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03-11에 베스비오 화산이 폭발했을 당시
베스비오 화산의 흔적
타락한 도시의 신의 벌이라고 불리는 폼페이의 최후는 AD79년 8월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가 멸망하는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여서 약2천여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로마의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광장과 대규모의 호화러운 건물과,극장,상가,
그리고 당시의 최고설비를 자랑하던 스타비안 목욕탕이 화산재에 묻히고 말았다.
화산 폭발후 조사차 이곳을 방문한 학자 플리니우스도 사고로 목숨을 잃엇으며
피해상황이 하도 엄청나서 로마는 폼페이의 발굴및 재건에 손도 못댔고 일확 천금을 노리는 도굴꾼만 득실대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벽화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생각보다는 보관하는 것이 허술하다.
폼페이 최후의 날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현한 광경
유적지 안에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살다간 건물 속에는 사람이 살다간 흔적만이 남지만 사람 형상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화산재 아래에 묻힌 사람의 시신은 썩어 없어졌지만 사람이 있던 공간은 화산재 속의 빈 공간이 되었고,
후세의 사람들은 이 빈 공간에 석고를 부었다.
당시 죽어간 사람의 형상은 석고를 통해 놀랍도록 생생하게 캐스트(cast)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당시 죽어간 그 사람이 바로 내 눈앞에 있다
그 당시에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2007년 이탈리아 만토바 근처 발다로 유적지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포옹한 두 남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과학자들은 "발다로의 연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유골을 주변 흙까지 통째로 들어내는
방식으로 박물관에 보존해 함께 할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벡신스키 작품에는 제목이 없고 제작연도와 일련번호만 있다.
죽음의 순간까지 포옹을 놓지 않는 연인,
욕망의 도시 폼페이가 몰락하는 그 순간의 포옹이라는 독자들의 상상력이
흔히 이 작품을 '폼페이 화산의 화석'으로 오해한다.
폼페이 발굴비화
1709년 이탈리아 중부 서해안에 자리잡은 베수비오스산 서쪽의 레지나 마을.
수도원 뜰에서 우물을 파던 일꾼이 문득 무엇인가를 주워들었다.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이었다.그는 몇번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1738년 4월 따뜻한 봄날.한 농부가 베수비오스산 기슭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난데없이 괭이 끝에서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흙을 파헤치니 꽤 긴 쇠붙이가 나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토목기사들은 그것이 아주 먼 옛날에 쓰인 수도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그 땅 밑에는 옛 도시가 묻혀 있다는 말인가.
나폴리 국왕 샤를르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네는 옛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인 알쿠비에르를 시켜 베수비오스 산 기슭을 파헤쳤다.
알쿠비에르는 폭약을 써서 15m 두께 바위를 뚫는 데 성공했다.
이 발굴에서 그들은 청동 조각품 몇개를 찾아냈고,12월11일에는 ‘헤르쿨레늄 극장’이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했다.
그들은 베수비오스 화산이 터졌을 때 용암에 파묻힌 1700년 전 로마 제국의 도시 헤르쿨레늄을 찾아냈던 것이다.
1748년 4월1일,샤를르 왕의 명령을 받은 알쿠비에르는 베수비오스산 기슭의 또 다른 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엿새째인 4월6일 이상한 돌기둥들이 나왔다.거기에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었다.
더 깊이 파들어 가자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돌벽이 나왔다.
4월19일,청동제 조각들과 대리석 조각들이 쏟아져 나오던 끝에 처음으로 사람의 주검이 발굴되었다.
금화를 잔뜩 움켜쥔 남자가 석고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나폴리 왕국은 이 사건으로 떠들썩해졌고,출토된 유물들은 빠짐없이 국왕에게 바쳐졌다.
얼마 뒤 원형 극장을 발굴한 알쿠비에르는 기대했던 보물이 나오지 않자 발굴을 그만두고 말았다.
1754년이 되자 이름 모를 지하 도시에 대한 발굴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지하 도시가 어느 시대 어느 도시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더구나 샤를르 왕은 옛 문화나 미술품에 대해 흥미가 없었으므로,
그저 ‘보물 찾기’에 빠져 이곳저곳 옮겨 가며 파헤치기만 했다.
1755년 6월 어느 날 독일의 뛰어난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이 자기 집 서재에서 옛 로마시대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소(小) 프리니우스 편지집’을 읽어 내려가던 빙켈만의 손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 나폴리 국왕이 오래 전부터 파헤치고 있는 곳이 바로 로마시대 폼페이로구나!’
베수비오 산기슭에 묻힌 지하 도시가 폼페이란? 사실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빙켈만은 몇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거기에는 화산이 터졌을 때 소 프리니우스가 아버지인 대(大) 프리니우스를 따라
폼페이 시민들을 구하러 간 일을 상세히 적은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는 그 끔찍했던 날의 폼페이 모습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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