빙험은 1911년 다시 페루를 찾은 후 탐험을 계속했다.

토착 인디언의 안내를 받은 빙험은 피사로를 피해 망코 2세가 탈출한 길을 더듬어 나갔고

 드디어 가파른 산허리에서 한 도시를 발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비탈에 납작 붙어서 아래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땅에 손가락을 찔러꽂은 뒤

미끄러운 풀을 밀어 헤치면서 몸을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아득한 낭떠러지 저 아래에서는 우리가 밧줄을 잡고 건너 온 우루밤바강의 성난 급류가 하얀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인디언 안내인이 이 근처에는 사냥감을 뒤에서 공격하는 페루드란스 독사가 많다고 신음하듯이 일러주었다.’

‘우리는 인적이 전혀 없는 숲 쪽으로 길을 잡았다. 갑자기 폐허가 된 집들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잉카 최고의 석조 기술로 지은 집들이었다. (중략) 정교하게 다듬은 마름돌들이 정확하게 맞물린 벽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빙험이 발견한 유적은 잉카의 초반기 수도인 ‘마추피추(늙은 봉우리란 뜻)’이다.

마추피추는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 시에서 우르밤바 강(아마존 강의 원류)을 따라

북서쪽으로 114킬로미터 내려 간 지점에 건설되었으며 해발 2천280미터이다.

총면적이 5제곱킬로미터로 도시 절반 가량이 경사면에 세워져 있는데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한쪽 면은 만년설로 덮여 있는 살칸타이(Salcantay) 산에 인접해 있어 지형이 매우 험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적 주위는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싸여 완전한 요새의 모양을 갖추고 있어

실제로 스페인 정복자들과 기독교도들의 침략과 파괴에서 벗어나 완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유적도 망코의 빌카밤바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추피추에서의 건물은 주로 신전이나 궁전, 관측소이며 잉카의 지배계급들이 거주하는 장소였다.

 1915년 빙험은 다시 마추피추를 찾았지만 마추피추가 빌카밤바가 아니라고 다시금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빙험이 마추피추를 빌카밤바로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기록에 의하면 빌카밤바가 스페인 군에게 점령되었는데

마추피추 성채는 외국 세력이 침입한 흔적이 없었다.

스페인인들은 약탈하기 전에 반드시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마추피추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마추피추는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쇠퇴한 상태였다.


참고문헌 :
『세계 불가사의 여행』, 이종호, 북카라반, 2008
「전설의 땅은 실제로 존재하였는가?」, 『뉴턴』 1995년 3월
『세계 역사의 미스터리(상)』, 양지에, 북공간, 2007

 

페루 마추피추 (3)

 

마추피추는 잉카인들의 이중성(상과 하, 우측과 좌측, 남성과 여성, 시간과 공간)이라는

믿음을 토대로 하는 절묘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다.

우선 마추피추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라는 원뿔 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의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 가지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마치 퓨마의 형상으로 보이며

좌측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마치 새(예 콘도르)가 날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성한 산으로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대지에 신성한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잉카인들이 신성한 도시의 모든 시설들을 어떤 형상을 표현하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날개를 활짝 펴서 날고 있는 새의 모습으로 와이나픽추에서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인간들은 무질서와 방탕에 빠지기 쉬우므로

태양이 다양한 색을 갖는 깃털의 새를 보내 영혼들을 위무해준다고 한다.

마추피추는 스페인에 정복된 이후 5세기 동안이나 정글 안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지붕을 제외하고는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그것은 울창한 수림과 뾰족한 봉우리들이 마추피추를 외부 세계와 격리시키고 있는 데다

신성한 계곡으로 불리며 우기에는 통과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지형이 험한 퐁고 보에니케의 골짜기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마추피추를 건설한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영국의 클레멘 마크햄(Clements Markham) 등 일부 학자들은

빠차우떽(Pachautec) 시대에 열대 밀림지대 야만인들의 꾸스코 공략을 저지하기 위해 마추피추라는 보루(堡壘)를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빙험도 초기에는 마추피추를 아마존 상류에 살고 있던 부족과 대치하는 전략적인 요새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마존 강 상류지역 야만인의 무기가 별것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그와 같은 보루를 건설하였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라고 수정했다.

반면에 태양신의 처녀들 즉 ‘아크야’를 위해 건설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높은 건축지식으로 건설

기원이 어떠하든 마추피추를 건설하는 데 사용된 돌들은 600미터 아래에 있는 깊은 골짜기로부터 채취한 것으로

운반도구도 제대로 없었던 잉카인들은 그야말로 악전고투하며 건설했음에 틀림없었다.

마추피추가 빙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래 차츰 비밀이 알려지고 있다.

우선 마추피추는 제례 의식의 중심지로 약 1천2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하며

테라스 형태의 농업 구역과 도시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계단식 밭에서는 옥수수와 감자뿐만 아니라 ‘안데스의 초록빛 황금’인 코카 잎도 재배했고 가축을 따로 길렀다.

200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유적지의 대부분은 가옥이나 저장고로 지형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화강암으로 건설했다.

출입문은 사다리꼴이고 지붕은 3천500미터 이상의 고산지에서만 자라는

이추(Ichu) 짚으로 만들어 덮었다(현재 복원된 건축물의 지붕도 이추로 덮었음).

정방형의 공동 마당을 가운데 두고 열 채씩 무리지어 지어진 2층집들은 좁은 도로나 다소 돋운 골목으로 연결되었다.

마추피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이다. 커다란 돌을 다듬는 솜씨가 상당히 정교하다.

각 변의 길이가 몇 미터나 되고 모양도 제각각인 돌들을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다.

특히 중요한 건물의 경우 돌의 표면을 젖은 모래에 비벼서 매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종이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연결되어 있다.

마추피추는 고지에 위치하므로 물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잉카인들은 식수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가 나오는 곳으로부터 돌을 이용하여 고랑을 만들었다.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유적 중의 하나이다.

공동 마당에는 커다란 맷돌, 부피가 큰 농기구, 연료로 사용하는 라마의 배설물 저장소가 있었다.

그리고 ‘추뇨(잉카인들의 주식으로 감자 말린 것)’를 만들기 위해 태양과 서리에 번갈아 노출되도록 감자를 널어놓았다.

말린 고기 등은 줄에 매어 집 바깥에 매달았다.

종교 건축물은 주 광장 둘레에 축조했다.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으며 반원형의 탑이 있는 태양 신전,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일명 제1신전, 그리고 ‘왕의 묘’가 그것이다.

왕의 묘는 잉카 최고의 신에게 헌정된 숭배의 장소로 추정하며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잉카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세 계단이 있는데 이는 지하(죽음), 지상(현생), 하늘(신)을 의미한다.

신전 주위로 왕의 궁전에는 식당은 물론 거실 등이 있으며 마추피추에서 유일하게 화장실이 있다.

마추피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천문관측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시설이다.

성 중앙의 ‘신성광장’에 거대한 해시계가 있는데 잉카인들은 그것을 이용해 매일 시간을 쟀던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하나의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는

해시계와 유사한데 동짓날(남반구에서는 여름) 하루 동안 사제들은 그곳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북쪽의 주의자와 남쪽의 보조의자가 그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인들은 인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

달의 신전은 유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 중턱에 위치한다.

천연 동굴을 이용해 다섯 군데의 벽감을 만들고 부조를 장식했으며

신전 안에는 거대한 바위의 가운데를 파서 만든 옥좌가 있지만 전설적인 황금은 나오지 않았다.

빙험은 제단 구역에서 많은 인골이 발견하였는데 그들 대다수는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선택된 여자들이었다.

발견된 175구의 미라 중 80퍼센트가 여자였으며, 그 중 나머지 20퍼센트는 사제와 아이들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잉카 제국을 상징하는 도자기, 금속, 섬유 등을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추피추가 어떤 정책적인 결단(군사 전략적 측면, 실용성 미비)에 의해 포기되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하부에서 수많은 도자기 파편을 발견했는데

이는 희생 또는 제사의 의식 중에 도자기를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했다.

공중도시에서 철수

학자들은 대체로 태양신의 후예로 숭배 받은 잉카제국의 아홉 번째 통치자로 ‘세상의 개혁자’로 불리는

파차쿠텍(재위 1438∼1471년)이 마추픽추를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을 근거로 망코 카팍이 세운 잉카 최초의 수도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망코 카팍이 “내가 태어난 곳에 새 개의 창이 있는 석조 벽을 세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또한 빙험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잉카 이전의 유물도 상당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잉카인인 네 명의 남자와 네 명의 여자는 ’파타리탐보‘라는 동굴에서 나타났으며

네 명의 남자 가운데 한 명이 망코 카팍이다.

학자들을 가장 혼동스럽게 만드는 것은

잉카인들이 갑자기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아무런 미련도 없이 또한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페인 정복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보면 당시 침략자들은 마추피추에 도착하지 못했다.

즉 마추피추인들은 1553년 스페인인들이 잉카 제국을 정복하기 전에 이미 아름다운 공중 도시를 떠났다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마추피추의 운명에 대해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잉카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승자가 패자들을 모두 몰살시키곤 했다.

잉카의 황제 와이나 카파크가 카란케 족을 물리쳤을 때 생존자 전원을 처형했다.

마추피추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사제가 신성한 아크랴(태양의 처녀) 한 사람을 범했을지 모른다는 추정이다.

제니퍼 웨스티우드는 스페인인과 잉카 여왕 사이에 난 가르시라소 데 라 베거의 기록에

아크랴를 범한 자의 비극이 상세하게 적혀있다고 말했다.

“아크랴를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해짐은 물론 그의 신하, 친척, 이웃에서부터 그가 사는 마을의 주민과 가축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마을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 장소를 찾아낼 수 없었다.”

세 번째 가능성은 하늘의 뜻이다.

현대인들은 하늘의 뜻으로 공중 도시를 철수했다는 것에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당대의 잉카인들의 생각으로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그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마지막 가능성은 전염병이다. 1940년대에 말라리아가 이 지역을 덮치자 인구가 급감했다.

빙험이 발견한 여자의 두개골에서 매독의 징후가 있었는데 전염병이 이 여자에게만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을에 무서운 전염병이 번지자 통치자가 과감히 파기명령을 내렸을 가능성도 있다.

마추피추는 손상이 없이 방치되었기 때문에 더욱 소문이 무성했으나

여하튼 빌카밤바가 아니므로 빌카밤바에 대한 학자들의 탐사는 계속되었다.

아직도 마추피추가 황금의 도시 ‘빌카밤바’이지만 도굴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종교의식과 천문관측을 위해 사용된 종교 중심지, 나아가 아마존과 잉카를 연결한 물류와 교역 중심지

또는 당시 잉카 왕의 여름 별장이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마추피추가 아마존 상류에 살고 있던 부족과 대치하는 전략적인 요새의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신성한 계곡의 입구

마추피추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잉카의 수도였던 꾸스코(해발 3360미터)에서

우르밤바를 거쳐 오란다이탐보(Ollantaytambo)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

오란다이는 파차 쿠텍 왕 시대의 장군으로 왕의 딸과 사랑에 빠져 오란다이탐보로 피신한다.

화가 난 파차 쿠텍이 수 차례에 걸쳐 오란다이 장군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격퇴되었고 결국 사랑을 승인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은 마추피추로 들어가는 길목인 신성한 계곡의 입구이기도 하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이므로 군대가 주둔했다.

그러므로 오란다이탐보에는 군인들이 주둔했던 숙소, 종교시설은 물론 창고와 편의 시설이 있는데

외형적으로는 마추피추와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다.
 
기찻길 옆으로 우루밤바 강이 흐르는데 이 강이 아마존 강의 원류이다.

기차에서 내리면 마추피추까지 수시로 버스가 운행하며 마추피추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당초 기대한 황금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탐험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빙험의 표지석이 있다.

1911년 빙엄이 왕궁과 신전 따위를 발견한 후 1956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발굴과 복원이 1974년에 끝나

마추피추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고대 유적 관광지가 되었고 2007년 ‘신세계 7대 걸작품’ 중에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마추피추는 매일 밀려드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자연붕괴’가 아니라 ‘파괴’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자 유네스코는 페루 당국에 마추피추는 물론이고,

쿠스코를 출발해 걸어서 아프리막 계곡을 거쳐 마추피추에 이르는 이른바 ‘잉카 트레일’ 관광코스의 관광객 수를

대폭 통제하는 등 세계적인 유적지의 관리에 신중을 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더구나 재난도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1970년대 유적지 내 헬기 착륙 허용으로 일부 손상을 입었으며

1997년 마추피추 유적지 인근 숲속에서 발생한 화재로 파손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인근 지역에서 생겨난 불길이 거세지면서 마추피추를 위협했는데 다행히 구조대원 수백 명이 출동해 불길을 잡았다.

2000년에는 맥주 광고 선전을 촬영하던 중 마추피추 최고점에 있는 돌로 만든 해시계

즉 천문대 역할을 한 인티와타나(Intihuatana)가 일부 깨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2001년 일본 교토(京都)대학 방재연구소도 마추피추 유적지의 뒤쪽 경사면이 한 달에 1센티미터씩

아래 계곡으로 흘러내리고 있어 언제 붕괴할지 모를 정도로 지반이 취약한 상태라고 경고한 바 있다.

마추피추는 두 개의 산 능선 사이, 더 높은 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퇴적토양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물을 얻기 쉽고 곡식을 경작할 수 있지만 지반은 취약하다.

물론 페루 정부는 현재의 관광객 정도는 마추피추 유적지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면서도

유네스코의 우려에 대한 답변으로 관련 기관들을 통해 실태 조사를 실시하고

근간 산사태 예방 위성통제 시스템 등을 갖추고 하루 입장 관광객 숫자도 통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보존대책은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마추피추 인근 주민들은 관광객 숫자를 제한할 경우 수입 감소로 생계에 큰 타격을 받는다며

정부의 보존 대책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문화재 보존이 먼저냐 생존이 먼저냐는 문제는

마추피추에서도 일어나고 있지만 사태가 악화되면 인간의 접촉이 거부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빌카밤바를 찾아서

마추피추는 손상이 없이 방치되었기 때문에 더욱 소문이 무성했으나

여하튼 빌카밤바가 아니므로 빌카밤바에 대한 학자들의 탐사는 계속되었다.

마추피추가 빌카밤바가 아니라면 망코 2세의 보물은 어딘가에 아직도 있다는 설명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도 페루 각지에서 빌카밤바를 찾으려는 탐험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이다.

1964년 미국인 진 새보이가 계속했다. 새보이는 빙험이 에스피리투팜파에서 발견한 폐허를 빌카밤바로 추정했다.

새보이가 이 지역을 빌카밤바로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잉카의 양식대로 석재들이 배열되었고 쿠스코에서 발견된 것과 흡사한 목욕장이 있다.

둘째 대형 건축물의 벽이 ‘빨간 도자기와 같은 치장 회반죽 또는 테라코타’로 덮여 있었고

유럽식으로 만들어진 기와용 타일이 상당히 발굴되었다.

이는 당시까지 아메리카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양식으로 약탈에 참가한

스페인인들이 일시적으로 거주하면서 건설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정복자 콩키스타도레스들이 쓰던 것과 똑같은 말 편자도 발견되었다.

그의 발견은 스페인의 수사(修士) 마르틴 데 모루아의 보고와 맞아떨어진다.

“망코는 지붕을 타일로 덮은 2층 건물을 빌카밤바에 짓도록 했다.

이 저택은 향기 높은 향나무로 문을 만들었으며 갖가지 그림으로 장식했다.”

새보이는 오두막에서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옥수수를 발견했고

금으로 독수리를 수놓은 망토, 청동연장, 도자기 등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새보이의 주장에 의문을 표시하고 또 다른 유적에 주목했다.

아툰 빌카밤바라고 불리는 유적은 3제곱킬로미터가 조금 넘는데 도시의 입구에 커다란 하나의 돌이 세워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이 돌이 잉카의 전통인 사다리꼴이 아니라 반달형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이 유적이 스페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며

특히 유적의 이름이 아툰 빌카밤바인 것을 볼 때 진정한 빌카밤바일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란파하텐이라는 유적지도 빌카밤바의 대상지이다.

이 도시는 해발 3천 미터쯤 되는 초생달 모양의 벼랑 위에 있는데 건축물들이 모두 원형이었다.

항공 탐사에 의해 그란파하텐에는 수많은 유적들이 있고 도로의 너비가 24미터나 되었다.

이곳은 망코가 차차포야 족과 연맹을 맺으려고 한 길목에 있으므로 빌키밤바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2001년 내셔널지오그래픽 팀은 잉카인들의 정착지인 코리와이라치나를 발견했다.

케추아어로 ‘바람으로 금을 제련하는 곳’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마을은 빌카밤바 산맥 남부에 있다.

이곳에서 원형주거지, 농작물 창고, 도로, 장례탑, 묘지, 의례용 제단 등 200개가 넘는 건축물의 잔재가 남아 있다.

이들 규모로 볼 때 잉카의 왕족들이 1537년 스페인을 상대로 완강한 투쟁을 벌리기 위해 빌카밤바 지역으로 후퇴했는데

이곳이 망코와 그 아들들의 추종자들이 피신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추정이다.

그것은 이곳이 초케퀴라오에서 2일 밖에 걸리지 않는 데다가 잉카족이 건설한 것이 틀림없는 광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4년에 이곳을 발굴하자 수많은 잉카 장식 토기들이 발굴되었지만

수십 채의 원형 건물터는 전형적인 잉카 건축물이 아니었다. 또한 지하 석관묘들도 잉카의 것이 아니었다.

학자들은 이들 유적이 잉카족에게 정복 당한 코야족의 양식으로 추정한다.

학자들에 따라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초케퀴라오, 마추피추, 아툰 빌카밤바, 그란파하텐,

 코리와이라치나 중에서 어느 것이 빌카밤바일 가능성은 아직도 가능하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신중하다.

아직도 조사하지 않은 유적이 수없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들이 발견되면 신비의 잉카 제국에 대한 진상은 더욱 진실로 나타날 것이다.

참고적으로 유럽의 발전이 얼마나 신대륙의 황금으로 이루어졌는가는

컬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전인 1492년도의 유럽이 갖고 있는 총 금 보유량은 90톤이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약탈한 지 100년 후 유럽의 금 보유량은 무려 8배가 되었다. 

참고문헌 :
『잉카, 태양신의 후예들』, 카르망 베르낭, 시공사. 1996
『우리가 처음은 아니다』, 앤드류 토머스, 현대과학신서, 1988
『세상을 바꾼 건축』, 클라우스 라이홀트 외, 예담, 2006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 생각의나무, 2006
『불가사의 세계문화유산의 비밀』, 허용선, 예림당, 2005
『페루』, 심국웅, 송산출판사, 2001
「위기의 ‘마추 픽추’ 진퇴양난」, 남태우, 부산일보, 2005.5.14
「라틴아메리카의 ‘속살’」, 김영섭, 위클리 조선, 2004.3.10
「남미 빌카밤바 세계3대장수촌 신비를 벗긴다」, 유인경, 경향신문, 1993.02.01
「세계의 불가사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질리안 옹, 모닝캄, 2007.7월호
「신비에 싸인 잉카의 마지막 전초지 발카밤바」, 피터 프로스트, 내셔널지오그래픽, 2004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