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Mongol(2012.Aug)

칭기스칸 군대

봉들레르 2012. 10. 13. 12:27

1995년 12월 31일,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00년의 마감을 선언하면서

그 기간 중 최고의 인물로 칭기즈칸을 꼽았다. 또한 1997년 4월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세계를 움직인 가장 역사적인 인물’ 중 첫째 자리도 칭기즈칸의 몫이었다.

그는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정복한 몽골제국의 창시자다. 그가 1219년에 시작한

호라즘 정벌은 1225년 몽골 고향으로 귀환할 때까지 햇수로는 7년, 그리고 실제 전쟁기간은 6년이 걸렸다.

이 중 1220년 4월 11일 일어난 부하라 전투는 적의 허를 찌른 기습전이었다.

이 전투는 몽골군이 처음으로 서구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전투였다.

이 전투는 13세기 무슬림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영하 50도의 산맥을 넘은 몽골군

몽골보다 12년 정도 앞선 신생제국 호라즘은 당시 실크로드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동쪽에서 가장 큰 세력이던 금나라를 1216년 굴복시켰다. 이후 그는 서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1218년, 그는 호라즘 왕국의 샤 무하마드 2세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중국과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의 통행을 재개하자는 것이었다. 무하마드 2세는 기꺼이 조약에 서명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몽골 상인들이 호라즘의 북동쪽에 있던 오트라르라는 도시에 도착해

물건을 구입하기 시작했는데 그곳 총독이 몽골 상인들을 스파이로 몰아 전부 살해했던 것이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칭기즈칸은 무하마드 2세에게 정식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고

책임자 처벌과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그런데 무하마드 2세는 사절단의 몇 명을 죽이고 몇 명은 얼굴을 흉측하게 망가뜨려 돌려보냈다.

1219년 마침내 칭기즈칸은 호라즘 정벌을 위해 15만 명의 병력을 모았다.

무하마드 2세는 칭기즈칸의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무하마드 2세는 40만 명의 정예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영토에서 싸운다는 이점도 있었다. 호라즘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과

몽골군의 예상 침입 경로 사이에는 사람들이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혹독한 조건의 키질쿰(Kyzylkum) 사막과

남북을 가로질러 흐르는 시르다리야 강이 놓여 있기 때문에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칭기즈칸을 들판에서 풀이나 뜯는 야만인으로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몽골군을 4개 부대로 나눈 후 주요 부대를 아들들에게 맡겼다. 우군은 장남인 주치가 지휘하고,

좌군은 2남인 차가타이와 3남인 오고타이가, 중군은 칭기즈칸 자신과 4남인 툴루이가, 별동대는 체베가 이끌었다.

칭기즈칸은 두 방향으로 부대를 나누어 호라즘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 부대는 호라즘의 북부지역을 향하는 아쿰 사막과 알라타우 산맥 사이의 황폐한 골짜기를 지나는 길로 보냈다.

 

 

 

다른 부대는 위구르 관문을 지나 투르키스탄 북쪽의 천산 산맥을 넘어갔다.

영하 50도를 내려가는 천산 산맥 추위는 매서웠다.

무하마드 2세는 상대가 겨울에 그 산맥과 사막을 넘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몽골군이 나타난 것이다. 1220년 몽골군대는 오트라르에 도착했고 도시의 성채를 바라보며 병력을 포진했다.

장장 5개월 동안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성 안의 사람들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다.

결국 이들은 몽골군에 항복했다. 그리고 곧바로 칭기즈칸은 키질쿰 사막을 넘어 부하라로 향했다.

키질쿰 사막은 무하마드 2세가 믿고 있었던 최후의 자연방벽이었다.

사실상 칭기즈칸 이전에는 키질쿰뿐만 아니라 대체로 큰 규모의 사막을 횡단해 정복전쟁에 성공한 군대가 없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죽음의 키질쿰 사막을 횡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 놀라운 횡단은 역사가들에 의해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것과 같은 충격으로 기록되고 있다.

무하마드 2세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4월 초에 들어서였고,

그때 이미 칭기즈칸은 남쪽 사막 끝에 나타나 누루타를 함락시키고 부하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달린 것이다.

칭기즈칸은 부하라의 성문 한쪽의 포위를 풀어 주둔군을 성밖으로 나오도록 유인했다.

결국 이 유인작전은 성공했고 4월 11일에 부하라는 함락되었다.

이로써 불과 한 달 반 만에 수적으로 열세인 몽골군이 30만에 달하는 적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여세를 몰아 칭기즈칸은 끝까지 상대를 추격해 호라즘의 마지막 요새 사마르칸트에 있는

11만의 투르크와 타직 병사들을 섬멸했다. 사마르칸트를 탈출한 무하마드 2세는

칭기즈칸의 추격대에 의해 정신 없이 쫓기다가 카스피해의 작은 섬 아베스쿤에서

누더기 옷을 입고 굶주림 속에서 죽고 말았다.

 

대세판단은 승리의 핵심 요소

 


 

손자병법 모공(謀攻) 제3편에 보면 ‘승리를 미리 알 수 있는 다섯 가지(知勝有五)’가 나온다.

전쟁뿐 아니라 정치 전략, 비즈니스 전략 등 전쟁과 같은 경쟁 현장에서도 응용이 가능한 내용이다.

 

첫째, 싸울 수 있는 상대인지 싸우면 안 되는 상대인지를 알아야 승리한다(知可以與戰不可以與戰者勝).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내가 출사표를 던질 만한가를 가늠하는 대세(大勢)판단을 말한다.

여기에서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결과를 얻는다. 자신의 능력과 경쟁자의 역량,

나아가 시대의 흐름까지 정확히 꿰뚫어보는 대세판단은 리더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같다.

둘째, 많은 병력과 적은 병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으면 승리한다(識衆寡之用者勝).

이 말은 병력의 수에 따라 그에 적절하게 작전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소수 병력은 잘 운용하는데 조금만 숫자가 많아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리더십의 한계를 보여주곤 한다.

칭기즈칸은 병력 운용의 묘를 천재적으로 발휘했다.


그는 1206년 황제로 즉위한 후 몽골군을 십진법(十進法)에 따라 새롭게 편성했다.

십호(十戶)를 담당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십호장으로, 백호를 담당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백호장으로,

천호를 담당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천호장으로 세웠다. 병력 운용 능력에 맞도록 각자의 직책을 맡긴 것이다.

이렇게 리더도 그릇이 있는 법이다. 마을의 이장감이 있고, 도시의 시장감이 있고,

나라를 영도하는 대통령감이 있다는 말이다. 한낱 이장감이 어쩌다가 대통령이 되면

그 자신은 물론 나라를 망쳐 먹는 일이 생긴다.

셋째, 위와 아래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같으면 승리한다(上下同欲者勝).

어떤 전쟁에서도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같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칭기즈칸의 사준사구(四駿四狗)는 잘 알려져 있다. 네 명의 준마와 네 명의 충견을 뜻하는 말로,

칭기즈칸을 도와 몽골제국을 세운 8명의 장수를 칭하는 말이다.

칭기즈칸이 천년의 인물로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이같이 자신과 생사를 함께할 수 있는

충직한 측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넷째, 잘 준비하여 싸움에 대비하지 않은 적을 기다리면 승리한다(以虞待不虞者勝).

준비하는 자를 이길 방도는 없다. 칭기즈칸은 그의 삶 자체가 한 곳에 정착하여 안일한 삶을 누리지 않았다.

수시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정복과 전쟁을 위한 삶이었다.

아울러 고도의 전쟁기술과 투지로 다져진 사람이었다.

다섯째, 장수가 유능하며 군주가 간섭하지 않으면 승리한다(將能而君不御者勝).

칭기즈칸 리더십의 특징은 믿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스타일이다. 믿기까지의 과정이 어렵지

신뢰가 검증되면 곧바로 전권을 위임한다. 그래서 예하 장수들은 마음껏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손자는 다섯 가지 요소로 승리를 예측했다. 몽골과 호라즘의 두 부대를 이에 비춰보면

무하마드 2세가 단 하나의 요소에서도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싸울 상대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첫째의 대세판단에서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렀다.

 

징기스칸은 일찍 몽골 각 지역을 통일하고 서하를 침략했으며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고

서쪽으로 요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중아시아에까지 침입하여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탄 명실공한 몽골대제국을 세웠다.

이것이 제1차 서정(1219~1225)으로 칭기즈칸이 직접 이끈 중앙아시아 원정으로서 '칭기즈칸 서정'이라고 한다

1226년에 징기스칸은 다시금 서하로 출정하여 그 이듬해에 서하를 멸망시켰다가 령주(오늘의 녕하 령무현)에 설치한

군영에서 65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제2차 서정(1235~1244)은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차남인 바투의 통솔하에 50만 대군이 투입된 유럽 원정으로서

 '바투 서정'이라고 한다. 맏아들을 출정시키면 '인마(人馬)가 늘어나고 위세가 높아진다'는

칭기즈칸의 차남 차가타이의 제언에 따라 4남의 장자들뿐만 아니라 기타 제후와 부마들의 장자들까지도 동참한다.

그래서 이 서정을 '장자 서정'이라고도 한다. 서정군은 3년도 채 안 되어 모스크바 공국을 비롯한 러시아 주요 지역을 점령한다.

세 갈래로 나뉜 서정군은 각각 오늘의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를 공략하고 오스트리아를 지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까지 진출, 유럽의 심장부에 이른다. 우구데이 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하는 길에

바투는 볼가강 하류 일원에 킵차크 칸국을 세웠다.

제3차 서정(1253~1260)은 칭기즈칸의 4남 톨루이의 차남인 홀레구의 지휘하에 진행된

서아시아 정벌로서 '홀레구 서정'이라고 한다. 서정군은 카스피해 남부에 있는 이란 지역을 평정한 다음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메카와 예루살렘에 이어 다마스쿠스를 점령한다.

형 몽케 칸이 송과의 전장에서 진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하다가 이란을 중심으로 한 일원에 일 칸국을 건국했다.

이것이 인류역사상 3대 군사원정의 하나로 꼽히는 몽골의 서정이다. 몽골의 서정하면 우선 떠오르는 의문이

수적으로도 얼마 되지 않은 '후진' 유목민이 어떻게 그 방대한 영토 위에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선진' 정착 농경민사회를 공략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인구로 보면, 칭기즈칸이 1206년 몽골제국을 선포할 당시

천호를 단위로 한 집단이 약 95개였다고 하니 인구수는 어림잡아 50만명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몽골제국이 합쳐서 인구 1억명을 가진 금나라나 송나라를 제압했으니,

그 즈음 몽골 인구가 배(100만명)로 늘어났다고 가정하더라도 1 대 100의 비율이 되는 셈이다.

정말 인구로 말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등하지만 1 당 100의 기세로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대적했던 것이다.

중국 내몽골자치구에는 "칭키스칸릉"이 있는데 이 릉은 "아우바오"(몽골인이 선인에게 제를 지내는 장소)와 유사하다.

하지만 이 곳은 칭키스칸이 실제 매장된 곳이 아니다.

몽골 기마병을 거느리고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휩쓸었던 몽골제국의 황제 징기스칸이

구경 어디에 묻혔는지는 수백년래 고고학 사상의 하나의 큰 비밀이었다.

몽골족의 풍습에 따르면 원나라 제왕의 묘지는 모두 "밀장"의 형식을 취하므로

지금까지 원나라 황족의 릉묘는 하나도 발견된 것이 없다.

몽골의 한 역사전문가는 징기스칸의 릉묘에는 가능하게 대량의 진귀한 보물이 매장되어 있으며

 매장된 공예품은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보다 더욱 장관적일 것이라 예측했다.

 수하 장령들은 그의 유서에 따라 비밀리에 시신을 안장한 뒤 만여필의 말을 출동해 그 위에서 달리게 함으로써

묘지를 평지로 만들었으며 나무를 심어 림지를 만들었다.

징기스칸을 안장한 뒤 안장을 책임진 장령은 8백명의 병사에게 명을 내려 안장에 동원된 천여명의 노동자를 전부 살해하고

이어 8백명의 병사들도 비밀리에 처형했으니 릉묘의 일대 비밀도 무덤에 묻혀버리게 된 것이다.

징기스칸의 신비한 릉묘는 오래전부터 세계 고고학계의 깊은 주목을 받았으며 일찍 3년전에

미국의 한 고고학팀이 선손을 썼으나 결국 울란바따르 동북의 300여 킬로미터 되는 곳에서

흉노인의 무덤 몇개를 발견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미국과 몽골 합작 탐험대는 최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동쪽으로 300㎞ 떨어진 몽골 동부의 광활한 평원,

3㎞ 길이의 타원형 성벽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 13세기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 무덤을 발굴했다

꽁꽁 얼어 있는 이 지역이 녹은 그 이듬해인 2002년 4월, 이 고고학팀은 다시금 울란바따르 동북의 322킬로미터 되는 곳에서

징기스칸 묘지로 추정되는 묘지를 발견했지만 몽골정부와 민간의 항의로 발굴을 포기하고 말았다.

몽골의 전통관념에 따르면 땅을 파헤치는 것은 액운을 가져오며 또한 선조의 무덤을 건드리면

그의 영혼을 훼멸한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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