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Laos(2013.Feb.)

라오스 비엔티엔(Vientiane)

봉들레르 2012. 10. 12. 22:42

라오스  비엔티엔(Vientiane)

 

라오스 불교 중심지, 에메랄드 불상 귀환 염원

   
▲ 파 탓 루앙(Pha That Luaung)은 라오스 불교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라오스의 첫 번째 왕국 란 창은 루앙프라방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에 못지않게 남쪽에 위치한 비엔티엔도 수도에 버금가는 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다.

불교중흥의 왕으로 불리는 포티사랏 왕(Phothisarat, 1520~1547)은 비엔티엔에도 왕궁을 짓고 그곳에 머물며 정치를 하였는데, 이는 주변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티사랏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세타티랏 왕(Sethathiart, 1547~1571)은 1563년에 왕국의 수도를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엔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비엔티엔은 변방도시에서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즈음 비엔티엔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보물로 여기는 에메랄드 불상(Pro Keo)을 이운, 안치하면서 라오스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1566년 세타티랏 왕은 비엔티엔이 세계 불교의 중심임을 알리는 높이 45m의 거대 불탑을 건설한다. 이 불탑이 현재까지 라오스불교의 상징이면서 초기 라오스불교문화를 대표하는 황금색 대탑 파 탓 루앙(Pha That Luaung, 위대한 불탑)이다.

이 불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머리카락과 갈비뼈)가 봉안돼 있어 가장 존귀한 불탑으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신비한 에메랄드 불상 덕분에 왕국의 여러 종족들을 규합, 더욱 강력한 불교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수도였던 비엔티엔에는 80여개가 넘는 거대 불교사원들이 건립되었는데, 이때 조성된 불교유적들은 루앙프라방 시대와는 다른 양식과 형태로 조성되었다. 루앙프라방의 사원들이 작지만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로 장엄하였다면, 비엔티엔 사원들의 조각은 더욱 섬세하고 규모 또한 커졌다. 또 극히 일부에서만 사용되던 벽돌을 이용해 세운 불탑의 외부를 금으로 덧칠하고, 그 주변에 회랑을 만들어 더욱 장엄하게 조성하였다.
   
▲ 비엔티엔에서 가장 오래된 왓 시사켓(Wat Si Saket)은 라오스 불교건축의 백미로 손꼽힌다. 태국에 의해 비엔티엔이 두 번이나 불바다가 됐지만 사원은 보존되었다.


그리고 탑을 중심으로 네 방향에 각각 큰 규모의 목조사원을 건립, 목조각 또한 화려하게 새겼다. 불교사원들은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면서 강력한 왕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역할을 하였다.

발전을 거듭하던 비엔티엔은 왕위계승문제로 루앙프라방과 참파삭(Champasak)으로 분리되면서 발생한 세력 간 대립으로 인해 급격하게 쇠락하게 된다. 이러한 세력의 약화는 주변국의 침입을 불러왔고, 그에 따라 불교사원에 보관돼 있던 유물들이 약탈되고 파괴당했다.

이후 비엔티엔이 부활한 때는 왕국이 분열된 지 한 세기가 지난 뒤에 등장한 아노우 왕(Anou, 1804~ 1827)이 즉위하면서부터다. 아노우 왕은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주변세력을 통합해 나가면서 잃어버렸던 영토와 자존심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주변국의 침입으로 소실된 불교사원을 복원했다. 현재 비엔티엔에서 가장 오래된 왓 시사켓(Wat Si Saket)도 이때 건설되었다. 1819년부터 1824년에 건설된 왓 시사켓은 비엔티엔 후기 불교문화의 정수로 꼽힌다.

또한 이때 태국의 침공으로 약탈되었던 프라방(Pra Bang) 불상과 에메랄드 불상을 되찾아와 안치하면서 다시금 비엔티엔은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주변국에서 수많은 승려들이 방문하는 순례지가 되었다.

그러나 비엔티엔의 영화는 여기까지였다. 재차 침입한 태국은 라오스 왕국의 상징이던 두 불상을 다시 약탈하여 가져갔고, 수도를 완전히 불태워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비엔티엔이 불바다로 변해 도시로서의 존재마저 잃어 버렸지만, 수많은 목조사원들은 목숨을 걸고 지킨 라오스 승려와 불교신자들의 노력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프라방 불상은 루앙프라방을 떠난지 140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에메랄드 불상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아직도 방콕의 에메랄드 사원에 안치되어 그곳의 보물로 자리하게 되었다. 아직도 에메랄드 불상이 안치되었던 호 파케오(Ho Phako)사원에는 에메랄드 불상이 돌아와 안치 될 수 있도록 바라는 염원을 담은 수많은 불상들이 전시돼 있다.

비록 라오스의 자존심과도 같은 에메랄드불상은 없지만, 아직도 비엔티엔은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하면서 오늘도 사원의 독경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다.

 

비엔티엔은 메콩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라오스의 수도이자 이 나라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 다른 지역에 비해 바쁘고, 요란스럽다.

여행자들을 사로잡는 이 도시만의 매력은 유럽과 아시아를 한곳에 조화시켜 놓은 독특한 분위기이다.

여러 문화의 융합지로서 그 분위기를 잘 호소하고 있다. 나무가 늘어선 가로수길과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거주지

그리고 각종 불교사원들은 중앙 비엔티엔의 풍경을 압도하며, 독특한 그들만의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인구 약 49만명의 비엔티엔은 약 80개에 달하는 고대 불교사원이 있었으나 씨암(태국)의 침공으로 현재는 20개의 사원밖에 없다.

그 규모를 자랑하는 아침시장의 북쪽에 거대한 독립기념탑(충령탑)이 있다.

그 동북쪽 약1km 지점에 금으로 제작된 스트파탑이 유명한 탓 루앙(That Luang) 사원이 있다.

사원안의 첨탑은 석탑의 태국 양식과 다른 강렬한 단순함을 지닌 순수 라오스 양식이다.

탓 루앙 사원은 1566년 세타티라수(Scttathirath)왕이 건립한 것으로 탑에는 석가의 유발(遺髮)과 가슴뼈가 소장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매년 11월에 대제(大祭)가 개최된다.

※비엔티엔의 원 발음은 위앙짠이다. 단지 프랑스 식민시절 유럽인들의 발음에 맞춰 비엔티엔으로 불리워졌던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비안찬시는 나가 수반낙(Naga

Souvannanak)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비안찬은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양 기슭에 자리한 고대도시로,

원래 명칭은 ‘반 농 칸테 피세우아남(Ban Nong Khanthae Phiseuanam)’ 이었는데,

기원전 430~120년의 첫 지도자였던 바우리찬(Bourichan) 혹은 프라야 찬타불리 파싯티삭(Phraya Chanthabouly Pasitthisak)이

현재의 이름인 비안찬으로 변경했다.


1357년 파 응움(Fa Ngoum)왕은 라오스 전체를 통일하여 란 쌍(Lane Xang) 왕국과 이웃 왕국을 아우르는 힘과 

 

권력을 갖게 된 위대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거창한 축제를 열었다. 이 축제는 오늘날의 비안찬 지역인 팍 빠삭(Pak Pasak)에서 열렸다.
1560년 싸이세타(Saysettha) 왕은 란쌍 왕국의 수도를 루앙쁘라방에서 비안찬으로 옮기며 비안찬을 

 

 ‘나코른 찬타불리 시타 타낙하나후드 우따마 라자타니(Nakorn Chanthabouly Sitta tanakhanahood Outtama Rajathany)’라 불렀다.

17세기 솔리야봉사 타미카랏(Souliyavongsa Thamikarat) 왕 시절, 비안찬은 가장 진보적인 도시로 성장하여

 

정치 행정, 사회경제 및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왕은 용맹하고 명석하며 자애로웠고, 백성들은 행복했다.

 

메콩강 기슭을 따라 늘어선 황금빛 집들을 내려다보는 궁전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1828년 비안찬은 샴 군대에 의해 불에 타고 두 개의 도시로 분열되었다. 메콩강 우측의 도시는 샴의 영토가 되었고,

좌측의 도시만이 라오스의 영토로 남았다. 오늘날의 비안찬은 본래의 크기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규모로 남았다.

2009~2010년 사이 비안찬에서 중요한 역사적 행사가 두 개 열렸다. 2009년에는

동남아시아 스포츠 제전인 제25회 동남아시아게임(SEA Games)이 열렸고,

 2010년에는 라오스의 비안찬 천도 450주년 (1560~2010년)을 경축한 것이다.

이 두 기념비적인 행사를 준비한 뒤, 비안찬 시민들은 여전히 이 도시의 평화롭고 쾌적하며, 환경친화적이고

매력적이며 경쾌하고 진보적인 특성을 계속해서 발전시켜오고 있다.

‘비엥(Vieng)’은 라오스어로 ‘도시’라는 의미이다.
‘찬타’(Chantha, tiane)는 빨리어로 백단향 혹은 달이라는 뜻이다. 비안찬은 백단향의 도시이며, 백단향은 도시의 상징이다.

 

비안찬은 또한 달의 도시, 혹은 시민들이 달을 상징으로 섬기는 도시이기도 하다.

실제로 라오스 국민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달에서 왔다고 믿고, 심지어는 국기의 한 가운데에서도 달을 본뜬 모양을 찾아볼 수 있다.
비안찬의 구시가지에는 메콩강을 따라 고대의 사원, 박물관, 기념물, 공원이 서로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그 매력과 흥미를 더한다.
라오스의 현대적인 도시 비안찬시에는 갤러리, 부티크, 극장, 나이트클럽과 인터넷 카페가 들어서 있어 전 세계로부터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도시의 규모는 작지만, 비안찬시에는 라오스 요리뿐만 아니라 외국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다양한 식당이 즐비하다.

 

   
▲ 파 탓 루앙을 중심으로 조성된 회랑에는 많은 성물과 기록물들이 전시돼 있다.
   
▲ 불상을 전시해 놓은 호 파케오(Ho Phako)사원. 원래는 왕실사원으로 에메랄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세웠다.

 

 

 

 

 

 

 

 

 

 

 

 

 

   

▲ 목조건물이지만 고풍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시사켓 사원.